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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그 문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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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그 문으로 들어가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3> 천왕봉~정령치(5.20~22)

산행 첫 날 (1)

눈을 떴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지난 밤 내린 어둠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밤 내내 요란 하던 코고는 소리는 잦아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 마당을 가로질러 들려오던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시계를 보았다. 04시 25분이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아직 기상시간까지는 5분이 남아 있었다. 창 너머로 산들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산들은 웅크리고 앉아 새벽 미명을 맞고 있었다. 빛들이 첩첩한 산들 저 너머에서 오고 있는 듯 능선을 따라 어슴푸레 빛이 깃들고 있었다.

그래, 이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구나.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을 품어 살아가게 하고 있는 백두대간으로 들어가는구나.

새벽 방 안은 첫 산행 준비로 어수선함과 분주함과 서투름으로 가득했다. 나는 지난 밤 점검했던 배낭을 다시 꾸렸다. 배낭은 며칠 동안 입을 옷과 산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장비들과 나무 사전과 일기 수첩 등으로 팽팽했다. 정리하고 돌아서면 빠뜨린 것이 있어 다시 정리를 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서툴렀다. 무엇을 꾸려야 할지, 어떻게 꾸려야 할지, 짐은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 천왕봉에서 중봉을 바라보다ⓒ이호상

이렇게까지 서투르다니...
이런 서투름은 지나 온 나의 삶이 숲과 산, 백두대간과 얼마나 상관없었는지를 말해주는 뚜렷한 흔적이었다. 씁쓸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백두대간으로 들어가는 의미 깊은 첫 새벽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웃음조차도 서투르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어제 오후 가슴 속에 있던 낯섦이 아직 남아 있는 듯 내 모습이

스스로 낯설기도 했다.
이런 서투름에 익숙해지는 것으로부터 산행은 시작되는구나.

그러나 이런 서투름 때문에 희망을 품게 되기도 하였다. 사실 서투름이란 새로운 희망을 향해 새 발걸음을 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투름이란 곧 익숙해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서투름이란 익숙함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 지리산을 느끼다ⓒ이호상

가벼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배낭을 메고 민박집을 나서자 지리산의 아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깊은 골에서부터 불어온 찬바람이 능선을 타고 내려와 맑고 시원한 기운을 내려놓고 있었다. 공기는 가슴 시리도록 차고 맑았다. 산 아래 세상에서 묻혀 온 마음의 때가 모두 씻겨 지는 듯 했다. 봉우리마다 운무 가득 피어올라 산은 장엄하였고 바람과 운무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봉우리들은 신비롭기만 했다. 그 봉우리들 뒤로 첩첩이 산들이 이어져 그저 잊을 수 없는 유년 시절의 기억들처럼 아스라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저 봉우리들 너머에 천왕봉이 있으리라.
저 아스라한 능선을 넘어 선 곳에 백두대간으로 들어가는 문인 천왕봉이 있으리라.

높이 1,915m인 천왕봉은 남쪽으로 내려 뻗은 백두대간의 줄기 중 가장 높은 산이다. 아니 남쪽 내륙에서는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산이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백두대간의 문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백두대간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거기서 수 백 수 천 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백두대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는 것은 아무나 백두대간으로 들어설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이 이 땅에 전해준 지혜를 얻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지혜를 구하고 지키는 자들만이 백두대간으로 들어 설 수 있다는 무언의 가르침인지도 모른다.
▲ 함께 살아가는 숲ⓒ이호상

그래서인가. 천왕봉에 이르는 동쪽 문이 '하늘을 여는 문'인 개천문(開天門/'개선문'이라는 이름도 있다.)이고 남서쪽 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인 통천문(通天門)인 것이 말이다. 그렇게 개천문을 지나고 통천문으로 들어서야만 천왕봉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길인 백두대간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옛사람들의 생각에는 말이다. 그래서 이 산의 이름을 '지혜의 산, 깨달음의 산'이라는 의미가 담긴 지리산(智利山, 智異山, 智理山)으로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백두산이 흘러 내려와 이룬 산이라 해서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부르는 지리산은 큰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혜로움을 가르치려는 마음의 넉넉함 때문인지 여러 가지 이름을 지니고 있다.

지리산의 본래 이름은 지리산(智利山)이다. 이것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온 것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현신한 문수보살의 지혜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그 지혜를 얻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가 계승되고 재해석되어 지리산(智異山)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지리산(智理山)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지혜로운 이인이 많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워지는 산'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는 서로 뜻이 통하는 비슷한 의미의 이름들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머물면 지혜로워지고 그렇게 지혜로워진 사람이 많아지면 지혜로운 이인이 많아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산, 지리산이 가르치려고 했던 지혜는 무엇일까.
글쎄, 이제 겨우 산으로 들어가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야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 지혜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혜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 마음이며 행동이다. 지혜란 '나와 다른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숲처럼 말이다.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꽃은 꽃대로, 벌레는 벌레대로, 미생물은 미생물대로, 계곡은 계곡대로, 시냇물은 시냇물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비는 비대로, 빛은 빛대로 모두 제 모습 그대로 살아갈 때에만 숲은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 산행을 시작하다ⓒ이호상

숲에서는 사람 사는 세상과 달리 다른 것이 아름답다. 산 아래 사람 사는 세상이야 나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여 해치고 때로 죽이기까지 하지만 산 속 숲 세상에서는 다르다. 나와 다른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아니 나와 다른 것들이 많을수록 좋다. 많을수록 숲은 더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모두 함께 살아갈 공동체가 더 커지고 좋아지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삶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지나면 나도 이런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백두대간으로 들어가면 우리도 이런 지혜를 깨달을 수 있을까.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리산의 맑은 기운 탓인지 내려오는 내내 가슴 가득했던 낯섦은 사라지고 없었다. 가슴은 설렜다. 모두들 둘러서서 몸을 풀었다. 밝은 얼굴들이었다.
드디어 오늘 백두대간을 여는 문인 천왕봉으로 올라가는구나.

지리산으로 들어가는구나.
나는 모두의 손길을 느끼며 외쳤다.

"백두!"
"사랑합시다!"

모두들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산행이 시작되었다. 백두대간을 향해, 지리산을 향해, 천왕봉을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

숲으로 들어서자 나뭇잎들은 팔랑이고 숲은 출렁이고 있었다. 바람이었다. 깊은 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산을 타고 내려오며 우리를 맞았다. 오월의 지리산은 싱싱함과 푸름으로 눈부셨다. 낮은 철교를 지나 합수목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예정대로 두 팀으로 나뉘었다. 황서식 촬영감독이 이끄는 촬영 팀과 헤어졌다. 그들은 백두대간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숲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숲으로 갔고 우리들은 백두대간을 향해 산으로 들어갔다.

천왕봉을 향했다. 길은 끊어질 듯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람은 숲 사이로 난 길들을 열어 주었고 우리는 그 길을 향해 산으로 들어갔다. 망 바위에서 바라본 산은 이미 울울창창하여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부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출렁이는 나뭇잎의 수런거리는 이야기들을 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뭇잎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길을 따르다 문창대를 지나고 법계사를 지나니 작은 샘이 보였다. 남강의 발원지인 천왕샘이다. 이렇게 작은 샘에서 졸졸졸 흘러내리는 물이 덕천강을 따라 흐르다 남강을 이루고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가 남강이 되고 낙동강이 되는 것이다.

나는 몸을 바닥에 닿을 듯이 뉘여 물을 받아 마셨다. 맑은 물줄기가 온 몸으로 흘러들었다. 턱까지 차올랐던 숨이 가라앉았다.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도 깨끗해지는 듯했다.

이 물은 어디에서부터 흘러오는 것일까.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든 내 등 뒤로 아름다운 새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슴이 저려왔다.

어떤 새일까...
알 수 없다. 산을 지나면서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걸음을 재촉하다 눈을 들어 보니 하늘을 여는 문인 개천문을 지나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을 뒤로하고 홀린 듯 산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 새 하늘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천왕봉이 지척이었다.

가파른 바위 길을 조심스레 헤치며 천왕봉을 올랐다. '이제 다 왔으니 힘을 내라'고 말들이 들려왔다. 우리를 이끌었던 한문희 대장은 벌써 올라 있었고 후미에서 나를 격려하며 산행을 하던 김남균 대장은 여전히 내 뒤에 서 있었다.

'천왕봉이다!'

나는 소리 없이 외쳤다. '지리산 천왕봉'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 가슴은 쏟아질 것 같은 숨결만큼이나 벅차올랐다. 마침내 내 생애 처음으로 천왕봉에 올라선 것이다. 백두대간의 남쪽 문인 천왕봉에 들어선 것이다. 가슴 떨리는 벅찬 순간이었다. 나는 거칠게 쏟아지는 숨결을 가라앉히며 지나 온 길을 내려 보았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곳에는 장엄한 세계가 펼쳐 있었다.
▲ 천왕봉을 오르다ⓒ이호상

골은 골을 부르고 뫼는 뫼를 불러 어디가 뫼고 어디가 골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뿐인가. 산은 산을 불러 산들은 켜켜이 쌓이고 첩첩이 늘어서 그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산들이 이어져 이곳까지 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고 그렇게 이어져 있는 능선을 따라 백두대간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바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어디서부터 불어오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가야할 길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길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뿐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땅에서... 이렇게 장엄한 땅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천왕봉을 오르느라 흘린 땀방울들과 지친 마음을 씻어 주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에서 그렇게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가다니...
그렇게 많은 생명들을 서로 죽이다니...
사람이란 참으로 무섭고 모진 존재이다.

나는 이어지는 생각의 끈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망연히 가야할 길을 바라보았다. 길은 서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 끝에 노고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부터 길은 다시 북쪽으로 활처럼 휘며 뻗어 나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 길들이 아득하기만 했다.
저녁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마치 노을이 오는 듯 하늘 한 편이 붉어졌다.

필자 이메일 : from-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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