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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KBS 사태, 정 선배 잘못도 큽니다"

[김민웅 칼럼] 우리의 유일한 타협은…

창밖에는 비 내리나 마음의 열불은 여전히....

정연주 선배, 오랜만이지만 "잘 지내셨습니까?" 라는 인사가 꽤나 민망한 때입니다. 8월의 태양이 거침없이 이글거리면서 모든 것을 태워 삼킬 듯 했는데, 다행히 새벽에는 비가 내려 한결 열기가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8월 12일 새벽 2시 반이 넘어가는 시각입니다. 창문으로 스쳐 부는 바람이 유난히 고맙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이는 열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습니다. 정말, 이 불을 제대로 꺼줄 빗줄기가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공영방송 KBS를 여론의 검열기구, 권력의 선전도구, 국민의식의 세뇌기구로 만들고자 하는 이명박 정권의 거칠기 짝이 없는 불법적 폭거는 이 나라를 거꾸로 세우고 있습니다. 그건 그가 요 며칠 전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에서 거꾸로 든 태극기가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대한민국 거꾸로 세워지고, 국민 주권 실종되고

이렇게 보자면, 국민들의 주권은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는 폐기처분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진상 아니겠습니까? 민주주의를 적으로 삼는 파시즘이 이 땅에 그 야만의 얼굴을 드러내면서 "납량(納涼)특집의 귀신"처럼 다시 출몰할 줄이야 누가 미처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정 선배를 포함해서, 우린 너무 안이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다른 토론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정 선배, 단도직입적으로 따져 묻겠습니다. 우선, 어떻게 된 인간이 (이런 표현이야 대범하게 넘어가시고) 감사원, 검찰,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가 죄 달려들어서 이리 털고 저리 터는데 먼지 하나 안 나옵니까? 그만한 지위에 있으면서, 게다가 살아온 인생도 60고개를 넘어 중반으로 향해 가는데 한국사회의 통념과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털어 먼지 안 나오다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한나라당 고문에, 한나라당 소속 시의회 의장, 그 밖에 의혹이 제기되는 기타 한나라당 지도부를 비롯해서 더군다나 대통령의 인척 등등을 보면, 다들 털기도 전에 어디 먼지 정도입니까, 멀리서 보고 있기만 해도 부패의 썩은 냄새가 천하에 진동하는데 정 선배가 이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상대가 열등감이나 적대감을 느끼는 것 아닙니까? 너무 비교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KBS의 수장을 맡고 있으니, 어디 무슨 로비가 통하겠습니까, 압력이 행사될 수 있겠습니까, 또는 권력에 아부를 하겠습니까?

"역지사지(易地思之)", 자기 입장만 고려하지 말고, 상대방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적어도 권력을 불안하게 만든 점은 인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권력자들이 어디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었겠어요? 부패에 익숙한 권력은 부패가 통하지 않는 언론방송의 수장에 대해 안심할 수 없기 마련인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언론방송이 권력을 불안하게 해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은 맞지만, 그건 우리 국민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일방적인 편견 아닐까요?

국민들 입장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정 선배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한, 권력은 자신들의 정체가 자꾸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을 덮고 감추고 딴 데 관심을 돌리도록 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정 선배는 그런 거 본래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 데에는 무능한 정 선배의 존재는, 오로지 국민들한테만 좋을 뿐입니다.

권력에게 불온하게 비친 일부 프로그램도 짚어봐야 합니다. <시사 투나잇>이라든가 <미디어 포커스>라든가 다 이 사회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비판적인 논점을 제기하는 고발 프로그램 아닙니까? 환경 다큐도 그냥 자연보호 정도로 그치지, 자본의 진실을 폭로하고 그 폐해를 분석하고 그러면 됩니까? 물론 정 선배가 직접 지휘해서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런 프로의 존속을 방치한 책임은 있는 것 아닙니까?

경제도 어렵고 살기가 팍팍한데 가급적 오락 연예 프로그램을 더 많이 해서 사람들을 즐겁고 기쁘게 해줘야 했던 것 아닙니까? 이 사회의 진상을 너무 많이 알게 하는 것은 국민들을 과도할 정도로 똑똑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국민들이 자꾸 똑똑해지면 권력이 심하게 피곤해집니다.

권력이 심하게 피곤해집니다

일요일 날 다들 쉬는데 무슨 또 아침부터 복잡하게 진단하고 대안을 토론해보고 그럽니까? <일요진단>같은 것일랑은 하지 말고 <일요강좌>같은 프로그램 만들어서 휴가를 잘 보내는 방법, 강남 부동산 투기 클리닉 같은 것을 해서 실질적으로 권력과 자본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를 했어야 지금과 같은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해임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또 한 가지 거론하자면, 이번에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경영부실과 적자 운운으로 트집을 잡던데 이 사안도 정 선배가 오판한 겁니다. 그런 말 듣기 전에, 사람들 좀 팍팍 자르고 몸집을 줄여서 흑자경영을 확실히 하시지 그러셨어요.

정 선배 싫어하는 현 KBS 노조지도부부터 해고하고 경비 줄이고 첨단방송기기 들여왔으면 적은 수로 움직이는 신속 기동군 같은 방송 되고 KBS 노조와 지금 같은 관계를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경영 선진화했다는 칭찬도 받지 않았을까요? 과감한 해고를 통한 구조조정에 서툴렀던 것 아닙니까? 인간이 그렇게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무슨 큰일을 감당합니까?

정 선배가 자초한 일들

이건 다 정 선배가 자초한 일입니다. 방송의 공영성과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에만 신경 썼지,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위선이 요구하는 바를 싸늘하게 외면해온 결과입니다. 돌아보면 지난 2003년 4월에도 정 선배는 한바탕 정치적 홍역을 치렀지요. KBS 사장 될 때 한나라당과, 정 선배가 "조폭"이라고 지목했던 언론들이 난리를 쳤던 상황이었습니다. 2003년 4월 25일 제가 정 선배를 이들의 공세 앞에서 엄호해보자고 <오마이뉴스>에 썼던 글 일부는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우선 KBS의 문제부터 보자. 오늘날 우리 언론시장의 최대 관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론이 자본의 권력에 복종한 채 진실 전달과 정론을 펴기 어려운, 즉 '언로의 왜곡현상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CNN, Fox 등의 방송이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보도에서 얼마나 심각한 편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 배후에는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대자본의 이해가 깊게 깔려 있음도 확실해졌다.

자본과 권력의 동맹에 맞서는 길

반면, 미국의 공영방송 PBS나 NPR(National Public Radio)의 경우, 미국 정부의 공식적 전쟁 정보나 해석을 그대로 내보내지 않고 현지의 다양한 입장과 견해, 비판적 입장도 모두 아울러 다룸으로써 미국의 대외정책과 세계정세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국의 BBC 방송과 해설을 함께 내보내는 NPR의 경우, 미국 중심의 극우적 애국주의의 경향을 교정하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한국 언론시장에서 무소불위에 가까운 위력을 발휘하는 자본과 권력의 동맹 앞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공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공영방송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인사는, 바로 그렇게 자본과 권력의 공세를 정면으로 받아치면서 '공적 진실을 주장해온 인물'이 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정연주는 그동안의 기자생활을 통해 이미, 바로 그러한 형극(荊棘)의 시험을 통과하고 공적 확증을 받은 위치에 있다. KBS 노조와 시민사회단체가 그를 적극 지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같은 확증의 표명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새삼 미국에서 함께 언론활동을 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스>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출발했던 저는 유학시절, <말>지 미국 통신원과 <미주 동아일보> 기자로, 정 선배는 <한겨레신문> 특파원으로 서로 만나지 않았었습니까? 워싱턴에서 뉴욕을 오가면서 털털한 차림과 열정적인 자세로 취재에 임했던 정 선배가 눈에 선합니다.

그 열정의 시대로 인해

정 선배가 민주언론운동 했다고 동아일보에서 쫓겨나고 미국에 와서 힘들게 공부 마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중에도 애들 훌륭하게 잘 키우면서 얼마 되지 않은, 또는 은유가 아니라 정말 쥐꼬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한겨레신문 봉급으로 버틴 외롭고 고단했던 날들. 그래도 단 한 번도 기가 꺾인 적이 없는 정 선배를 알기에, 이번 일련의 사태 가운데서 그 무수한 상처를 입으면서도 탄탄하게 버텨내는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정 선배, 부디 힘내세요. 정 선배가 "조폭언론"으로 지목했던 세력과 오늘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조폭권력의 동맹이 위세를 부리는 것 같지만 이게 다 저들의 부끄럽고 흉악한 범죄의 기록으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도저히 은폐할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말입니다. 저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를 날이 옵니다.

권력이 불편해하는 진실과 우리의 유일한 타협

그런데, 기왕 말이 나왔으니 정선배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 뭔지 아십니까? 그건, 권력의 압박에 적당한 시점에서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민주주의 편에 섰다는 겁니다. 민주주의가 불온하게 여겨지고, 도처에서 기득권 세력에게 공격당하는 시대에 그건 권력에 대한 역모(逆謀)입니다. 학살 당하는 민주언론을 지켜내려는 선택은 권력이 불편해하는 진실로 통합니다. 정 선배 개인의 이기적인 안락을 위해서는 이런 잘못은 계속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잘못의 연속이 중단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네요. 정 선배에게서 이른바 "개전의 정"이 안 보이는 겁니다. 정 선배가 "반역사적이고 반민주적이며 오만과 무지에 찬 이명박 정권"과의 싸움을 선언하셨더군요. 게다가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사원행동>이 떴습니다. 민주주의를 적대하는 권력이 "잘못"으로 판정한 일은 역사에서 언제나 정의로 우뚝 서게 됩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권력의 판단은 역사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권력의 비극입니다. 그 비극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승리를 가져다주는 출발점입니다.

아, 이래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갖습니다. 의지를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권력과 싸우는 "투사"가 된 정연주, 그런 모습을 또 보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만 이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네요. 정 선배, 만에 하나 긴급하게 체포되고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투옥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땅에 묻힐 시체가 되어가고 있는 권력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끝내 이길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진화는 필연적으로 우여곡절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답은 간명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타협은, 이길 때까지 싸우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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