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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숲에서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8> 정령치~육십령/(5.27~30)

산행 다섯째 날

이른 새벽부터 내린 비가 숲을 적셨다. 대간 길 마루금마다 강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옷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정겨웠다. 어린 날 듣던 뒤뜰 장독대에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를 닮아 있었다.

'후두둑- 툭, 툭, 툭-'

숲은 그대로 바다였다. 내린 빗줄기 기화되며 피어올라 그대로 구름이 되어 흘렀다. 산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구름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그저 모든 것이 아스라해 보였다. 그 아스라함 때문이었을까. 아주 오래 전에 지나간 시간들이 되살아났다. 지나간 순간순간들이 마치 지금처럼 느껴졌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아픔이 일었다. 저미듯 아파왔다. 그리고 그리웠다.

숲에 드리워진 구름들은 나무들을 감싸고 있었다. 구름들 사이로 나무들이 보였다. 그 모습이 구름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 같았다. 그저 구름 위에 떠 있는 작고 외로운 봉우리들 같기도 했다. 이곳이 바로 선경이라는 듯 비 내리는 숲은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는 벗들과 함께 걸으면서도 외로웠다.

비 사이로 바람이 지나자 숲을 덮고 있던 운무가 걷혔다. 소나무들의 밑둥치마다 어린 참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비에 젖은 어린 참나무 잎들이 싱그럽고 푸르렀다.

지난 가을 떨어졌던 도토리들이 제 생명을 품어 자라고 있었다. 도토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모두 참나무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다람쥐나 어치의 먹이로 사라지기도 하고 그대로 썩어 없어지기도 한다. 땅에 묻힌 도토리들만이 잎을 틔우고 참나무로 자라나 제 삶을 살아갈 기회를 잡는다. 다람쥐나 어치의 도움을 받아 땅에 묻혔다고 하더라도 모두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땅 속에 깊이 묻힌 도토리들만이 오백 년, 천 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거대한 참나무로 자랄 수 있다. 깊이 묻히지 못한 도토리들은 발아되어 자란다고 하더라도 큰 비나 태풍을 견디지 못한다. 뿌리 채 뽑혀 쓰러진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때문이다.
▲ ⓒ이호상

숲은 살아 있었다. 숲은 변하고 있었다. 숲을 지나는 이들이 알지 못할 뿐이다. 어린 참나무들은 소나무들 아래 자리를 잡고 다음 숲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들이 죽으면 참나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소나무 숲이 참나무 숲으로 변하는 것이다. 참나무들은 그 숲의 주인이 되기까지 수 십 년 아니 수 백 년 어쩌면 수 천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세월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디 살아 있는 것이 어린 참나무들뿐이랴. 비에 젖은 풀잎 하나까지도 모두 살아 제 삶을 살아가며 숲을 변화시키고 있다.

생명은 잠시도 멈춰 있지 않은 법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아무리 지난 겨울이 혹독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몰아쳤다 해도, 아무리 큰 불이 나 숲을 모조리 태웠다 하더라도 아침이면 생명은 움튼다. 풀이 자라고 잎이 나고 꽃이 핀다. 다시 숲이 이루어진다. 마치 멈춰서 있는 것 같지만 결코 멈춰서 있는 법이 없는 시간처럼 말이다. 마치 흐르지 않는 것 같지만 잠시도 흐르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는 세월처럼 말이다.
아침7시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를 지닌 통안재에서 숲으로 들어선 우리는 버들재(柳峙)를 지나 매요(梅要)마을로 들어섰다. 오전 9시 30분이었다. '매요리'라는 마을 이름은 일찍이 사명대사가 '마을 사람들의 성품이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을만은 모든 것이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듯 했다. 논과 밭도 가지런하여 집들과 조화를 이루었고 마을은 산과 어울려 아늑하고 아담했다.
▲ 매요마을로 들어가다ⓒ이호상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이었다. 마을 한 편에 정자가 있었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에서 늘 개방한다는 정자였다. 마을 사람들의 배려이리라.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지난 밤부터 줄기차게 내리는 비 때문이었는지 정자는 닫혀있었다. 계단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처마 아래에 기대어 섰다. 잠시라도 비를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더욱이 나는 휴식이 필요했다. 오른 쪽 허벅지의 근육통이 벌써 와 있었다. 연이은 산행을 견디지 못해 몸 곳곳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에어파스를 뿌리고 배낭 커버를 씌우는데 한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매요 마을에서 쉬면서 막걸리를 한 잔씩 하는 것이 대간을 타는 사람들의 오랜 전통입니다."

굳이 전통을 들추지 않더라도 비에 젖어 으슬으슬 추워 오던 차에 잘 되었다 싶었는지 한 친구가 얼른 막걸리를 사왔다. 우리는 모두 '전통이라는데...'하고 한 마디씩 거들며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비 내리는 날 처마 아래서 먹는 막걸리의 맛은 유별났다. 맛났다. 막걸리 한 잔 마시는 데도 전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생애 첫 날이었다.

잠시 가늘어지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질 무렵 우리는 고속도로와 만나는 사치재를 지나 지리산 휴게소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적지 않은 비가 내리는 날 비옷을 입고 산행을 하고 있는 우리들을 부러운 듯 무심한 듯 걱정되는 듯 바라보았다. 비옷을 벗고 배낭을 내려놓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점심 식사를 주문했다. 추어탕 다섯 개, 돈까스 한 개, 간 고등어 하나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부셨다. 참으로 맛나게 먹었다.

휴식으로 인해 오른 허벅지의 통증은 잠시 잦아들었으나 걸을 때마다 뜨끔한 통증은 여전하였다. 다시 에어파스를 바르고 진통제를 먹었다. 나는 몸이 통증을 견딜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여전히 비는 내렸다.

시리봉(777m)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오른 허벅지는 찌르듯 아파왔지만 길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이어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고 있는 다리를 스틱에 기대며 끝나지 않는 길을 따라 나아갔다. 때때로 바람 불어와 지친 몸을 위로해 주었다. 시리봉에 가까웠을 때 새까맣게 타버린 숲이 보였다. 약 10여 년 전에 일어난 산불로 인해 타버린 숲이다. 소나무 숲이었다. 소나무들이 타버린 자리에는 어느 새 참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어느새 숲은 참나무 숲으로 변해 있었다. 생명의 경이로움이었다. 불 탄 나무들의 주검들 속에서 생명은 새로운 숲을 일구고 있었던 것이다.
▲ 아막산성에서ⓒ이호상

시리봉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복성이재를 향했다. 복성이재에 다다를 무렵 다시 무너진 성벽이 보였다. 아막산성(阿莫山城)이라고도 불리는 아막성이었다. 무너진 아막성벽 곁에는 전라북도 기념물 38호라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그 옛날 삼국시대에 세워진 오래된 성이다. 신라와 백제가 국경 분쟁을 일으킬 때마다 치열하게 싸웠던 역사적인 성이다.

백제 무왕 3년 서기 602년 백제는 4만의 군사로 아막성을 공격하였으나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하여 성을 점령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후일 재차 공격하여 이 성을 점령하였지만 다시 신라에게 빼앗겼다. 그 후 무왕 17년에 총공격을 감행해 다시 점령하였다.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천 수 백여 년 전의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 땅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못 다한 삶이 아직 그 곳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백제에서는 '아막성'으로 불리고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린 이 성의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기와조각과 백제 토기편들은 무슨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을까.

성 둘레가 약 630m에 달하는 큰 성이다. 네모반듯하게 다듬은 돌들을 정교하게 쌓아 성벽을 쌓은 그들의 축성 기술을 볼 수 있는 성이다.

세월 탓일까. 사람들의 무심함 탓일까.

성벽은 무너지고 성벽을 쌓았던 돌들은 허물어져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산행을 시작한지 두 주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역사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는 무너진 성벽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높이와 험준함 때문이리라. 백두대간은 많은 성벽을 품고 있었다. 이제는 무너진 성벽이지만 말이다.

참으로 무상하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세월 탓일까.
아니면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든 이 시대의 몰 역사성 때문일까.
지나 온 우리의 삶과 역사에 대해 이토록 냉담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허물어져 내린 돌들을 조심스레 밟고 골짜기를 내려오며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갔다. 수백 년, 수천 년 이 땅의 숨결이고 삶이었던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들을 느끼며 아팠다. 지나 온 시간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루고,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 아이들과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란 결코 잊혀 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사란 언제나 오늘의 의미를 갖는 것이니 말이다. 역사란 언제나 오늘의 일이다. 오늘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지나간 역사란 없다. 역사란 언제나 오늘이다. 결코 잊혀 질 수도 없고 잊혀 져서도 안 되는 오늘의 일이다.
▲ 복성이재ⓒ이호상

시간의 문으로 들어가는 신비한 돌길을 지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돌계단의 끝에 오늘의 목적지인 복성이재가 있었다. 천 수 백여 년 전 쌓았던 아막산성에서 복성이재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시간의 문을 지나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하기야 시간여행이 별거란 말인가. 이런 것이 바로 시간여행이다.

"힘내세요. 이제 다 왔어요."

김 대장의 말이 들려왔다. 복성이재가 눈앞에 보였다. 저녁 깃드는 숲 사이로 먼저 도착한 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 내리는 숲을 지나 온 웃음소리는 아득하기만 했다.

나는 절룩이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나 온 길을 따라 숲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필자 이메일 : from-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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