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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를 뒤덮은 한국의 이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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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를 뒤덮은 한국의 이름 <상>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7> 한일동족론 ①

제 2 장. 열도를 뒤덮은 한국의 이름

들어가는 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해 연안에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살았는데 연오랑이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니 일본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모셨다. 세오녀는 남편을 기다리다 또 그 바위에 올라타니 역시 일본으로 갔다. 세오녀를 본 일본 사람들이 놀라 왕에게 바치니 부부가 상봉하여 세오녀는 왕비가 되었다."
▲ 연오랑 세오녀(포항 호미곶)

일본의 옛 이야기에 신라(新羅)의 왕자 아메노히보꼬[천일창(天日槍)]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메노히보꼬[천일창(天日槍)]의 아내가 일본에 건너가자 자신도 일본으로 갔다는 내용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해의 정기를 받은 처녀가 알을 낳았는데 아메노히보꼬가 이 알을 빼앗자, 그 알(태양의 정기)이 처녀로 변합니다. 그래서 아메노히보꼬는 그녀(알에서 나온 처녀)와 함께 살았는데 아메노히보꼬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니 그녀는 일본으로 와버립니다. 그러자 아메노히보꼬도 일본으로 따라 건너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메노히보코 즉 천일창(天日槍)이란 '하늘의 자손으로 태양신(日)을 믿는 창(槍)을 든 사람'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고, 일본에 철기를 전해 준 신라의 왕자라고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봅시다.

"태양신인 여성신 아마테라스와 그의 동생인 남신(男神) 스사노오가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스사노오의 행실이 좋지 못해서 여러 신들이 그를 벌하여 쫓아내니, 스사노오는 신라국(新羅國)으로 가서 소시모리(曾尸茂梨)에 있다가 진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이즈모노쿠니(出雲國)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난뒤 아마테라스의 후손들은 일본으로 가서 천손의 나라를 만듭니다."

아메노히보코의 이야기는 연오랑·세오녀와 거의 비슷한 내용 같기도 한데, 어째 부부간의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원래 한반도에서 사람이 많아지니까 서로 갈등이 일어났고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이 이주하여 자리를 잡으니까 또 많은 사람들이 옮겨갔다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이 이야기는 연오랑·세오녀나 『일본서기』의 아마테라스·스사노오의 이야기와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다만 연오랑·세오녀의 이야기는 부부간의 사이가 좋았고, 나머지는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는 원래 남매지만 사이가 나빠서 스사노오가 추방당하여 일본으로 갑니다. 그리고 난 뒤 한참 있다가 다시 아마테라스가 일본으로 가서 왕권을 장악합니다. 이 과정은 스사노오를 대신하여 연오랑을 집어넣고 아마테라스 대신에 세오녀를 집어넣으면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마테라스 대신에 아메노히보꼬를 집어넣어도 같은 내용이 됩니다. 신기하지요?

(1) 열도를 뒤덮은 한국의 이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반도쥬신(한국) 속담이 있습니다. 기나긴 쥬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 말은 맞는 듯합니다. 가까이 있는 형제들 간에는 대체로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합니다.

쥬신의 역사에서 한국과 일본만큼 가까운 사람들도 없지만 또 이들 만큼 사이가 나쁜 사람들도 잘 없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남몽골(거란)과 북몽골(몽골)의 사이도 이에 못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쥬신과 반도쥬신도 사이가 나빳습니다. 그런데 반도쥬신과 몽골쥬신은 '특이하리만큼' 사이가 좋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열도쥬신과 만주쥬신들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가까이 있을수록 이해가 충돌하다보니 사이가 나빠진 것으로 추론할 수 있겠군요.

일본의 역사를 보면 온통 도래인(渡來人)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래인이라는 것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열도쥬신(일본인)들은 이들과 한국과 연관시키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가이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인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에서 "일본에 온 귀화인들은 대부분 중국인이며 한국인이 아니다."라고 강변합니다.(1)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에마쓰식의 논리에 대해 일일이 반박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현대에는 생명공학이 많이 활용되기 때문에 이 같은 논리는 쉽게 깨어집니다. 그 동안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심도있게 논의한 사람은 최재석 교수입니다. 역사 연구에 생명공학이 광범위하게 도입되기 전인 1980~1990년대 최재석 교수는 일본의 여러 가지 관련 연구들을 종합하고 『신찬성씨록』, 『일본서기』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AD 700년 현재 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주민의 인구 구성을 보면, 한국에서 이주한 사람과 그 자손은 전체 인구의 80~90%를 차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일본 원주민들의 그것은 10~20%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2)

일선동조론이 기승을 부리던 때에 민간의 문명사학자인 요시다도오고(吉田東伍)에 따르면, 신라왕자 한 사람이 일본에 와서 각처에 자손을 두었고 그 자손 가운데 쓰쿠시(築紫 : 현재 규슈의 후쿠오카)에 정착한 후손들이 이도국(伊都國)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내용이 우리가 앞서 본 일선동조론의 논리보다는 훨씬 합리적입니다.(3)

이를 뒷받침할만한 사료로는 사가(嵯峨) 천황(809~823) 시대에 편찬된 『신찬성씨록(815)』에 나오는 성씨들에 대한 기록으로 당시에 확인 가능했던 1182개의 성씨들 가운데 31.6%에 해당하는 373개의 성씨가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신찬성씨록(815)』에는 전체 1,059씨족의 계보가 실려있는데 그 가운데 제번(諸藩)을 칭하는 씨족이 324씨로 대략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비율은 과거로부터 여러 사서에 나타나는 2,385씨족 가운데 710씨족이 대륙에서 건너간 씨족이라는 쿠리타 히로시(栗田寬)의 연구결과와 거의 일치하고 있죠.(4) 좀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BC 3세기에서 AD 7세기 초까지 한반도의 정치적 격변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침공으로 국가적 위기가 상존했던 부여계의 이동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죠. 토쿄대학(東京大學)의 하니하라 가즈로(埴原和郞) 교수는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인구는 대략 150여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그리하여 7세기를 기준으로 본다면 당시의 도래인은 선주민의 8.6배에 달하고 있다고 합니다.(5)

마쓰모도 세이초(松本淸張 : 1909~1992) 선생은 천황가의 조상이 남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일본과 조선은 같은 민족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라고 주장했습니다.(6) 마쓰모도 세이초 선생은 "조선이 동란(삼국시대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일본은 독립하여 보다 일본적으로 되어갔다. 이것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주장합니다.(7) 이 생각은 제 생각과 가장 유사한 것입니다.

문헌적으로 한일동족론을 주장한 사람은 14세기 일본 남조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였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 1293~1354), 18세기 에도시대의 저명한 고증학자인 도데이 칸(藤貞幹 : 1732~1797), 한일합방 직전 토쿄대학 사학과의 구메 쿠니다케(久米邦武 : 1839~1931) 교수 등이 있습니다.

14세기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 1293~1354)는 자신의 저서인 『신황정통기(新皇正統記)』에서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같은 종족이라고 전해왔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책들이 칸무 천황(桓武天皇 : 재위 781~806) 때 모두 불태워졌다."라고 합니다. 18세기 에도시대의 저명한 고증학자인 도데이칸(藤貞幹 : 1732~1797)은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백제인에 의해 조직되었다고 단정합니다.(8)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 1872~1967) 교수는 고대 한국이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달해주었음을 강조했고 간무천황의 어머니인 야마토노니카사[화신립(和新笠)] 황태후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사실, 백제 성왕의 히라노 신사 등과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연구 등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 주

(1) 末松保和『任那興亡史』(1956) 269쪽.
(2) 최재석 「고대 일본에 건너간 한민족과 일본 원주민의 수의 추정」『東方學志 』61호 (1989)
(3) 吉田東伍『日韓古史斷』(富山房 : 1893) 39~40쪽.
(4) 栗田寬『氏族考』,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39쪽.
(5) 埴原和郞『日本人の成り立ち』(1995)
(6) 松本淸張 『日本史謎と鍵』(平凡社 : 1976)
(7)『東京新聞』(1972.4.1)
(8) 藤貞幹『衝口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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