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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가 인정한 토론 수업, '하크니스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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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가 인정한 토론 수업, '하크니스 테이블'

[협동이 공부다 ①]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공부'에 대한 관심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라가 한국이다. 하지만 공부의 의미와 범주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한국인의 '성적'은 천차만별이다. 인류문명 속에서 공부는 어떤 의미를 지니며, 각 문화권이 갖는 최고의 공부는 어떤 형태인가를 다루는 다큐멘타리 <공부하는 인간-호모 아카데미쿠스(가제)>이 오는 3월께 방송될 예정이다. 무려 2년의 제작기간이 소요된 '대작'이다. 이 다큐멘타리는 비슷한 시기에 책으로도 출간될 예정이다. 저자인 정현모, 남진현 한국방송(KBS) 프로듀서, 출판사와 협의 하에 책 내용의 일부를 5회에 걸쳐 <프레시안>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자 주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의 토론 수업을 통해 본 최고의 공부란 무엇인가

▲ 하크니스테이블 ⓒ위즈덤하우스
동양의 '암기의 공부'와 서양의 '질문의 공부'는 각각 경쟁력과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게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제작진이 <호모아카데미쿠스(가제)> 제작을 위해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릴리, 스캇, 브라이언, 제니와 함께 세계 여러 국가를 누비며 깨달은 것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수의 학교들과 수많은 엘리트들이 '질문의 공부'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암기의 공부를 지향하는 동양사회까지도 질문을 통한 토론, 논쟁의 공부에 관심을 기울이는 추세였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공부법이 옳고 그르다고 단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왜 세계가 질문을 통한 토론, 논쟁의 공부에 주목하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Phillips Exeter Academy)'는 그 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방문한 학교였다.

미국 동부의 뉴헴프셔 주 엑시터 시에 위치한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1781년 존 필립스 박사 부부가 세운 사립 고등학교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숙사 학교 중 하나이면서 미국에서 유명한 기숙사 학교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명문학교다. 명문 사립학교의 랭킹 기준이 되는 SAT(미국의 대학입학 자격시험) 성적을 비롯해 좋은 학교를 평가하는 대부분의 기준에서 절대 상위를 차지한다. 세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교에서 최고의 기수사 학교로 뽑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여러 면에서 매우 인상적인 학교였는데, 일단 학교의 규모가 고등학교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방대하고 그 모습 또한 고풍스러운 대학 캠퍼스를 연상하게 했다. 교내 시설도 훌륭해서 최첨단 시스템의 도서관, 과학관, 극장, 미술관, 체육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1945년 졸업생들의 후원금으로 건립된 도서관은 이 학교를 대표하는 시설이라고 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도서관 내부의 디자인이 매우 독특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위한 개인용 좌석제를 시행했고, 무엇보다도 소장 도서가 무려 15만 권에 이르렀다.

이 학교의 교육 과정도 눈에 띄었는데, 9~12학년 과정과 함께 졸업 후 1년을 더 공부할 수 있는 'Post-Graduate'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학교 학생들은 80%가 기숙사 생활을 하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차로 3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집에서 통학을 했다. 또한 전교생 가운데 13%가 외국 국적의 유학생들이었는데, 이 중 절반이 한국 학생들이었다. 각 나라의 지원자 수 등에 따라 적합한 비율로 유학생을 선발하는데 한국인은 우수한 지원자가 상대적으로 많아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명문학교답게 수많은 인재들의 모교다. 대표적으로 세계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 웹상에서 이용자들이 인맥을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 웹사이트인 '페이스북(Facebook)'의 창립자이자 CEO인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가 이 학교 출신이다. 페이스북은 바로 이 학교의 출석부에서 비롯된 말이다. 또한 명문대 진학률도 높고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어 입학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지원자 10명 중 2, 3명이 겨우 합격할 정도다.

이 학교의 학생과 교사 비율은 '5:1'정도로, 전체 학생의 수는 1000여 명, 교사의 수는 200여 명이고 한 반에 학생 수가 12명을 넘지 않는다. 교사당 학생의 비율이 이처럼 적은 이유는 이 학교의 특별한 수업방식 때문이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에는 강의 중심의 수업이 없고 모든 수업이 토론식으로 이루어지고, 이 수업방식으로 인해 이 학교가 세계 최고의 명문학교로 자리매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의 특별한 공부비법, 하크니스 테이블(Harkness table)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의 토론식 수업은 일명 '하크니스 테이블((Harkness Table)'이라고 불리는 큰 원탁형 테이블에서 이루어진다. 하크니스 테이블은 미국의 석유재벌이자 자선사업가인 '에드워드 하크니스'의 이름을 딴 테이블로, 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원래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의 수업방식은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1931년 에드워드 하크니스가 이 학교에 찾아와 새로운 방식의 교육방법을 고안하면 거액을 기부하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학교 관계자들은 여러 아이디어를 냈고, 그 가운데 뽑힌 것이 큰 타원형의 탁자에서 교사와 12명의 학생들이 둘러앉아 수업을 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식이 채택된 이유는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이 상대의 얼굴을 보며 토론을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의 질문과 의견, 아이디어가 모두 동등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학교 측에서는 에드워드 하크니스가 만족할만한 수업방식을 제시했고, 그는 약속대로 거액의 돈을 기부했다. 그리고 이 수업방식을 고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의 이름을 따 '하크니스 테이블'이라 명명한 것이다.

드라마틱하게 수업방식을 바꾼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지금까지 이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덕분에 평범한 학교에 지나지 않았던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세계 최고의 명문학교가 되었다. 또한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 이 학교의 수업방식을 도입하면서 하크니스 테이블은 토론식 수업의 상징이자 대명사가 되었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수학, 음악처럼 토론식 수업과 무관해 보이는 과목까지 하크니스 테이블에서 수업을 한다. 그래서 자유롭게 자기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입학생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다음은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입학 담당자의 얘기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학교에서 학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고, 둘째는 배움에 대한 애정입니다. 우리 학교는 과제가 많기 때문에 학생들이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이 과제들을 해내기가 매우 힘들죠. 또한 우리는 기숙사 학교이기 때문에 학생이 집에서 떨어져서 지낼 수 있는 성숙함을 갖추었는지 고려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학교이기 때문에 열린 마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할 줄 아는 학생을 찾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연극, 스포츠 활동을 하는지를 살피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학생을 원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학교는 활발한 토론식 수업방식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수줍음을 타거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능숙하지 못한 학생은 우리의 수업방식을 불편하게 여기고 잘 따라가지 못합니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교사와 10여 명의 학생들이 하크니스 테이블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철저하게 '학생' 중심의 수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사는 수업 때 토론을 위한 보조자, 조언자 역할에 머무른다. 이 학교에서 종교와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제니 해밀턴 교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수업참여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인데, 제가 이런 식의 수업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아이들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끼리 서로를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로는 학생들을 이끌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참여자가 되기도 하죠. 또 때로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해요. 한마디로 저는 학생들의 대화와 토론을 더욱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 학교의 학생들은 원활한 수업을 위해 그날 배울 교과과정을 열심히 예습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하크니스 토론을 하려면 준비를 굉장히 많이 해야 해요. 준비를 하지 않으면 수업시간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나는 이 텍스트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의견을 내놓을 게 없다고 하면 클래스가 진전이 되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전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수업시간에 서로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면서 각자의 호기심을 풀고 만족감을 느끼죠."

숙제검사를 하지도 않고 토론만 하면 되는 이 학교 학생들이 그 누구보다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높은 학업성취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공부는 '지식을 나누는 것'이다

지난 80여 년 동안 하크니스 테이블을 중심으로 토론식 수업을 진행한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공부에 대한 남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학교는 공부를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지식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다. 즉, '교류와 협력'의 공부를 지향하였으며, 그래서 질문을 매우 중시했다. 학교 슬로건만 봐도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가 질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사고하라! 토론하라! 그리고 질문하고 분석하라!'

교사들과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질문을 통해서만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질문의 공부에 익숙하지 않은 동양 문화권 유학생들은 학교에 입학한 후 이 점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면 경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가 있거든요.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한국에서는 학교나 학원에서 수업시간에 뭘 물어보면 질문을 해줘서 고마워, 이런 경우가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질문이 전체 학생들에게 유익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질문을 하면 굉장히 고마워해요."

동양의 암기의 공부와 서양의 질문의 공부를 모두 경험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암기의 공부가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질문의 공부가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식 교육이 확실히 효율적이긴 해요. 선생님이 앞에서 무조건 설명을 해주시니까 훨씬 더 습득도 빠르고 노트에 받아 적기만 하면 나중에 집에 가서 혼자 공부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배움에 있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 스스로 단계별로 과정을 밟아가면서 여기서는 이랬고, 여기서는 10분간 고민을 했고, 또 여기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질문을 해서 도움을 받았고 하는 과정들을 거쳐야 그 지식이 진짜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해요. 같은 지식을 습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이 방식이 지식이 오래가고 저의 일부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들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이 학생에게나 교사에게나 더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교육방식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소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질문의 공부를 했을 때 학생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학습할 수 있으며, '교사의 생각이 중요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사고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이 학교 교사들은 무엇보다도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의견과 질문을 갖고, 더불어 다른 사람의 의견과 질문을 존중하는 것을 가르치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우연한 계기로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기존의 교사 중심의 강의식 수업방식을 버리고 하크니스 테이블에 앉아 교사와 학생이 동등하게 주어진 주제에 대해 심층적인 토론을 벌여 서로의 견해와 이해를 배우는 수업방식을 지향해왔다. 나와 다른 사람의 질문과 호기심을 통해 배우는 수업방식이 사고를 보다 폭넓게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세계 최고의 명문학교가 될 수 있었고, 지금도 질문의 공부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소개

정현모 프로듀서
< 주요 제작 작품 >
- KBS 스페셜 '앨런 가족 이야기'
- KBS 스페셜 '나의 아버지'
※ 다니엘 헤니의 "마이 파더"로 영화화
- 문화의 질주 10부작 시리즈 기획 연출
- KBS 스페셜 '동강 가수리 3년의 기록'
- KBS 스페셜 '서번트 신드롬'
- 세계 탐구 대기획 유대인 2부작
※'유대인의 공부'로 책 출간
- KBS 스페셜 / 추적 60분 / 환경스페셜 등 각종 다큐멘터리 분야 연출
< 주요수상 경력 >
- 방송통신위원회 선정
이달의 우수 프로그램상 다수 수상 등

남진현 프로듀서
< 주요 제작 작품 >
- 2011년 KBS 신년기획 2부작 "블루 이코노미"
- 미국 농부 조엘의 혁명
- 소비자 고발 "매트리스의 공포 등"
- KBS 스페셜 / 다큐3일 / 소비자고발 등 각종 다큐멘터리 분야 연출
< 주요수상 경력 >
- 방송통신위원회 이달의 우수 프로그램상
- 2007년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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