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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백색의 굴참나무 숲을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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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백색의 굴참나무 숲을 지나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9> 정령치~육십령/(5.27~30)

산행 여섯째 날

남겨 두고 온 대간 길로 들어서기 위해 다시 복성이재를 찾았다. 아침 6시 25분이었다. 복성이재라고 써 있는 이정표 곁으로 '중치 12.1km'라는 안내판이 달려 있었다. 치재, 꼬부랑재, 봉화산, 월경산, 중재를 지나고 백운산을 넘어 무령재까지 이르는 18km가 오늘 가야 할 길이었다. 산행을 위해 가볍게 몸을 풀었다. 등산화의 끈을 조이고 스틱을 몸에 맞게 조정하고 배낭을 멨다. 수분을 가득 품은 습한 바람이 지났다. 대간으로 들어서는 산길 곁의 나뭇가지에는 이 길을 지난 이들이 걸어 놓은 색색의 리본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길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는 하였지만 아름답지는 않았다. 숲과 어울리지 않았다. 리본에는 산악회의 이름들도 있었고 개개인의 이름들도 적혀 있었다. '아무개 지나가다'라고 이름을 써 넣은 것도 있고 사진까지 새겨 넣은 것도 있었다. 산이 받아들여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백두대간을 내가 걸었다고 산을 지나는 이들에게 드러내어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부질없는 짓이다.

산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어제 종일 내린 비로 숲은 젖어 있었다. 안개 가득한 새벽 숲을 헤치며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나아갔다. 신범섭 촬영감독은 금연 후 몸이 가벼워졌는지 발걸음이 가벼웠고 사진가 이호상은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채 뛰듯 앞서 나갔다.
▲ 보리수 나무ⓒ이호상

숲은 울창했고 어두웠다. 길도 좁아졌다. 숲 사이로 나 있던 좁은 길이 환해졌다. 꽃이다.
"히야~ 저게 무슨 꽃이야? 무슨 꽃이 저렇게 길을 덮었어?"

좁다란 숲길은 연한 황색의 꽃들로 덮여 있었다. 그 열매에 하얀 점이 점점이 박혀 있어서 보리똥나무라고도 부르는 보리수나무였다. 길 곁으로 보리수나무가 연한 황색의 꽃들을 가득 달고 서 있었다. 짙은 향기가 숲에 가득했다.

보리수나무는 소나무나 참나무처럼 크지도 않고 장미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지도 않지만 늘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나무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전국 어느 산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꿀도 많고 향기도 좋다. 장미꽃처럼 화려하고 국화처럼 청초하지는 않지만 흰색이나 연한 황색을 띄는 보리수 꽃 또한 앙증맞게 아름답다. 어찌 보면 별을 닮았다. 다정하고 다감한 마음을 품게 하는 나무이다. 정감을 품게 하는 나무이다. 위로를 주는 나무이다.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처럼 마음에 남는 나무이다.

보리수나무 향기 가득한 숲길을 꽃잎 밟으며 걸었다. 마음에 향기 가득했다.

숲은 어두웠다. 참나무 숲이었다. 신갈나무 가득하고 굴참나무 간간이 외롭게 서 있었다. 하늘에 닿기라도 할 듯 자란 참나무들은 무성한 잎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햇빛을 숲의 다른 생명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빛을 독점해 영원히 숲의 지배자로 남고 싶은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나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생명이란 어떤 것이나 자신의 삶을 충실히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니 말이다. 자신의 생명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말이다.
▲ 굴참 나무ⓒ이호상

바람이 불었던가. 무성한 신갈나무 잎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어두웠던 숲이 순간 환해졌다. 투명한 빛의 줄기들이 반짝이며 숲가에 드리워져 있었다. 무성한 참나무 잎을 뚫고 들어선 수십 가닥 빛의 줄기들이 저마다 빛나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그대로 손 안에 담겨질 것 같았다. 화사하고 눈부셨다. 신갈나무의 잎도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거칠기만 하던 껍질들도 음영을 드러내며 세월의 무게를 장엄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햇살을 받은 어린 풀들도 물기 남은 여린 잎 한들거리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저녁 햇살을 받아 부서지고 있는 은빛 물결 같았다. 아름다웠다. 마음 따스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이었다.

따스해진 마음 때문이었을까.

봉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꽃들이 보였다. 하얀 꽃 옹기종기 피어난 미나리 냉이 꽃도 있었고 하늘을 향해 가지런히 꽃을 피운 흰색의 촛대승마도 보였다. 꽃이 달리는 모양이 수국과 같아서 목수국(��) 또는 백당수국이라고도 불리는 백당나무 꽃도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하얀 꽃들이 중심에 있는 무성화 주위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눈부신 아름다움에 마음 또한 차분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919.8m 봉화산 정상입니다."

봉화산 정상은 억새와 싸리나무들로 가득했고 하늘은 그 위로 눈부시도록 맑았다. 푸른 하늘 아래 세상은 눈이 닿는 곳마다 구름이었다. 구름은 호수에 이는 잔물결처럼 일고 산은 외롭게 떠 있었다. 마치 구름의 바다를 떠도는 외로운 조각배 같았다. 어린 시절 시냇가에서 마음을 담아 띄우던 종이배 같았다.

저 봉우리들도 저마다 마음을 담고 흐르고 있을까.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지나는 구름 사이로 보였다. 고남산도 보였다. 고남산에 올랐던 날이 아득하기만 한데 불과 어제의 일이었다. 멀리 천왕봉도 보이고 반야봉도 보였다.

바람이 세찼다. 높은 뫼를 넘지 못해 골짜기에 머물던 구름이 바람을 타고 산을 넘고 있었다. 내 몸을 에워싸며 지난다. 몸을 적신다. 지나는 구름에게서 향기가 났다.
▲ 봉화산 정상에서ⓒ이호상

이게 무슨 냄새일까. 꽃향기일까.

젖은 나뭇잎 냄새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리웠던 고향의 냄새처럼 정겨웠다. 그 향기를 따라 가야 할 것 같았다. 살아온 날들 속에서 가장 아쉽고 가장 그립고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의 이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한 대장이 서둘러 길을 잡았다. 우리는 광대치로 향했다. 지난 가을 떨어진 참나무 잎들이 수북하게 깔려 있었다. 밟을 때마다 푹신했다.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다리를 쉴 겸 커다란 신갈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았다. 나뭇잎을 주웠다. 나뭇잎들은 송송 구멍이 나 있었다. 분해되고 있었다. 제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런 생각에 나뭇잎마저도 살갑게 느껴졌다. 이 산, 이 땅, 이 흙, 이 나무, 이 나뭇잎 모두 내 살이고 몸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제 길어야 이삼십년이 지나면 나도 이런 모습으로 있게 될 테니 말이다.

해발 820m에 자리한 광대치를 지나 월경산(980m)에 오르니 끝없이 이어진 산죽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조릿대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은 끊어졌다가는 다시 이어지곤 하였다. 족히 2km는 될 듯 했다. 무성한 잎들은 내 뺨과 손등과 몸에 스치고 부딪혔다. 싱그러웠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상쾌했다. 몸의 피로와 다리의 통증을 잊을 수 있었다. 그 덕분이었으리라. 나는 점점 심해지는 다리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중재(695m)를 지나1,278.6m의 백운산(白雲山)에 오를 수 있었다. 백운산은 정상에 오르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정상에 다다른듯하면 굽이쳐 내리쳤고 다다른듯하면 솟구쳐 올랐다. 그렇게 여러 차례를 거듭하며 인내를 시험하고 마음을 살피고 나서야 비로소 산은 정상에 오르는 길을 열어 주었다.
▲ 봉화산ⓒ이호상

백운산은 굴참나무 숲을 품고 있었다. 두 팔을 활짝 벌려 안아야 될 정도로 굵은 굴참나무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굵디굵은 나무껍질들이 흰 색에 가까운 회색이었다. 회백색의 아름드리 굴참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회백색의 굴참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숲은 그 색깔 때문인지 여느 숲과 다른 느낌이었다. 신비로웠다. 마치 신화 속의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 했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산이 주는 선물이었다. 일 년에 250여일은 흰 구름 속에 머문다는 백운산이 주는 선물이었다. 백두대간이 주는 선물이었다. 백두대간을 걷지 않았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은총이었다. 마음은 감사함과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했다. 지나는 이 없는 숲은 고요했다.

정상에 오르자 남쪽으로는 지나 온 월경산과 봉화산이 보였고 북쪽으로는 나아가야 할 깃대봉과 남덕유산이 보였다.

'백운산의 물줄기는 서쪽은 백운천을 통해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옥산천을 통해 낙동강으로 흘러듭니다. 그리고 저기 보이시지요? 저기가 바로 우리가 다음 주에 갈 남덕유산입니다.'

일행들에게 설명을 하는 한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지리산에서부터 뻗어와 백운산으로 솟았다가 덕유산으로 흐르고 있는 백두대간을 보았다. 장대하고 장엄한 이 땅의 등줄기가 거기 있었다. 나와 함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1,014.8m의 깃대봉이 보였다. 걸어가야 할 길이 보였다. 발걸음을 떼었다.
▲ 산죽길을 지나다ⓒ이호상

"먼저 갑니다."

모두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저 웃으며 숲길로 들어섰다.
억새와 싸리나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웃는 듯 몸 흔들고 있었다.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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