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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에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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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에 머물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11> 육십령~소사고개(6.3~5)

산행 여덟째 날.

화요일. 맑음.

육십령 휴게소의 민박집에서 잠든 밤은 산행을 위해 일어난 새벽녘이 돼서야 조금 따스해졌다. 심한 감기 때문이었을까. 추운 밤이었다. 코가 꽉 막혔다. 창밖은 아직 어스름했다. 행여 잠든 이들 깨울세라 조심스레 마당으로 나갔다.

지난 금요일 육십령까지의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나는 이틀 동안 정신없이 앓았다. 온 몸은 맞은 듯 쑤셨고 부어올랐다. 감기는 더욱 심해졌다. 채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산행을 위해 내려오는 길 내내 몸은 으슬으슬했다. 산행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무릎은 벌써 아팠다.

이번 주 산행을 잘 할 수 있을까. 견뎌 낼 수 있을까.
덕유산 구간은 매우 험하고 거칠다고 하던데...

새벽 공기가 싱그러웠다. 바람이 많았다. 맵고 세찼다. 옷을 여몄다. 마당 한 구석에 수국이 피어 있었다. 흰 수국이었다. 토양의 상태에 따라 흰 색, 연분홍색, 하늘색, 연보라색 등으로 변하여 그 아름다움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꽃이다. 그런 변화무쌍함 때문인지 '변하기 쉬운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었다. 새벽녘에 바라 본 수국의 모습은 청초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여리어 품어주고 싶었다.

바람은 세차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비 온다는 소식에 은근히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고마운 일이다. 조금씩 사위가 밝아왔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산을 바라보았다. 능선을 따라 흐르는지 구름은 산에 가득했다. 산 정상은 구름에 쌓여 있었다. 보이지 않았다. 수국을 닮았는지 산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었다.

저 구름 속을 걷는 것이 오늘의 산행이겠구나.
▲ 덕유산을 보다ⓒ이호상

구름 속을 걷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의 걱정이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남에서부터 오르는 백두대간 덕유산 종주는 육십령(六十嶺)에서부터 시작한다. 덕유산(德裕山)과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있는 육십령은 신라 때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래서였던지 옛날에는 산적이 많아 이 고개를 지나려면 60명이 모여 올라가야 했다고 한다. 산적의 무리가 꽤나 컸던 모양이다. 그런 연유로 이 고개는 육십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흐른 세월 탓에 육십령의 산적은 자취가 없고 그들이 머물던 자리에는 육십령 휴게소가 들어서서 넉넉한 인심으로 산을 타는 이들을 살펴주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고개는 주요교통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26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한 대장은 산행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은 육십령에서 출발하여 할미봉, 장수덕유산, 남덕유산, 월성치, 삿갓봉을 지나 삿갓골재 대피소까지 갈 예정입니다. 삿갓골재 대피소에서 자겠습니다. 이 덕유산 구간은 산세가 거칠고 바위가 많습니다.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코스들이 있습니다. 백두대간에는 난이도 A코스 구간이 다섯 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오늘 산행에 있습니다. 모두 유의하시고 안전 산행하시기 바랍니다."

덕유산은 동서로 영호남을 나누고 있는 큰 산이다. 주봉인 향적봉에서 남덕유산에 이르기까지 장장 100 리에 걸친 산줄기는 1,000m 가 넘는 봉우리를 여럿 품고 있다. 이렇게 크고 넉넉한 산이다 보니 이름도 여럿으로 나뉘어 있다. 백두대간 마루금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가장 높은 봉우리인 향적봉(1,614m) 일대는 북덕유산, 육십령에서 올라서는 남쪽 봉우리는 남덕유산(1,507m) 그리고 남덕유산의 서봉(1,510m)은 장수덕유산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광려산(匡慮山) 또는 여산(廬山)으로 불렸던 이 산은 덕이 많고 너그러운 어머니와 같은 산이라고 하여 덕유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난리를 겪을 때 이 산으로 숨어들면 안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고, 이성계 장군이 이 산에서 수도할 때 수많은 맹수들에게 한 번도 해를 입은 적이 없다고 하여 덕이 넘치는 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 할미봉에서 내려가다ⓒ이호상

아침 6시 25분 할미봉을 오르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아침 숲은 지난 밤 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나무들의 수런거리는 소리, 나뭇잎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젖은 날개를 말리기 위해 푸드덕거리는 새들의 날개 짓 소리 등으로 분주하였지만 그날 아침 나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할미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깎아지른 듯 가팔랐다. 너무나 가팔라 나무를 보고 숲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오직 발 디딜 곳을 찾기 위해 겨우 몸을 놀릴 뿐이었다. 바위와 바위, 작은 돌 틈 사이로 겨우겨우 발을 끼워 넣으며 조심조심 올랐다. 때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여 나무뿌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올랐다.

무엇인가 하나라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고단한 인생길 살아가면서도 이처럼 무엇인가 하나라도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기댈만한 사람이 있다면 살아볼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결에 가슴은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용기가 솟았다. 허벅지의 근육통은 벌써 찾아 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할미봉 정상에 가까웠을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불어 온 바람에도 나는 위태로웠다.

1,026m 할미봉 정상 일대는 온통 바위였다. 말 그대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였다. 절벽처럼 깎아내린 듯 매끄러운 바위들이 보기에도 위태로웠다. 위태로워 보이는 바위 한 곁에 겨우 앉으니 온 산에 구름 가득했다. 구름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구름의 바다만이 내 앞에 있었다. 덕유산의 깊고 깊은 골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구름은 능선을 지나고 봉우리를 넘었다. 그 때마다 산들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들처럼 나도 흐르는 것 같았고, 바람으로 인해 한 방향으로 휘어진 나뭇가지들처럼 내 몸도 휘어질 것만 같았다. 지나 온 길, 지나 온 산들도 보였다. 백운산, 깃대봉, 영취산 등이 보였다.
할미봉을 떠났다. 백두대간의 난이도 A코스 중 하나라는 가파른 암벽이었다. 로프에 의지해 내려갔다.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내려오는 동안은 허벅지의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서봉을 향했다. 숲 사이로 난 길마다 온통 참나무 숲이었다. 지난 가을 떨어진 나뭇잎들이 길에 가득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나뭇잎들이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나는 그 느낌을 즐기느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떼곤 했다. 숲은 따스하고 안온했다.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그 숲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순간 그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지나 온 삶의 고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신갈나무ⓒ이호상

꽃이 보였다. 숲 길 바위 곁에 홀아비 바람꽃 무리가 피어있었다. 바람에 쓰러질듯 하나씩 올라온 여린 꽃대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늘고 여린 흰 꽃들이 바람에 실려 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바람꽃은 바람과 친한 꽃이다. 바람꽃 종류를 통칭하는 속명 '아네모네'(Anemone)는 그리스어로 '바람의 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꽃은 바람에 쓰러질 듯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춤을 추며 즐겁게 한 때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바람을 타며 지나는 이들을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홀아비바람꽃을 뒤에 남겨 두고 참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연분홍 철쭉 가득한 길을 지나니
서봉(1,492m)이 눈앞에 있었다. 서봉에 올랐다. 구름 가득하고 바람 거셌다. 바람을 따라 구름이 왔다. 내 몸을 어루만지며 지났다. 이내 몸이 축축해졌다. 한기가 느껴졌다. 쟈켓을 꺼내 입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여덟 사람은 절해고도에 갇힌 것 같았다.

가야할 길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구름 탓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길은 거기 있다. 한 걸음만 내디뎌보면 길이 거기 있음을 알 수 있다. 길이란 그런 것이다. 내딛는 발걸음만큼 열리는 것이다. 한 걸음 내딛으면 한 걸음만큼 열리는 것이다.

지나는 이들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길이 아니다. 아무리 있던 길도 잠시만 지나지 않으면 잡초 무성해 길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있던 길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 산길뿐이랴. 인생길도 그러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산길이야 발걸음을 따라 걷지만 인생길은 마음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이다.

"물이 너무 찔끔찔끔 나와요."

참샘으로 물을 뜨러 갔다 오는 신범섭 감독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남강의 발원지인 샘이다.
▲ ⓒ이호상

서봉에서 내려와 점심 식사를 했다. 한대장이 뜯어온 참취와 나물취에 밥을 싸서 맛나게 먹었다. 고마운 자연이다. 언제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니 말이다. 딱따구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식사를 하려나보다. 그 소리가 정겨웠다. 잠시 앉아 듣다가 짐을 꾸렸다. 길을 나섰다. 남덕유산(1,507m)으로 향했다. 남덕유산은 대간 길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지만 지나칠 수는 없는 산이었다.
▲ 설앵초 ⓒ이호상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짙은 분홍빛 꽃송이가 보였다. 설앵초였다. 너무나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자태로 푸른 나뭇잎들 사이에 피어 있었다. '행운'과 '젊은 날의 슬픔'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꽃말을 지난 꽃이다.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의미의 꽃말을 한 꽃이 지닐 수 있을까 의아했다. 어쩌면 인생의 슬픔이란 행복과 언제나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아름다워 때로 슬프게 느껴지는 꽃들처럼 말이다.

나는 한 동안 설앵초를 바라보았다. 그 소박하고 가녀린 아름다움 때문에 내가 행운을 얻은 것만 같았다. 마음이 따스해졌다. 떠나기 아쉬운 마음을 남겨 두고 남덕유산을 향하니 연분홍 철쭉 무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손 흔들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남덕유산의 정상에 오르니 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산자락을 따라 이룬 숲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로 사람 사는 마을들이 멀리 보였다.

남덕유산에서 월성치로 가는 길은 떨어지는 것처럼 경사가 급했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른 다리의 통증은 심했다. 왼 다리에만 의지해 걷다 보니 왼 무릎에도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오직 스틱에 의지해 비탈길을 내려갔다. 숲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듯 했다. 월성치를 지나 1,418m 삿갓봉에 올랐을 때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흐려졌다. 오후 6시 12분이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비 내리기 전, 어둠이 내리기 전 삿갓골재 대피소에 들어가야 했다. 사위는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숲에서 하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꽃이었다. 이제껏 보지 못하던 꽃이다. 태백말발도리였다. 흰색꽃잎 다섯 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얀 꽃술들도 질세라 저나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태백말발도리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빛처럼 어둠 깃드는 숲에서 저 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는 이 없어도 저 홀로 빛나고 있었다. 숲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 생명 움트다ⓒ이호상

우리가 삿갓골재대피소로 내려섰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바람은 거셌다.
착각이었을까. 심한 코감기 때문이었을까.
거센 바람 속에서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불어 온 바람은 내 몸을 어루만지며 지났고 바람을 따라온 구름은 머물렀다.
어둠이 내린 깊은 숲을 따라 삿갓골대피소의 밤은 깊어갔다.

최창남/작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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