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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에서의 첫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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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에서의 첫 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4> 천왕봉~정령치(5.20~22)

산행 첫 날 (2)

백두산으로부터 흘러 내려 온 길이 눈앞에 있었다. 백두산까지 이어져 있는 길이 눈앞에 있었다. 어찌 보면 대견해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길이었다. 그저 여느 동네 산에 있는 길처럼 데면데면했고 키 작은 나무들은 바위들을 비켜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그 데면데면한 길을 따라 나아갔다. 천왕봉을 떠났다. 백두대간에서의 첫 밤을 보낼 세석대피소를 향했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자 하늘을 오르는 문인 통천문이 나타났다. 통천문으로 들어갔다.

사람 사는 한 세상에서 이런 호사가 있을까. 불과 몇 시간 동안에 '하늘을 여는 문'인 개천문으로 들어갔다가 '하늘을 오르는 문'인 통천문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천왕봉에 머물렀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하늘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옛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늘에 가장 가까웠던 천왕봉을 하늘의 일부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개천문과 통천문을 지리산으로 오르는 초입에 두지 않고 천왕봉 바로 아래 세웠으니 말이다. 이 땅에 있는 산들 중 오직 천왕봉만이 하늘에 속한 산이었다. 그 밖의 높은 산들은 아무리 스스로 높음을 주장해도 모두 이 땅에 속한 그저 높은 산일뿐이었다. 우리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따라 하늘의 산에 이르러 마음을 씻은 후 다시 세상의 산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 풀과 기린초 ⓒ이호상

그러나 아무리 세상에 속한 산이라 할지라도 백두대간은 하늘의 마음을 담은 산이리라. 이 땅의 수많은 생명을 품어 살리고 있으니 어찌 하늘의 마음을 담은 땅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제석봉 고사목지대였다. 낡은 커튼처럼 완만하게 드리워진 언덕배기 위로 불에 타 죽은 나무들이 휑뎅그렁한 모습으로 듬성듬성 서 있었다. 오십년 전에는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울창했던 숲이다. 그렇게 제 삶 아름답게 살다가 사람들에 의해 남벌되고 도벌된 것으로도 모자라 불태워진 산이다. 그리고 이제는 나무들의 무덤이라고 불리게 된 산이다. 그 산이 제 상처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 상처들은 동시에 처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은 오십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벌되고 불에 탄 깊은 상흔들조차도 아름답게 변화시켰다.

자연이란 참으로 위대하다. 생명이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새로운 생명을 보듬고 키워내 아름다운 언덕을 만들어 내다니 말이다. 그리하여 불에 탄 그 모습 그대로 오랜 세월 외롭게 서 있는 나무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 제석봉의 고사목 ⓒ이호상

울타리에 몸 기대어 나무들을 가까이 바라보니 나무들은 지난 세월을 잊은 듯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제석봉 고사목지대는 더 이상 나무들의 무덤이 아니었다. 더 이상 빈숲이 아니었다. 생명력 충만한 아름다운 숲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아름다운 숲이었다.

얕은 바람인데도 불어 온 바람에 언덕을 덮은 낮은 풀잎들이 일렁이고 출렁인다. 언덕 곳곳에 자리한 키 작은 관목들도 흔들렸다. 짧은 가지 흔들리는 그 모습이 마치 제 모습 잊힐까 저어하여 '나도 여기 있다'고 손 내밀며 몸짓하는 것 같았다. 내게 손짓하며 부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들이 가슴에 감겨왔다. 뭉클했다. 아픔이 깊었던 만큼 깊은 그리움을 품게 하는 곳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전망대에 기대어 서자 능선을 넘어 온 바람이 시원했다. 나는 그저 뭉클한 가슴을 안은 채 생명력 가득차오는 빈숲을 바라보며 쓸쓸했다.

쓸쓸함을 뒤로 하고 조금씩 무거워져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연하봉과 삼신봉을 지나야 했고 촛대봉에 오른 후 세석고원을 지나야 했다. 세석고원의 끝에 세석대피소가 있었다.

연하봉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는 길 곁에서 가문비나무 저 홀로 서 있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저 혼자 서 있는 듯 했다. 나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틀림없는 가문비나무였다. 가벼운 흥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문비나무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나는 지리산으로 들어오며 가문비나무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은근히 궁금해 하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었다. 내가 만나기를 소망하던 그 가문비나무가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가볍게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신범섭 촬영감독을 기다렸다. '왜 촬영 감독이 되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하'자 한 글자를 빼먹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던 그다. 그 대답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 글쎄~ 시골에서 올라와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충무로로 갔는데...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야, 너 뭐 하려고 왔어? 뭐하고 싶어?'하고 묻기에 '배우 하러 왔어요'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당황해서 '배우...러 왔어요'라고 대답했지 뭐예요. 그러자 면접관이 '그래? 그럼 너 촬영 배워' 하는 바람에 촬영부에 속했지요. 그래서 촬영을 배우게 됐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쓰러졌다. '이러다 정말 배꼽이 빠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로 웃었다. 나는 '하'자 한 글자를 빼먹는 바람에 훌륭한 촬영감독이 된 신 감독을 기다려 가문비나무를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이 나무가 가문비나무에요. 카메라에 찬찬히 잘 담아두세요. 멋있게요.

이 나무가 중요한 나무에요?

어느 새 카메라를 꺼내 들고 촬영을 시작하며 신감독이 내게 물었다.

지리산의 가문비나무는 백두산과 지리산이 대간 길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예요. 가문비나무는 고산지대에 사는 나무로 아주 오랜 옛날 이 땅에서는 백두산에만 있었던 나무이거든요. 그런데, 빙하기에 가문비나무의 씨앗들이 빙하에 묻어 내려온 것이지요. 그러니 지리산의 가문비나무는 백두대간이 하나로 이어진 한반도의 생명의 통로라는 것을 보여주는 나무지요. 마치 토양의 영양 상태를 알게 해주는 지표식물처럼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생명의 통로임을 말해주는 지표 나무인 셈이지요. 매우 중요한 나무에요. 그 중요성에 비해서 너무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하며 조금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어디 가문비나무뿐이랴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사람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문비나무가 제대로 대접 받기를 바라는 것이 사치스런 생각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 붉게 핀 철쭉 ⓒ이호상

가는 길을 따라 붉은 철쭉이 피어 있었다. 오는 길에 간간이 보이던 철쭉꽃들은 세석고원이 가까워져서인지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붉은 철쭉꽃들 사이로 나아갔다. 연하봉을 지나고 삼신봉을 넘어 촛대봉으로 올랐다.

가쁜 숨으로 가슴은 터질 듯 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걷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오후 3시 15분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바라보니 세석산장이 눈앞에 있는 듯 보였다. 낙동강의 남쪽으로 흐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낙남정맥이 시작하는 영신봉도 보였다. 해발 1,651m 지리산 영신봉에서부터 낙동강 남쪽을 가로지르며 김해 분성산까지 약 299km를 흘러간 산줄기가 바로 한반도 13정맥 중의 하나인 낙남정맥이다.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은 산들이 영신봉으로부터 물 흐르듯 이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떤 봉우리는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자그마한 흙더미 같기도 하고 어떤 봉우리는 그저 하늘에 떠 있는 듯했다. 또 어떤 봉우리들은 그것이 산인지 구름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물 흐르듯 이어져 내리고 있는 산줄기들을 바라보며 망연했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왔다. 땀이 식으며 조금씩 추워졌다. 모두들 자신들의 일을 하느라 바빴다. 신감독과 캐나다에서 촬영 공부를 하고 돌아온 촬영기사 안도현은 촬영에 몰두하고 있었고 사진작가 이호상 역시 사진을 찍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첫 산행의 설렘에도 불구하고 피로는 이미 깊어져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세석고원으로 내려갔다. 구상나무와 200종의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30만평의 드넓은 세석고원으로 내려갔다. 5월말부터 6월 사이에 피는 붉은 철쭉으로 유명한 세석고원으로 내려갔다. 과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해방정국의 시대 이현상의 남부군이 토벌대에 포위 되어 몰살당했던 피비린내 나던 역사의 현장인 세석고원으로 내려갔다.
▲ 세석고원으로 가는 길 ⓒ이호상

세석고원은 말없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지나는 길 사이로 떨어진 철쭉 꽃잎들 간간이 흩날리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괜찮으세요?"

먼저 세석대피소에 도착해 있던 한문희 대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침내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오후 5시 52분이었다. 하늘에는 조금씩 노을이 아름답게 깃들고 있었다. 앞서 도착한 일행들은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식탁은 우리보다 앞서 온 등산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바닥에 둘러 앉아 조리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밥과 꽁치 김치찌개에 소주를 곁들인 저녁이었다. 식탁은 없었지만 환상적인 저녁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는 사이 나는 잠자리를 점검하러 대피소로 들어갔다. 접수창구로 가 예약번호와 이름을 대니 직원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멀뚱히 바라만 봤다. 그저 어리벙벙하였다. 사실 그가 한 말은 아주 간단했다.

"2호실 95번부터 100번까지 쓰시면 되요."

이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그의 간단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 안에 드는 대한민국 국립공원의 숙소가 군대 막사와 같으리라는 것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본적인 사항도 전혀 알지 못한 채 나는 산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긴 누굴 탓하겠는가.

세석대피소는 군대막사처럼 한 공간에 나란히 누워 자게 되어 있었다. 수용인원이 190명이나 되었다. 그날 밤은 산불방지기간이 끝난 직후여서 그랬던지 거의 다 찬 것 같았다. 나는 한 사람 앞에 2장씩 12장의 담요를 빌려 자리에 갖다 놓았다. 잠시 후 씻기 위해 나갔다. 잠자리는 불편하지만 하루 종일 땀을 흘렸으니 씻기라도 해야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제대로 씻을 곳도 없었다. 대피소에서 약 100m 쯤 내려간 곳에 졸졸 나오는 물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은 탓인지 설거지를 하기에도 순서가 오지 않았다. 겨우 양치질만 간단하게 하고 숙소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땀으로 절은 몸에서는 쉰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국립공원의 숙박시설인데 외국의 국립공원들처럼 호텔 급의 시설은 없어도 최소한 씻을 수 있는 세면시설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화장실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실내에서 조리할 수 있는 조리장과 식탁 정도는 제대로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많은 땀을 흘리고 나서도 씻을 수 없다면 산이 좋아 산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계속해서 산행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이런저런 많은 생각들로 마음이 어수선한 채 자리에 누웠다. 저녁 아홉시였다. 불이 꺼졌다. 소등 시간이었다. 불이 꺼지자 사람들은 산행에 피곤했던 탓인지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모두들 잠이 들은 밤이었지만 대피소는 조용하지 않았다. 여전히 시끄러웠다.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 두런거리는 말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누군가를 향한 외침 등 다양한 소리들이 문 밖에서 들려왔다. 문 바깥쪽만 시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문 안도 요란했다. 마치 전쟁이 일어난 듯 공사를 하는 듯 요란했다. 국군의 날에나 볼 수 있는 탱크가 들이 열을 지어 지나가는 소리도 들려오고, 60mm 박격포 소리도 들려왔다. 수십 정의 자동화기도 동시에 불을 뿜고 있었다. 그뿐인가. 다른 쪽에서는 도로공사를 하는지 불도저 지나는 소리, 도로를 깨부수는 소리,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 트럭 지나는 소리, 부딪히는 소리 등 온갖 소리들로 시끄러웠다. 지친 나를 위로라도 하려는 듯 간간이 '삐익~ 빼엑~'하는 새소리 비슷한 소리도 들려 왔다. 헤어진 누군가를 찾는지 간절히 외쳐 부르는 목소리도 들려 왔고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도 들려왔다. 대피소에서 잠들어 있는 이들의 코고는 소리였다. 잠꼬대였다.
▲ 세석 대피소 ⓒ이호상

나는 잠들지 못했다. 잠 잘 수 없었다.

설렘으로 들어온 백두대간의 첫날밤은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 땀에 절어 쉰내 나는 몸으로 전쟁터와 같은 코고는 소리에 포위된 밤이었다. 나는 백두대간으로 들어오며 맞게 될 첫 밤을 설렘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어둠이 내린 깊고 넉넉한 지리산에서 나는 무엇을 만나고 느끼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가슴 설렜다. 그러나 지리산에서의 첫 밤은 이런 설렘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백두대간으로 들어온 첫 날의 설렘과 천왕봉에서의 감동과 제석봉 고사목지대에서의 그리움과 가문비나무를 만났을 때의 흥분도 모두 다 사라져 버린 듯 했다.

나는 밤 내내 잠들지 못했다. 간간이 뒤척이며 자려 애쓰다 결국은 일어나 앉았다. 새벽 세 시였다.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밤바람이 땀에 절어 있는 몸을 씻어주었고 찬바람이 지친 마음을 일깨워 주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심한 듯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 ⓒ이호상

* 바로 잡습니다: 지난 세 번째 글(천왕봉, 그 문으로 들어가다)에 천왕샘이 개천문에 앞서 있는 것처럼 기술되었는데 천왕샘은 개천문을 지나 있습니다.


필자 이메일 : from-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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