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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의 핵, 분리 통치(Divide &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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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의 핵, 분리 통치(Divide & Rule)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22>

1901년 국세조사(Census)에 의하면 인도아대륙의 인구는 2억9400만이었고 그 가운데 약 70%인 2억700만이 힌두, 21%인 6200만이 무슬림이었다. 이는 단순히 특정 종교를 갖는 사람의 수를 표현한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사적으로 해석해 보면,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무슬림은 자신들이 영국인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다는 사실보다 영국에 의해 유럽식의 대의제가 도입되면 다수인 힌두에 의해 또 하나의 지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둘 수 있다.

이는 1857년 봉기 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민족으로 반영 투쟁을 같이 해 나왔고, 더불어 각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짧은 기간에 만들어진 놀랄 만한 변화였다. 물론 그러한 짧은 변화가 오게 되기에는 물론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고대는 힌두 문명으로 이상향이고, 중세는 이슬람 문명으로 이상향의 파괴라고 하는 식의 역사 해석을 한 것에 원인을 둘 수 있다. 여기에 당시 인도의 무슬림들이 독립된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공동체 인식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이 상대적으로 힌두에 비해 사회적·경제적으로 낙후되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영국이 가져온 근대화에 대해 그들이 힌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힌두는 사회 개혁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고 특히 서구 교육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영국이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으로 많이 활용되었으나 무슬림은 서아시아에서부터 형성된 기독교 공동체와의 적대적 관계로 인해 서구의 근대화를 거부하고 전통을 고수하며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움직임이 훨씬 강하였다. 그리고 무갈 제국의 주인이었다는 자부심이 영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영어를 배우고 서구 교육을 받은 힌두 중간 계층은 1870년대부터 시행된 지방자치제를 활용하여 지방 행정의 말단을 장악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은 무슬림들을 자신들이 소수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또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면서 무슬림도 힌두와 같이 서구 교육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영국이 가지고 온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나아가 이익 집단으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알리가르 대학을 창립한 대표적인 무슬림 지도자인 사이드 아흐메드 칸(Syed Ahmed Khan)은 영국식 선거 제도가 도입되면서 힌두가 무슬림의 이익을 짓밟을 것이니 근대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무슬림의 이익 증대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도의 무슬림은 계급, 인종, 언어의 차이를 넘어 모두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되었다. 이는 일부 민족 지도자들이 과도하게 힌두교 중심으로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써 일어난 현상이기도 했다. 그것은 무슬림의 결속이 힌두 민족 지도자들이 암소 보호 운동을 과도하게 전개하면서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리야 사마즈를 창립한 힌두 민족주의 운동가 다야난다 사라스와띠는 1882년 암소보호협회를 만들어 암소 보호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고, 그로 인해 힌두는 암소라는 상징 안에서 결속력이 강화되고 또한 범주가 넓어졌다. 그런데 이는 자연스럽게 무슬림의 암소 도살 관습에 대한 반발로 연계되었고 그로 인해 감정이 상승하여 이후 1890년대까지 두 종교 공동체간에 심각한 소요 사태가 자주 터졌다. 1893년 아장가르(Azamgarh) 군에서 발생한 암소 보호 때문에 터진 소요 사태로 인해 100명이 넘는 수가 목숨을 잃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힌두라는 공동체가 실체 없는 상상의 공동체로 만들어졌듯 무슬림이라는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만들어졌고, 힌두 공동체가 무슬림을 적대시하면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듯 무슬림 공동체도 힌두를 적대시 하면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결국 인도에는 힌두와 무슬림이라는 이분법이 전가의 보도처럼 매사에 적용되었다.

이렇게 되는 상황을 가장 반긴 쪽은 영국 식민 지배자들이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소수이지만 인도 민족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좋은 방편이라고 믿어 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국내 정치에 활용했다. 1888년에 서북부주(州)고등법원은 암소는 성물(聖物)이 아니라는 판결을 통해 무슬림의 의견을 지지한 것이 이러한 태도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것이다. 결국 이는 힌두의 집단 감정 폭발로 이어졌으니 이 판결 이후 암소는 정치의 주요 대상이 되었고 힌두와 무슬림의 공동체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1900에는 북부의 연합주 주정부가 힌두와 무슬림 양측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논리 속에 다수의 언어인 힌디어와 함께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소수 언어인 우르두를 하급 법원의 행정 언어로 채택하였다. 그러면서 양자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 민족 운동의 폭발을 염려해 영국이 1885년에 만들어 준 인도국민회의 초창기만 해도 무슬림 지도자는 대거 여기에 참가하였다. 그 후 식민 정부의 본격적인 분리 통치 정책이 시작되면서 그들은 이곳을 떠나고 새로운 정당을 만든다.

영국의 분리 통치 정책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1905년 벵갈 분할 정책이다. 당시 벵갈은 민족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곳이었으니, 그만큼 총독에게는 골치 아픈 대상이었다. 그래서 착안해 낸 것이 벵갈 주의 분할이었다. 총독 커즌은 벵갈 주에서 무슬림이 다수인 동부와 힌두가 다수인 서부를 분할하여 각각 독립된 주로 개편하여 힌두에 비해 낙후한 무슬림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배려했다.

이에 힌두는 민족주의를 분쇄하려는 의도라면서 거세게 반발하여 영국 상품 불매 운동과 같은 이전의 방식보다 훨씬 급진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무슬림은 벵갈 분할을 찬성하고 나섰다. 2년 후 적당하게 목적 달성을 이룬 총독은 벵갈 분할령을 철회하지만, 이 사건 이후 양 공동체 사이의 간격은 좀체 매워지지 않았다.

벵갈 분할을 통해 분리 통치의 효과에 확신을 가진 영국 식민 정부는 곧 이어 무슬림들만 따로 독립된 선거구를 두는 무슬림 분리 선거구제를 도입했다. 형식적으로는 무슬림 대표들이 총독에게 제안을 했고 그것을 정부가 인정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슬림을 힌두로부터 분리시켜 효율적인 통치를 하고자 하는 식민 정부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1906년 무슬림만의 정당인 무슬림연맹(Muslim League)이 창립된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무슬림이 본격적으로 정치 운동에 돌입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가 반영 동맹에 참전하면서 인도에서 무슬림의 입장은 확고한 반영의 위치에 서게 되었고 힌두는 보다 적극적인 민족 운동에 매진할 필요가 있어 무슬림의 협조가 절실하였다.

터키는 이슬람의 교황인 칼리프가 자리 잡고 있는 나라인데, 당시 오스만 투르크가 반영 동맹국에 참여하며 전쟁에 나서자 인도 내에 있던 무슬림들이 그 동안 힌두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 운동 진영에 참여하는 것에 미온적 태도를 벌이다가 비로소 그들과 손잡고 반영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킬라파트 운동을 주도하는 무슬림 지도자들과 간디를 위시로 한 인도국민회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연합군이 투르크 제국을 점령하고 분할 통치하는 것에 반대하고 터키의 칼리프를 보호하고, 나아가 인도의 스와라즈를 위해 함께 힘을 합치기로 했다.

그러면서 갈등의 씨앗의 되고 있던 무슬림의 분리 선거구를 인도국민회의가 인정하였고 이에 양 쪽은 하나로 힘을 합하여 반영 전선에 나서게 된다. 1919년 킬라파트 운동에 참여한 무슬림과 인도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힌두들은 실로 오랜 만에 하르딸(파업)에 참여하면서 반영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영국군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였고 특히 그 가운데 아므리뜨사르 대학살은 충격을 주었다. 자연히 분노한 인도 대중의 반발은 곳곳에서 폭력 투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킬라파트 운동과 간디의 비협조 운동 연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킬라파트 운동은 인도 근대사 특히 인도아대륙 분단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인도의 모든 구성원들이 민족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지만, 종교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이후로 도시를 중심으로 한 무슬림들의 정치 세력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후로 종교공동체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킬라파트-비협조 운동 연합 투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두 측은 다시 갈라서게 되는데 그 적극적인 계기는 1919년 영국 정부가 일부 각료직을 인도인에게 이양하고 입법 의회에 인도인의 참여를 늘리는 데서부터였다. 무슬림들은 의회 민주제 아래에서는 결국 자신들이 수적으로 열세이므로 영원한 소수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위기감을 갖게 된 사실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후 마하뜨마 간디가 주도하는 거국적 민족 운동에도 무슬림들은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간디는 양 쪽의 화해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나 무슬림의 소수자 의식과 소외감은 갈수록 깊어졌다. 여기에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간에 간디의 행동 또한 큰 영향을 끼쳤다. 간디의 사띠야그라하(satyagraha, 문자대로의 의미는 '진리를 손으로 쥐다') 운동은 본질적으로 힌두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비폭력도 그렇고 단식도 그러하며 파업인 하르딸 또한 마찬가지다. 간디가 무슬림을 포용하겠다고 나서면 나서고 민족의 단합을 외치면 외칠수록, 무슬림의 독자적 공동체 의식이 커졌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 1930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소금행진은 인도 민족 운동이 다시 활발하게 된 게기가 되었다. 그러나 무슬림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미 식민 정부가 만든 분리 통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 12월 29일 전인도 무슬림연맹 대회 회장 연설을 통해 시인이자 철학자인 이크발(Muhammad Iqbal)은 무슬림이 많은 아대륙 서북부에 무슬림들만이 사는 독립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토해냈다. 그 후 1934년 영국에서 라흐마뜨 알리(Rahmat Ali)라는 학자가 "지금 할 것이냐 영원히 못할 것이냐: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가?" ("Now or Never: Are We to Live or Perish for Ever?")라는 글을 통해 '파키스탄' (당시에는 '파크스탄'이었다)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들어냈다.

PAKSTAN. 무슬림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서북부 지역 다섯 주의 이름의 머리 철자를 따 만들어낸 이름. P는 뻔잡(Punjab), A는 아프간(Afghania, '서북변경주'로도 알려진 곳), K는 카시미르(Kashmir), S는 신드(Sindh) 그리고 발루치스탄(Baluchistan)에서 따온 '스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뜻은 우르두어와 페르시아어로 '청정한 땅'이다.

1935년 인도 통치법에 의거하여 1937년 실시된 지방 선거는 인도아대륙 분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무슬림연맹을 이끌어 온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는 네루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에 크게 패했다. 이후로 진나는 '두 민족론'(two-nation theory)을 설파하고 다녔다.

진나는 1940년 3월의 무슬림 연맹 라호르대회에서 이 이론을 구체화시켰는데, 그는 인도아대륙 안에 있는 힌두와 무슬림은 별개의 민족이고,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의회제의 도입은 다수 민족인 힌두가 소수 민족인 무슬림을 지배하는 결과만 나을 뿐이니, 두 개의 서로 다른 민족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도아대륙에서 무슬림 다수 지역인 서북 지역의 뻔잡, 서북변경주, 신드, 발루치스탄, 동쪽의 앗삼, 벵갈의 여섯 개 주에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을 건국해야 한다고 제국 정부에 요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버마를 점령하자 영국 수상 처칠은 참전에 대한 인도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내각 각료였던 스타포드 크립스(Stafford Cripps)를 단장으로 하는 크립스 사절단을 1942년에 인도에 파견하였다. 크립스 사절단은 전쟁이 끝난 후 인도 연방에 완전 자치권을 부여하고, 그 연방에 속할지 여부에 대한 선택권은 주(州)나 토후국에게 주겠노라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간디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국민회의 지도자들은 이 사절단을 거부하면서 1942년 '인도 철수'(Quit India) 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이 운동은 무슬림 등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한계에 봉착하고 결국 간디를 비롯한 운동 참여자 6만여 명이 투옥되는 결과만 낳는다. 그 후 영국 제국 정부는 노골적으로 무슬림연맹을 지원하였고 그로 인해 무슬림연맹의 정치적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더니 이제는 인도국민회의와 대등한 정치적 파트너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파키스탄 건국 운동이 점차 드세게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에 영국은 인도아대륙의 분리 독립의 절차와 국가 건설에 관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구성된 각료사절단을 파견하여 연방제를 기본 골자로 한 인도의 독립과 권력 이양을 약속하였다. 영국의 각료사절단의 제안에 대해 인도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 양측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회담은 결렬되고 이어 꼴까따를 중심으로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대규모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사흘 동안에 6000명이 살육되었고 부상자 수도 1만 명을 넘었다.

소요는 벵갈, 비하르, 웃따르 쁘라데시로 번지더니 마침내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서북 지역으로도 삽시간에 번졌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소수인 힌두가 다수인 무슬림에 의해 학살당하는 폭력이 날마다 일어났다. 상호 살육은 몇 개월 동안 계속 되면서 아비규환으로 변하였다.

1947년 초 위기 상황을 깨달은 영국은 인도 철수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무슬림연맹과 인도국민회의의 중재를 맡은 신임 마운트밧튼(Mountbatten) 총독은 1947년 6월 3일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리해서 독립시킨다는 재정을 발표했고, 이 재정 안에 따라 1947년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을 하면서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분단은 비극의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분단이라는 비극의 발단은 역사 해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 시리즈의 세 번째와 스무 번째 글을 참조하시오). 그렇지만 그 의도적인 역사 해석이 구체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은 그것을 현실 지배의 힘을 갖춘 이데올로기로 만든 국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 민족을 둘로 나누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그 이데올로기에 모든 힌두와 무슬림은 적극적으로 응하였고 결국 그러다 보니 식민주의 제국의 지배 장치 안에 포섭되고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20세기 근대 국가가 가지고 온 보통 선거 체제는 개인 1인의 목소리를 극대화시키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고 그 막강한 개인들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참여가 결국 인도아대륙의 분단과 살육을 가져 온 것이다.

정당하지 못한 국가일수록 효율적인 통치를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그 목표를 위해 각 집단 사이에 갈등을 부추기고 분리시켜 힘을 약화시키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러면 대개의 경우 대중은 자발적으로 그 국가의 요청에 반응한다. 근대 인도의 식민 공간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라 하는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다.
▲ 한 쪽의 대규모 군중 집회는 다른 쪽으로 하여금 위기 의식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 틈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권력의 속성이다. 1987년 13대 한국 대통령 선거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지금은 많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세련되게 잠복되어 있을 뿐, 한국 사회에서 지역주의가 정치의 헤게모니의 역할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지역주의가 대중에게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는지에 대해선 이 자리에서 새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지역주의 앞에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정부의 그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독자적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좌파 인사들도 찌들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특히 다수를 차지하는 영남 출신 진보 인사들의 행태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노동 해방, 연방제 통일, 사회주의 국가 수립 등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구호를 주창하고 또 그것들을 실현시키고자 열심인 사람들이 보다 시급하고 현실적인 다수의 패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주의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그들이 주창하는 진보적 의제나 담론에서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독재 정권에서 만들어 놓은 국가주의 담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가 사회 변혁을 이룰 수는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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