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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으로 가는 길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5> 천왕봉~정령치(5.20~22)

산행 둘째 날

산은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잠들어 있는 듯 했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능선 위로 별들이 총총하였다. 별들을 바라보았다. 첫새벽의 별자리가 아름다웠다. 별자리를 눈으로 따라갔다.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정도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전갈자리, 사자자리 등

기억나는 이름들이 있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린 유년시절부터 밤하늘을 바라보았지만 별자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모르고 살아도 되는 것일까.
▲ 노고단ⓒ이호상

제 생각 제 일에만 빠져 이렇게 무심하게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세석고원(細石高原)을 타고 넘어 온 서늘한 바람은 지난 밤 더위에 들뜬 몸을 식혀주었고 신 새벽의 차디 찬 공기는 밤 내내 남아 있던 땀을 닦아주었다.

헤드라이트를 모자에 부착하고 샘으로 향했다. 헤드라이트를 켜니 환해졌다. 길이 보였다. 동그란 모양의 불빛이 닿는 곳까지만 보였다. 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원래 그런 법이다. 어둠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불을 켜면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불빛이 닿는 곳까지만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밤길을 갈 때면 늘 손전등을 들고 다녔다.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 같다. 보는 것이 더 무서웠던 모양이다.

강아지 한 마리가 샘까지 따라왔다. 정겨운 마음에 손짓을 하였지만 더 이상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다. 샘에는 강아지와 나뿐이었다. 새벽 시간의 여유를 충분히 즐기고 누릴 수 있었다. 느긋하게 양치질을 하고 세면을 하였다. 강아지는 돌아가는 길 내내 따라왔다. 대피소에 도착할 즈음 능선 너머로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 ⓒ이호상

누룽지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다. 산행을 시작했다. 환자가 있었는지 헬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내려앉는 헬기를 뒤로 하고 노고단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 6시였다. 도상거리 20.4km를 가야 하는 긴 하루였다.

싱그러운 아침 숲을 느낄 사이도 없이 20분 만에 낙남정맥(洛南正脈)이 시작되는 해발1,691.9m의 영신봉(靈神峰)에 도착하였다.

"이 영신봉은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낙남정맥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이 바로 삼파수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물길이 세 갈래로 나뉘지요. 낙동강, 섬진강, 금강으로 나뉘어 흘러듭니다."

"그러니까 이곳이 꼭지점인 셈이네요."

"그렇지요.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삼파수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백두대간 전체가 모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백두대간의 산줄기와 마루금은 모든 강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빗물이 떨어져 나뉘는 첫 지점이 바로 마루금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 마루금으로 떨어진 빗방울들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드느냐에 따라 하나 되어 흐를 물줄기가 결정된다.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긴 강인 513.5km의 낙동강(洛東江)으로 흘러들 수도 있고, 오래 전 왜적이 침입하였을 때 두꺼비가 울었다는 225km의 섬진강(蟾津江)으로 흘러 들 수도 있고, 낙동강의 제 1지류이기도 한 189km의 남강(南江)으로 흘러들 수도 있는 것이다.

칠선봉(七仙峰)을 향했다. 높이 1,576m의 높은 산이다. 날은 그지없이 맑았다. 숲은 싱그러웠고 아침 햇살은 부드러웠다. 따스한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침의 눈부신 햇살과 조화를 이룬 숲은 눈부셨다. 아름다웠다. 따스한 햇살 비췬 곳에 어린 참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신갈나무였다. 큰 소나무 아래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제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나무는 소나무 다음으로 숲의 주인이 되는 나무이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 선구목이라고 부르는 소나무가 가장 먼저 숲을 이루지만 그 다음의 숲을 지배하는 것은 참나무이다. 어린 신갈나무는 그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큰 소나무 아래 느긋하게 자리 잡아 천 년의 긴 세월을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숲의 천이(遷移)다. 소나무가 참나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참나무가 서어나무 등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숲은 살아 있다. 숲은 늘 변화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숲에서 죽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숲에서는 죽음이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주검조차도 이미 주검이 아니다. 살아 있음이다. 왜냐하면 숲에서는 죽는 그 순간 다른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동시에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들처럼 말이다. 벌레들처럼 말이다. 육신을 지니고 있는 생명들은 모두 이 자연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도 그러하다. 지금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요소들은 아마도 이삼십 년 후에는 어느 나무속으로 들어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지금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요소들이 오십여 년 전에는 어느 나무의 몸 속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 흙으로 돌아가다ⓒ이호상

칠선봉을 지나 덕평봉(德坪峰)에 오르니 바른재가 눈앞이었다. 벽소령(壁宵嶺)에 이르러 지친 다리를 잠시 쉰 후 내쳐 지리산 자락 남쪽의 최고봉인 1,115m의 형제봉에 올랐다.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형제의 우애를 시기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형제봉의 철쭉이 더욱 붉어 보였다. 정상에 앉으니 말라 죽은 고사목이 보였다. 눈앞에 있는 것은 고사목인데 고사목은 보이지 않고 지나온 길만 눈에 어른거렸다. 참으로 힘든 길이었다. 노고단까지는 아직도 12.6km나 남아 있었다. 내 몸은 이미 지쳐가고 있었다. 물도 보충하고 식사를 하며 쉴 수 있는 연하천대피소까지도 한 시간은 더 가야 했다.

삼각고지를 지나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걷기 힘들 정도였다. 백두대간 종주를 위해 나름대로 체력 훈련을 하였지만 처음으로 하는 긴 산행을 몸은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밤 잠을 자지 못한 것도 치명적이었다. 일행들이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거들지 못했다. 내 몸을 가누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식사와 휴식 덕분에 몸이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갔다. 명선봉(明善峰)을 지나 토끼봉으로 가는 길에 나란히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를 만났다.

"김남균 대장님, 저 소나무들을 보세요. 두 그루 소나무가 서로를 향해서는 가지를 뻗지 않았지요? 가지를 바깥쪽으로만 뻗었지요?"

"그러네요. 왜 저런 것이에요?"

"가지를 뻗기에는 공간이 좁아서 그렇지요. 가지를 뻗으면 상대방이 다치니까 가지를 뻗지 않는 거예요. 상대가 가지를 뻗으면 자신도 다치지요. 서로 가지를 뻗으면 결국은 둘 다 죽게 되지요. 너 죽고 나 죽는 것이지요. 그러니 서로를 향해서는 가지를 뻗지 않는 것입니다. 나무들이 참 지혜롭지요?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가지를 뻗을 작은 공간도 아쉬운 법인데 나무들은 저 공간을 비워두고 있는 거예요. 비어 있는 저 공간이 나무들의 생명의 공간인 셈이지요."

"정말 그러네요."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지요. 저 나무들처럼 서로를 살리는 관계가 올바로 이루어지려면 빈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지요. 제 생각만하고 욕심으로 채우기 일쑤지요. 다른 사람이 다치거나 심한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생명의 공간을 우리들은 지니고 있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아요. 사람들은 나무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워야 해요."

우리는 한 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김 대장은 앞서 나눈 소나무 이야기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 같았고 나는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말을 아끼고 있었다. 다리는 점점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 정겨웠던 산죽길ⓒ이호상

멀리 보기에도 단아하고 아름다운 길이 보였다. 화개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들어갈수록 길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곳곳에 자리한 거대한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과 바위틈에 자리 잡은 소나무들이 우아했고 듬성듬성 자리 잡은 키 작은 관목들도 아름다웠다. 조릿대 늘어선 길도 편안함을 주었다. 걸을 때 마다 얼굴과 몸에 부딪히는 조릿대 잎의 촉감이 살가웠다. 그리움을 전하는 듯 했고 사랑을 나누는 듯 했다.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 길의 끝에 화개장터로 유명한 화개재가 있었다. 완만한 능선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작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화개재가 보였다. 화개재에 들어서자 잘 가꾸어진 탓인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안온한 느낌이 되었다. 새로운 기운이 온 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우리는 화개재에 오래 머물며 휴식을 느긋하게 즐겼다. 산행 중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그저 편안히 쉬었다. 이 휴식 덕분에 나는 삼도봉 가는 길에 있었던 594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물론 심장이 터져나가는 듯 힘들었지만 말이다. 밭은 숨을 뱉으며 겨우 겨우 삼도봉을 지나 노루목에 도착했을 때 전영갑 감독과 우주환 대장을 만났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웃으며 반갑게 맞았다.

그들 뒤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뉘엿뉘엿 해 저무는 저녁 하늘의 붉은 노을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몸은 열에 들뜨고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데도 가슴이 시려왔다.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붉은 노을이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생명들의 죽음을 지켜 본 붉은 철쭉 보다 더 붉어 보였다. 수많은 주검 위에 핀 붉디붉은 철쭉꽃 보다 더욱 붉고 붉어 보였다. 눈물이 났다.

"너무나 아름답지요?"

우리는 모두 한동안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그렇게 앉아 있었다.
▲ 노을이 지다ⓒ이호상

"자 너무 늦어지기 전에 준비합시다."

노고단으로 나아갔다. 헤드라이트를 머리에 착용했다. 산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 임걸령을 지나 돼지령에 이르렀을 때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앞서 간 일행들은 이미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이미 걷지 못했다. 그저 다리를 들어 한 발자국씩 옮겨 놓을 수 있을 뿐이었다. 숲은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겼고 달빛 괴괴한 밤이었다. 김 대장의 무전기에서는 한 대장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김 대장! 오고 있지? 바로 따라 붙었지?'

무전기 소리가 강 건너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처럼 아스라했다. 김 대장은 힘겹게 발걸음을 떼고 있는 나와 함께 걸었다. 내가 한 걸음 나가면 그도 한 걸음 나갔다. 내가 멈추면 그도 멈추었다.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더욱 깊어진 어둠 속으로 한참이나 들어갔을 때 한 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노고단(老姑壇)이었다. 천신의 딸인 산신 선도성모의 이야기가 옛날 신라시대 때부터 천해 내려오고 있다는 노고단이었다.
"다 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요? 정말 다 왔어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행여 눈물이 나올까 저어하여 하늘을 보니 괴괴하던 달빛이 구름 속에 가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돌탑이 희미하게 보였다. 대피소로 내려갔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들이 깔려 있었다. 그 길을 내려가는 것이 산 하나를 넘는 것 보다 힘들었다. 고통스러웠다. 한 걸음 떼고 쉬고 한 걸음 떼고 쉬며 내려가다 보니 불빛이 보였다. 노고단 대피소의 불빛이었다. 정말 도착한 것이다.

모두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황서식 감독이 앞서 나오며 나를 받아 안았다. 황감독의 눈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형님, 다 왔어요. 정말 다 왔어요. 잘 했어요. 나는 형님이 해낼 줄 알았어요."

나는 배낭을 넘겨주며 고맙다고 말했던 것 같다.

소주 맛이 너무 맛나고 모든 것이 너무 그리웠던 밤이었다.

나도 지난 밤 만난 다른 산꾼들처럼 코를 골며 정신 없이 잠에 빠져든 밤이었다.

필자 이메일 : from-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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