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鬼자는 귀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렇다면 甶이 귀신의 머리를 그렸다는 얘기로 되돌아간다. 그런 설명이 좀 곤란하다고 생각됐는지, 鬼는 커다란 가면을 쓴 모습이라고 한다. 가면과 무서운 모습 등, 지난 회의 異(이)자에 대한 설명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그림 1~4>가 그 다양한 모습이다. 아랫부분이 人(인)·卩(절)·女(녀)·大(대) 등 사람의 여러 모습을 그렸다는 글자들로 채워졌음이 흥미롭다. 갑골문 시대에 이미 앞서의 설명과 같은 인식이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鬼와 윗부분이 같은 卑(비)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그림 5>). 들고 있는 것이 뭐냐를 놓고 사냥 도구, 부채, 손잡이가 있는 술통 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느 것을 갖다 놔도 '장면 상형'일 뿐이다. 鬼의 아랫부분이 여러 가지로 나타났음을 상기하면, <그림 5> 역시 그 변화에서 그리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卑의 설명에 동원된 사냥 도구는 지난 회에 畢(필)의 설명에 동원됐던 사냥용 그물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 5>는 사실 畢의 옛 모습이라는 <그림 6>과 큰 차이가 없다. 이렇게 보면 卑는 지난 회에 나왔던 畢과 같고, 畢이 畀(비)와 같은 글자였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卑=畀로 연결되는 것이다. 卑와 畀의 지금 모습도 흡사하고 무엇보다 발음이 일치하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런 연결은 다시 鬼로까지 이어진다. 鬼의 발음은 畀=異(이) 계통의 冀(기)와 비슷하다. 鬼는 땅이나 陰(음)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이나 陽(양)인 神(신)에 대비해 '낮다'의 의미가 나올 수 있으니, 의미상으로도 연결된다.
卑=鬼라고 보면 鬼자의 오른쪽 厶(사) 부분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를 두고 '몰래 해치다'의 뜻으로 추가됐다거나 아예 의미 없는 것으로 무시하기도 하는데, 이런 설명들은 궁여지책이다. 卑=鬼는 위나 아래 모두 두 손의 모습이니, 儿과 厶가 모두 손의 모습이 변한 것이다. <그림 1>이나 <그림 6>은 한 손만 그려진 간략형의 맥이 이어진 것이고, 鬼의 지금 글자꼴은 오히려 본래 모습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는 글자꼴인 것이다. 한 손만 그려진 간략형은 전에 봤던 爯(칭/승) 역시 마찬가지다.
畏(외) 역시 같은 글자다. <그림 7>은 <그림 5>와 거의 같은 구성이다. 다만 卜(복)자처럼 생긴 부분을 옆으로 떼어 놓았을 뿐이다. '두려워하다'의 의미는 '귀신'과 바로 연결된다. 발음 역시 鬼·異 부근에 있다.
이번엔 <그림 8>을 보자. 畀 등의 모습과 하등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이 글자는 其(기)로 설명된다. 其는 아래 丌를 제외한 부분이 본래 모습으로 곡식을 까부를 때 쓰는 키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丌는 그것을 올려 놓은 탁자 또는 잡고 있는 두 손이다. 그러나 상형 대상이 너무 넓다. 그리고 <그림 8>은 영락없는 畀의 모습인데, 其의 발음 역시 鬼 등과 연결된다. 其=鬼=畀가 된다. '키' 얘기는 其를 구성 요소로 하는 箕(기)가 그런 뜻의 글자인 데서 끌어다 붙인 얘기다.
<그림 9>와 같은 모습인 具(구)는 어떨까? 윗부분이 鼎(정)이어서 솥을 들고 있는 모습이라는 얘긴데, 그 무거운 솥을 혼자 들고 있으니 엄청난 장사다. 그러나 역시 그런 장면 상형은 아니다. 윗부분이 其의 경우에서처럼 田 형태가 더욱 변한 것이라고 보면 具=其다. 발음 역시 문제될 게 없다. 조금 멀리 가보면 冓와 일치하는 발음이고, '갖추다' '모두'라는 의미는 共의 '함께'와 일치한다.
한 가지 더. <그림 10>은 조개의 모습을 그렸다는 貝(패)다.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지금 글자꼴의 아래 八(팔) 부분이 문제다. <그림 11> 같은 모습을 이어받은 것인데, 조개의 모습을 망가뜨리고 있다. 그래서 조개를 꿰는 줄을 그렸다느니, 심지어 入水管(입수관)·출수관 같은 '전문지식'을 동원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貝의 발음이 畀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보면 이 또한 그 변형일 가능성이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