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앞장서 가면서 핵 문제가 해결이 되는 모양새가 가장 좋은데, 이 정부가 핵 연계론을 고집하는 한, 핵 문제라도 빨리 속도를 내서 진전되길 바랐었는데, 그게 안 되니까 남북관계도 속도를 못 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까지 얹혀 지니까, 금년 중에 남북관계가 풀릴 것인지, 원상을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의 대선이 끝나고 신(新)정부의 대북정책 방향 조정이 마무리되는 내년 상반기까지 지금과 같은 상태로 그냥 가야 하는지, 굉장히 답답한 상황입니다.
핵 협상 교착, 북한 탓인가?
그런데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 국내 분석가들이나 관리들의 접근 시각이나 출발점이 냉전적 사고나 흑백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 왕왕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검증이 고비를 넘지 못하는 것을 북한의 벼랑끝 전술이나 살라미 전술(협상 단계를 세부적으로 쪼개서 그 때마다 요구사항을 내놓는 전술)로만 자꾸 해석하려고 해요.
이거 굉장히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대목인데...까딱 잘못하면 북한이 옳고 미국이 틀렸다는 식으로 들릴 수가 있어서 내가 말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정서가 일반적으로 그래요. 북한은 무조건 택도 없는 떼만 쓰고 약속은 안 지키고, 미국은 잘 해주려고 하고 약속도 뭐든 착착 지키는데, 북한이 약속을 안 지키고 시간을 어겨서 문제가 항상 꼬이거나 악화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 비슷한 게 우리 사회에 있습니다. 물론 북한이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근거가 없는 건 아녜요. 그동안 여러 번 자기들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약속을 어긴 대목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평가나 분석이 근거 없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의 국내정치도 북핵 해결 과정에서 검증과 관련된 부시 정부의 정책에 발목을 잡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작년 10.3합의에 의해서 핵 신고를 하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풀어주게 돼있었거든요. 신고에 대한 대응조치죠. 10.3합의에서는 검증 문제까지 세세하게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불찰인지 아니면 전략적인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었는지 모르지만...그러니까 신고가 끝났으면 테러지원국 해제가 돼야 되는데 (테러지원국 해제를 선언해야 하는) 8월 11일이 임박해지면서 '검증체제를 구축하는데 북한이 성의 있게 나오지 않는다'는 식으로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어요. 왜 그렇게 나왔는지 그 이면을 속속들이 모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검증을 일종의 새로운 카드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그간의 경과가 있습니다.
2.13합의에서는 핵 시설 불능화 대가로 100만 톤의 중유를 제공하기로 했잖아요? 불능화는 11개 항목 중 8개 항목이 끝났고 앞으로 연료봉 인출, 미사용 연료봉 처리, 원자로 구동장치 제거 이렇게 3개 항목만 남았습니다. 대충 80% 정도 끝났다고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상응해서 줘야 할 중유는 100만 톤 중에서 한 43만 5000톤 정도 밖에 안 갔습니다. 80% 대 43.5%입니다. 북한으로서는 중유가 반도 안 들어온 마당에, 신고에 대한 대가인 테러지원국 해제도 지연시키면서 난데없이 검증을 강하게 요구하니까 불만일 겁니다. 물론 신고할 땐 검증을 전제로 하지만, 90년대 초의 핵물질이나 4.8합의(금년 4월 8일 싱가포르 미·북합의)에서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던 HEU(고농축 우라늄) 문제, 시리아와의 연계설까지 섞어서 요구하면, 북한으로선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를 카드로 결국 자기들의 핵 무력화만 유도하고, 보상은 엉거주춤한 상태로 그대로 넘기려는 거 아니냐고 불평을 할 수밖에 없게 돼있습니다.
이렇게 미국이 새로운 조건을 추가한 건 국내정치와 관련돼있지 않나 싶습니다. 부시 정부가 임기 2년을 남겨놓고 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 양자대화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상당 정도 성과를 냈지만, 미국 내 보수진영의 목소리가 계속 비판적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거가 가까워지니까 집토끼를 의식해서 다시 북한에 대해 요구조건을 높이는 방식으로, 공화당 후보의 표밭이 침식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상황이 아니냐. 그렇다면 앞으로 핵 문제 해결이 점차 어려워지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원래 중유 지원은 'n분의 1' 원칙으로 주기로 했지요.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5개국이 20만 톤씩 내야 되는데, 일본은 지금 납치 문제를 걸어서 일절 지원을 안 하고 있지요. 그것도 바로 일본의 국내정치 때문이에요. 일본이 우경화되는 과정에서 납치 문제를 가지고 북한 때리기를 계속 했고, 그걸로 아베 정권도 성립됐었고, 정권교체가 되긴 했지만 후쿠다 총리도 일본의 우경화한 대북정서를 완전히 거스를 수 없어서, 상당히 유연하게 나가면서도, 하여튼 납치 문제 때문에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일본이 손을 놓고 있으니까, 러시아 같은 데서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렵고, 미국도 국내정치 때문에 앞장서서 시간 내에 20만 톤을 척척 내놓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네바 합의 이행 지연과 유사한 상황
그걸 걸 보면 1994년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 때가 생각납니다. 제네바 합의도 미국 국내정치 때문에 추동력을 잃었어요. 민주당 클린턴 정부 시절이었는데 10월 21일 합의를 해 놓고,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대패를 해요. 여소야대가 된 거죠. 그러면서 클린턴 정부가 체결한 제네바 합의 이행이 굉장히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국내정치 때문에.
제네바 합의에서는 북한이 영변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는 대가로 200만KW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주고, 미북간의 수교 협상을 6개월 내에 시작하기로 약속했어요. 또 경수로 공사가 끝날 때까지 매년 50만 톤씩 중유를 주기로 했어요. 중유는 미국이 책임지고, 경수로 건설비의 70%는 우리에게, 20%는 일본, 나머지 10%는 EU(유럽연합)한테 넘겼어요. 그런데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의회권력을 장악하는 바람에 제네바 합의 이행에 사사건건 제동이 걸려요. 그러다 보니 미국의 예산을 써야하는 문제인 중유 지원에서 애로를 겪게 됩니다. 시작부터 늦어졌고, 날짜를 못 맞췄고, 그렇다고 경수로를 부담하는 한국이나 일본한테 손 벌릴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심지어 대통령이 끌어다 쓸 수 있는 국방부 예산까지 가져다가 땜질을 하면서 끌고 나가요. 그게 2002년 10월까지는 갑니다. 부시 행정부 들어와서까지 기름은 갔어요.
또 공화당 의회가 제네바 합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다 보니까, 수교협상 개시에 대한 약속을 미국이 못 지키게 돼요. 그러다 보니까 북한은 미국에 속은 게 아니냐 하는 의심을 하게 돼요. 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의심이 많아요. 기본적으로 피해의식이 있고. 자기들은 강대국들한테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그래서 언제나 '행동 대 행동'을 고집하죠. 과거에 중국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다 보니까 나름대로 살아남는 방법이, 상대방을 믿지 않고, 상대방의 선의가 확인될 때까지 먼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식에 익숙해 졌죠.
북한 잘못도 있어요. 클린턴 정부가 국내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경수로 제공을 위한 협상을 하려면 각종 의정서를 체결해야 하는데, 국제관례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의정서에) 독소조항이 어디 있는지 사전에 검토를 하느라고 그랬는지 그 과정에서 굉장히 시간을 끌어요. 그러니까 미국 쪽에서는, '이거 뭐, 해달라는 거 해주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느냐'하는 반북감정이 협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깁니다. 어렵죠.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식으로 국내에 보고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서로가 피장파장, 하여튼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넘길 수 없는 식으로 곤란을 겪지만, 그래도 하여튼 98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수로 건설) 터파기 공사가 시작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특히 햇볕정책이 추진되면서 남북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되니까 경수로 사업도 진전이 됩니다.
미국 신정부 출연 상황 '퍼블릭 디플로머시'로 대비해야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면서는 미국의 국내정치, 일본의 국내정치 때문에 9.19공동성명이나 2.13합의, 10.3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데,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요. 어디에 책임이 있는지. 특히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서는 국민들한테 이걸 설명하는 절차를 생략하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그런 모습이 더 나타나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외교부 장관을 할 때 퍼블릭 디플로머시(public diplomacy)를 강조했어요. 외교를 할 때 성과만 자랑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점이 있으면 어려운 대로 국민들한테 설명해 나가면서 국민적 지지와 동의를 받아서 상대방과 다시 협상한다는 게 퍼블릭 디플로머시의 취지라고 할 수 있지요. 난 상당히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서도 지난 10년 동안 국민들한테 성과만 홍보하는 게 아니라 애로까지도 설명을 많이 했어요. 경우에 따라선 당국자가 직접 언론을 상대하거나, 또는 그게 적절하지 않으면, 관련국들이 있으니까, 정부 고위당국자들의 관점이나 견해라는 식으로 익명으로 슬쩍 언론에 흘려주면서, 국민들이 '아, 정부가 참 어려운 여건에서도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고, 어디가 막혀 있고, 여기에 대해선 미국이 조금 잘해야 한다, 아니면 진짜 이것은 북한이 잘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번 (남북) 장관급 회담 같은 데서 따끔하게 북한에 한 마디 해라'하는 요구가 나오게 했죠. 우린 그걸 가지고 북한한테 자세 변화를 촉구하고 그랬습니다. 여론을 조성해서 미국에 우리의 입지를 설명하는 동력으로 삼거나, 또는 북한을 설득하고 북한의 변화를 요구하는 동력으로 삼거나 했다 이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걸 안 해요. 그러다 보면 어떻게 되느냐? 결국 미국은 지고지선하게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북한이 비협조적이라서 안 풀린다는 식으로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건 문제라고 생각해요.
북한도 기왕에 신고까지 했으면 검증과 관련해서 화끈하게 해버리면 남쪽 정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해지겠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불능화도 덜 끝났고, 일본은 납치문제를 걸어서 일체 기여를 안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런가 하면, 이제 10월이 되면 부시 정부가 테러지원국 해결을 과감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사실상 떨어지게 됩니다. 힘이 없어지죠. 그렇게 되기 전에, 그러니까 9월중에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비전을 안 주면 북한으로선 검증과 관련해서 좀 더 전향적으로 나갈 수 없게 돼요. 지금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이 안 움직이고 있어요. 성김 특사만 왔다 갔다 하는데 협상대표의 급이 낮아지면 저 사람들은 안 움직여요. 상대 측의 성의가 없다고 보는 거죠.
그러니 북한으로선 '검증 문제에 대해 우리가 움직일 수 있도록 미국이 구체적으로 행동을 보여줘라, 테러지원국 풀어라, 검증은 새로 추가된 조건이다, 중유 지원 빨리 해라, 일방적으로 검증에 협조하란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속으로는 아마 부시 정부에서는 안 되니까 차라리 차기 정부(맥케인 정부가 될지라도)와 새판을 짜겠다는 생각을 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렇게 이런 어려운 상황이 있으면 있는 대로 퍼블릭 디플로머시 차원이건, 투명성 차원이건 핵 문제에 대해 국민들한테 설명을 하라 이겁니다. 물론 협상전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래야 국민들도 이해를 하고 '어려운 조건에서 우리 정부가 애를 쓰는구나' 생각하죠. 누가 나쁘다는 걸 가려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도 사정이 있고, 미국도 사정이 있고, 일본도 그런 상황에서, 정부를 이해하고 지지하거나 할 텐데 그걸 안 하니까...이렇게 그대로 놔두면 반북정서만 커질 수 있습니다.
핵 문제와 관련해서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모든 상황 악화의 책임을 북한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그러면 내년에 미국 신정부의 대북정책에 맞게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를 조정하려고 할 때 정부가 진짜로 어려워 져요. 정부가 나중에 새로운 정책이랄까, 전향적 조치를 취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국민적 이해를 끌어내는 게 어려워 진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수시로 설명을 해야 돼요. 평소에 예습복습을 해야 성적이 우수해 지잖아요. 놀다가 막판에 당일치기 하면 안 되지.
정부는, 9월~10월 상황을 봐가면서, 미국 대선 끝나고 내년 상반기까지는 북핵 상황이 지지부진해 질 수도 있다는 설명을 익명으로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건 국민에 대한 도리입니다. 서비스가 아녜요.
추측컨대, 북한은 검증을 하려면 경수로 제공을 약속해 달라고 하고 있을 겁니다. 신고까지 끝났으니 검증으로 넘어가려면 9.19공동성명에서 약속한 경수로 얘길 해야 한다는 게 북한 생각일 거고, 미국은 검증이 끝나고 폐기로 넘어갈 때에야 비로소 경수로 문제를 얘기할 수 있다는 입장일 겁니다. 그런 내막을 일일이 얘기할 수 없지만, 정부가 나서서 대체적인 흐름은 얘기하면서 일이 잘못됐을 경우에 국민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해주고, 또 그렇게 해 놔야 미국의 신정부와 보조를 맞춰 대북정책을 추진할 때 우리 정부가 쉽게 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정부가 다 잘 알아서 하고 있으니 안심해라. 나중에 결과 나오면 그 때 가서 설명할 테니까 기다려 보라'는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우리 국민 수준이 얼마나 높아졌습니까? 우리 국민들이 핵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이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굉장히 높잖아요. 또 그게 해결 안 되면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도록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걸 위해서라도 국민들한테 성실하게 얘기를 해 줘야 합니다.
- 이명박 정부도 일본이나 미국처럼 국내 강경파의 눈치를 봅니다. 또 이념적으로도 북한에 대해 동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퍼블릭 디플로머시를 한다면 그 설명이 오히려 더 반북여론을 강화하지 않을까요? 과연 진실을 설명할까요? 예컨대, 미국이 더 문제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글쎄, 그럴 가능성도 있죠.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당장 눈앞의 이득이랄까 하는 것을 챙기고 이명박 정부의 지지층에 대해 서비스하는 결과가 될지 모르지만, 길게 볼 때 그 효과는 오래 못갑니다. 내년에 미국 정부가 새로 들어서면, 특히 오바마가 되면 바이든이 부통령이니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북미관계가 좋아질 텐데, 이명박 정부가 그 때 가서 말을 바꿔야 합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청와대가 정신 차려야 돼요. 나중에 가령 유명환 장관한테 책임을 넘기고 지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청와대 참모들이 4년 반 동안 극진히 모셔야 할 이명박 대통령한테 누가 될 수 있는 일이라는 차원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될 필요가 있어요.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부터 변비가 심해져서 고생을 하게 되요.
- 남북 현안 얘기를 해 보자면...세계식량계획(WFP)이 한국 정부에 자기들의 대북 식량 지원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식량 지원 문제가 참 옹색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북이 요청하면 주겠다고 했는데 요청 안 하겠다고 했지, 나중엔 옥수수 5만 톤을 줄 수도 있다고 접촉하자니까 전통문 자체를 안 받으려고 그랬죠, 아마? 그리고 나서 WFP가 요청하면 검토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WFP가 요청하니까, 통일부에서는 북한의 식량이 급박하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또 했단 말예요.
그게 아주 무슨 고단수의 포석인지 그건 모르겠어요. 이해를 못 하겠어요. 고단수의 포석 인 것 같기도 하고...아니면 '그렇게는 못 주겠다. 어차피 생색도 안 나는데 안 주겠다'는 얘긴지는 모르겠는데...
김영삼 정부 시절인 95년에 쌀 15만 톤을 주고 나서 국민 여론이 나빠졌습니다. 인공기 게양 강요 사건 때문에 '퍼주고 뺨맞기'라는 제목의 사설이 나오면서...그 때부터 퍼주기라는 말이 나왔죠. 그리고 며칠 있다가 청진항 사진 촬영 사건까지 생기니까 결국 더 이상의 쌀 지원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남북관계가 더 경색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96년부터 WFP가 요청하는 대북 식량 지원에 우리가 조용히 동참했습니다. 김영삼 정부 끝날 때까지 계속했어요. 또 WHO(세계보건기구)에서 요구하는 방역사업에도 경비를 줘요. 그런 선례가 있어요. 94년 7월 김일성 조문 파동 이후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북쪽의 인신공격의 정도는 시간이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을 줬고, WFP가 움직이는데 우리가 그대로 있을 수 없다고 해서, 옥수수 10만 톤 상당의 돈을 남북협력기금에서 매년 WFP에 보냈었습니다.
이번에 WFP가 지원했으면 하는 액수가 6000만 불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옥수수 값이 올라서 15만 톤 정도 살 돈 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김영삼 정부 시절에 했던 것하고 비슷한 양을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어쩔 수 없어서 WFP로 했지, 기회만 있으면 직접 지원 방식으로 하는 게 좋다는 여론이 있었어요. 왜냐면, WFP를 통해서 보내면 행정비로 15% 내지 20%가 없어져요. 6000만 불을 보내면 실제로 물건은 한 5000만 불 어치 정도밖에 안 간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직접 지원을 하면 행정비를 안 떼거든. WFP라는 조직을 움직이는 행정비로 떨어져 나가는 경비가 만만치 않다 이겁니다.
WFP가 지원하면 투명성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투명성을 구실로 여기 보자 저기 보자 하지만 솔직히 보여주는 거 큰 의미 없습니다. 나눠주는 장면 보여주고, 그 뒤에 별도로 얼마든지 조치를 할 수 있는 데가 북한 사회예요.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있어요. 소위 투명성은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는 건데, 그 투명성 때문에 WFP로 보낸다는 건 설득력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조건 직접 주겠다는 얘기를 다시 한 번 해야 한다는 얘기예요. 지난 번에 5만 톤을 거절당한 것은, 북쪽이 조금도 고맙게 생각 안 할 수 있는 것이, 그건 작년 말에 노무현 정부에서 수해 지원 물자 몫으로 주기로 했던 것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인수위에서부터 제동을 걸어서 못 준 거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새 제안인 것처럼 얘기하니까 북쪽에서는 기분 나빴을 거예요.
그러니까 차라리 15만 톤 정도를 우리가 직접 지원할 테니 적십자 회담을 하자고 하든지 해서 우리 포대에 담아서 주라 이겁니다. WFP로 가면 행정비로 떨어지는 돈도 손해고, 남쪽에서 줬다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생색을 내자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런 어려운 시기에도 남쪽에서 쌀이 오는구나 하는 메시지를 북한 사람들한테 보내는 것이 앞으로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을 풀어나가는데 도움이 되면 됐지 절대 나쁜 영향을 안 준다는 겁니다. 노무현 정부 때 주기로 한 걸 새로 주는 것인 양 할 때는 거절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새로 나오는 순수한 지원을 제안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WFP로 주면 수송 시간도 많이 걸려요. 또, 우리가 직접 우리 배로 실어다 주면 수송료가 국내로 환류가 되요. 우리 선박 회사들이 다 하니까. 또 기술을 부리자면 이런 것도 있어요. 통일부에서 차관 형식으로 쌀을 줄 때 톤 당 가격을 태국산 가격으로 계산했어요. 근데 실제로 보내는 국내산 쌀값이 태국산보다 비싸니까 농림부에서 양특 회계로 보전해주는 식으로 했어요. 협력기금에서는 태국산 쌀값만큼만 나가고. 그게 농림부로서도 싫을 게 없는 게, 그렇게 우리 쌀을 사서 보내주면 농림부가 가진 쌀을 격리(시장 밖으로 없애버림)시킬 수 있어서 추곡수매가 면에서 농민들이 득을 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할 수 있어요. 방아 찧는 것도 대 주면 시골 도정공장도 돈을 벌고, 하여튼 농촌 경제가 돌아가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WFP는 생색도 안 나고, 돈은 돈대로 나가고, 북쪽에서는 고맙다는 생각도 안 하고,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데 있어서도 도움도 안 되고...WFP에는 말대답 차원에서 몇 톤 정도만 하고, 가령 지난번 주려고 했던 5만 톤을 거기로 주라 이럽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직접 주는 걸 생각하는 게 어떤가 싶습니다.
이건 지금 당장 문제를 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미국의 신정부가 들어서면 북핵 문제도 다시 탄력을 받을 거예요. 남북관계도 거기에 따라가려면 정서적인 인프라를 깔아 놔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가 그 때가서 허겁지겁 뒤 따라 가느니, 내년 남북관계 농사를 지을 밑거름을 줘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現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경남대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 화요일마다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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