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탈을 쓴 늑대는........
지난 8월 15일은 광복절 63주년도, 건국 60주년도 아니었다. 그건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적 능욕과 독립투쟁에 대한 기억 말살 범죄가 총체적으로 저질러진 날이었다. <이명박 파시즘>의 등장이 과연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인지, 그 진상을 만천하에 드러낸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괴물> 앞에 서 있다.
권력의 부당한 지배에 항거한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이명박의 언급은 거의 그 자신을 스스로 조롱하는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성경에서 예수는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조심하라"고 한다.
그는 이른바 경축사에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을 거치며 인권과 민주주의는 굳건히 뿌리를 내렸습니다.......역사는 구경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자유는 결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건국 60년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과 당당히 싸워왔습니다.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빈곤과 싸웠습니다. 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해 억압과 싸웠습니다. 사회적 자유를 얻기 위해 차별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문화적 자유를 얻기 위해 편견과 싸웠습니다."
정작 자유를 위협하고 있는 세력
그런데 오늘날, 이 자유를 도처에서 유린하고 있는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사회적 양극화를 가속화시켜 중산층도 빈곤의 위기에 몰아놓고, 공권력을 폭력화하면서 억압의 체제를 견고히 만들고 있는 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있는 자들의 자유는 극대화하고 없는 이들의 자유는 극소화하며, 편견과 왜곡을 조장하는 문화적 폭력으로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려는 자가 도대체 누군가?
그의 말은 우리에게, 지금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찌하여 이 싸움을 당당하게 지속시켜야 하는지 역설적으로 일깨우고 있다. 우리는 그의 말을 그 자신에게 그대로 돌려주고자 한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뿌리를 잘라내고, 자유의 가치를 소멸시키려는 "권력의 불결한 진실"을 행동으로 입증하고 있는 존재에게 말이다.
이명박은 법치를 내세웠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에 대해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적 자유와 문화적 자유를 외치는 100회를 맞는 촛불집회는 철저하게 억압되고 말았다. 자본의 자유를 위한 권력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 체제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가 여기에 귀환한 느낌이다. 색소 물대포로 민주 애국 시민들의 주장에 색깔을 칠하고, 사복 체포조로 "깨어 있는 머리"를 땅바닥에 메친다.
그러면 머리가 으깨지고 다리가 분질러지고 손이 부서지는 줄 알면서 거침없다. 그런 식으로 조이고 깨고 짓밟으면 머리 속에 든 것과 다리로 걸어가려는 목표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이 변할 줄 아는 모양이다.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더욱 분명해진다. 몸은 힘겨우나 정신은 은화처럼 맑아진다.
법치(法治)와 법치(法痴)
이명박의 법치는 무엇인가? 자신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은 모두 입을 다물게 하고 말겠다는 것이며, 이에 저항하는 이들은 모두 법을 내세워 응징하겠다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인척 비리 문제는 얼버무리고 정적을 향한 칼날은 날카롭게 버린다. 그건 법치(�C)가 아니라 법의 진정한 정신에 무지한 법치(�G)일 따름이다. 이명박 정권은 "법치(�G) 정권"이다.
뿐만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광복절을 건국 60주년으로 뒤덮어, 오랜 식민지 생활 청산의 결정적 시점을 망각의 지대로 밀어 넣으려 했다. 그리하여 친일파의 죄과도, 독립투쟁의 희생도 모두 대중의 기억에 도려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경축사에서 광복절의 의미는 뒷전이었고 독립투쟁의 역사는 사라졌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을 지지하고 그 역사관을 공급하는 세력들은 분단체제를 주도하고 전쟁이 나자 가장 먼저 도주했으며, 제왕적 독재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다가 결국 몰락하고 쫓겨난 이승만을 건국의 시조처럼 떠받들려 한다. 그런 움직임 앞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투쟁의 기록은 실종되고 만다.
"힘께" 하지 않으면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괴물은 퇴치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이 편해진다. 생각보다 긴 싸움이 될지 모른다. 또는 순식간에 붕괴의 시간이 닥쳐 올 수도 있다. 어느 편이든, 최종적 해결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힘이 있어야 한다. 지혜로워야 한다. 그런데 그 힘은 혼자되지 않는다. "함께"가 아니면 손쉽게 격파 당한다.
파시즘 권력은 대중들에게 무력감을 강화한다. 덤벼봐야 깨질 뿐이다, 라는 무력감.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파시즘의 전체주의는 인간을 원자화하고 사회적 연대에서 분리해낸다"고 갈파했다. 이 사회적 연대의 복구, 그래서 강한 응집력을 갖는 경험과 실천만이 우리에게 살 길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진보정당은 물론이고 민주당의 진보 개혁적 세력도 오늘의 현실에서, "모두 하나가 되어" 권력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치열하고도 매서운 싸움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차이를 논하면서 따져나가기에는 이명박 파시즘의 위협이 결코 작지 않다.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할 때와 그 내용이 분명 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넘어서서 함께 해야 할 때와 내용이 또한 엄연히 있다. 이걸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을 때 놀라운 투쟁력이 솟구친다. 파시즘에 대한 비난만으로 파시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비극적인 무지다.
보수우익의 재집결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함께 싸워야 할 때 갈라져 각기 자기만의 무대 위에서 농성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다. 장렬한 전사가 될지는 몰라도, 승리를 가져다주는 길은 아니다.
장렬한 전사가 아니라 승리해야
이겨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철칙이다. 지면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디다가 자칫 지치고 말 수 있다. 살려면 이겨야 한다.
이기려면 "함께" 가야 한다. 서로 격려하고 끊임없이 의지를 뿜어내게 하는 민주세력의 총 단결이 요구된다. 파시즘의 권력에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이 함께 가야 할 이들이다. 서로 우군이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지식인을 비롯하여 오늘의 현실에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역사의 진전은 없다고 믿는 모든 이들이 범국민 연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권이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깨우치고 있는 단 하나 중대한 진실이 있다. 이명박은 이렇게 말했다.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을 거치며 인권과 민주주의는 굳건히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너무나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제2의 민주주의 투쟁이 절실해진다. 권력에게는 불온하나, 국민들에게는 감격적인 그런 민주주의 말이다.
섣부른 행진보다 중요한 것은 응집력이다. 응집력보다 중요한 것은 패기다. 패기보다 중요한 것은 불굴의 의지다. 불굴의 의지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역사의 승리에 대한 믿음과, 함께 하는 이들에 대한 믿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들어 옮긴다. 역사는 그렇게 진화해왔다.
그 어떤 때라도 이 믿음을 결코 놓지 않는 이들을 이길 자가 없다. 믿음은 모든 새로운 역사의 창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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