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과거를 민족 정신 고양의 방편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민족주의에 취한 지식인들에 의해서부터였다. 당시 그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좌절당한 현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도록 대중에게 자긍심을 줄 과거의 찬란함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에 존재한 역사를 사실적으로 해석하거나 불편부당하게 드러내는 것보다는 당시 상황에 필요한 행덕을 과거에서 '발견'하거나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현재를 위무하기 위하여 고대를 찬란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 급진파 민족 운동가인 띨락(B.G.Tilak) 같은 이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베다 문명은 - 당시까지만 해도 인더스 유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4000년까지 그 발상의 기원이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구 식민주의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하는 '민주주의', '공화정', '평등', '인류애', '박애', '법치' 등은 모두 베다를 비롯한 고대 힌두 문명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유럽의 학자들이 고대 인도의 군주는 모든 권력을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제 군주이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사회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동양적 전제주의'에 반발하여 그들은 고대 인도의 군주 권력이 상대적으로 제한 당했다고 하는 면을 부각시켰고, 나아가 어떤 학자는 고대 인도의 정부를 합헌군주제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했다. 학자이면서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인 자야스왈(K.P.Jayaswal)은 고대 인도에 공화정과 대의제도가 발달하였음을 사료를 통해 발굴해내고 이어 그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키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들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은 학문적 차원에서의 역사 연구보다는 민족 운동이라는 특정 목적 차원에서 역사 만들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 찬란한 고대 문명은 모두 힌두교라고 하는 종교를 중심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가져왔다. 그들은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항거를 찬양하는 맥락에서 그들은 주로 외침에 항거하는 전사를 영웅으로 승화시키는 역사 만들기를 시도했다. 그러다 보니 외침은 모두 이슬람 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 되어 버렸고, 이에 항거하는 영웅은 모두 힌두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힌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성은 강조되었고, 무슬림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아닌 '남'으로 인식되었다. 그 '인도의 발견'이 빛을 발하면 발할수록 민족 자긍심이 커졌지만 이와 동시에 오늘의 이 처참한 상황의 원인 제공자로서의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문화는 자신들의 찬란한 과거를 파괴한 장본인이자 인류 최고의 고급 문명을 타락시킨, 애초부터 이 땅에 들어오지 않았어야 할 존재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실체가 아닌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힌두'가 민족 개념의 토대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힌두'는 어느덧 '인도'와 동일시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대의 산스끄리뜨 문화가 찬란한 인도 문명의 기초로 자리 잡았다. 결국 산스끄리뜨에 기초를 둔 즉 브라만 문화가 아닌 힌두 문화의 여러 이질적인 문화는 저급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로써 비록 사회적 권력을 지닌 브라만의 문화가 사회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자리를 잡아 오긴 했으나 그 문화와 전혀 다른 즉, 제사나 의례, 비폭력, 정신 등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보다 물질적인 여러 잡다한 문화가 정당하게 인정받고 공존해 온 오랜 전통이 서서히 무너져 가게 되었다.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은 역사 기록이 없거나 마땅치 않은 경우에는 고대의 신화를 역사로 적극 활용하였다. 신화를 사실적 역사로부터 분별하지 못하는 대중을 위해서 신화가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신화 속에 나오는 악마를 무찌르는 신을 기리는 찬가나 이야기를 만들고, 코끼신 신 가네샤를 비롯한 대중적인 힌두교의 여러 신을 중심으로 하여 대중 축제를 조직하는 것이 큰 탄력을 받았다. 중세 밀교 힌두교를 대표하는 악을 응징하는 여신 깔리가 대중 신앙의 중심에 서게 되고, 신앙적 차원에서 행동을 강조하는 힌두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바가와드 기따》와 그 안에 나오는 신화의 주인공인 끄리슈나가 민족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면서 급진적이고 보다 역동적인 저항 민족 운동의 교본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한국의 경우《삼국유사》와《제왕운기》가 나오게 된 때가 바로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던 때였고, 그 또한 역사의 '발견'이라는 방편을 통했으며 신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은 이와 동일한 맥락이었다. 그로 인해 민족 의식이 살아나기도 했고, 그 이후 일제의 의해 강점을 당한 후 민족 정신을 고양하고자 할 때도 《삼국유사》와《제왕운기》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눈앞의 적, 일제에 맞서 '우리' 의식을 만들고자 삼았던 그 방편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반면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우리'에 대한 단일한 정체성의 집단으로 다가섰고 이내 모두 우리의 '적'이 되었다. 동아시아라는 엄연한 역사적 공간의 의미가 훼손되고 그로 인해 민족주의의 역사가 무기가 되어 오늘의 동아시아에서의 역사 전쟁으로 흐른 것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과거의 '발견'을 토대로 한 민족 운동은 꼴까따와 뭄바이를 중심으로 하여 점차 널리 그리고 강력하게 퍼졌다. 그러면서 인도인에게는 서서히 민족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고, 점차 '인도 민족 운동'이라든가 '인도 민족주의'라고 하는 말이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민족'의 개념이 보편화되었다.
원래 인도는 전통적으로 다인종, 다언어, 다종교, 다(多)에쓰닉(ethnic), 다문화 사회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인도 민족 운동'과 같은 말이 별 문제 없이 쓰이게 된 것은 이렇듯 영국의 식민 지배라는 정치 상황 아래에서 인도아대륙에 사는 다민족이 하나의 정치적 목표로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정치적 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지식인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다.
식민주의에 대한 반발로 그들 지식인 계층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체계에 대해 우월성과 역사적 주체성의 확립을 위해 매진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인도를 주권과 자치권에 대한 단일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실체로 그려내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다 보니 새로이 만들어진 국민국가 인도는 단일 정체 안에서 계급이나 에쓰닉의 다양함을 초월하는 하나의 국민 국가로 자리 잡았다. 민족주의자들이 반(反)식민주의의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가 구축한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본질주의의 담론 안에 갇혀 버린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 개념 위에 영국 식민 통치 시스템이 더해지면서 바야흐로 인도아대륙 위에는 하나의 국민국가가 형성되었다. 영국 식민 지배 세력은 스스로를 근대주의를 소유하는 문명의 주체이고 이와 대하여 그들과 다른 '동양'의 인도는 전제주의가 만연한 야만으로 인식하는 계몽주의를 신념에 찬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계몽주의는 모든 인간은 정의라는 보편 원칙 속에서 최대의 행복을 향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그 공리주의는 법 앞에서 만민이 평등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계몽주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인도인들을 문명화되어야 할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진보와 문명을 전달하는 자로 인식함으로서 인도를 식민 통치하는 것을 정당화함으로써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에 스스로 반하는 모순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더욱 큰 모순은 인도인들 스스로가 영국의 식민주의 속에서 그들의 진보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식민주의는 절대 악으로 간주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보다 우월한 정치·경제 체제가 가지고 온 필요악의 결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식민 통치를 위한 제도를 세우는데 인도인들의 상당한 합의와 참여가 있던 것도 이런 인식 때문이었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숫자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체제이다. 이는 영국과 같은 유럽 사회에서는 정치적 자유를 통한 근대 사회 발전의 시스템으로 작동하지만 인도라는 식민지에서는 제국주의를 통한 식민 통치를 왜곡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였다. 식민 지배자들은 토지, 식량, 광물 등에 대한 측량에서부터 인도인의 신체, 음식, 평균 수명, 질병과 의약 등과 같은 물리적인 조사는 물론이고 역사, 민속, 사회 등과 같은 인문 사회적인 것까지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하여 분류·분석하였고 그것은 매 10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센서스로 더욱 체계화되었다.
사실 인도라는 사회는 그들이 실시한 토지에서부터 사회 분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부문이 그들 사회에서의 그것들에 비해 너무 다르고 복합적이라 그들 땅에서 만들어진 근대주의의 단일 기준으로 통계 처리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근대 국가는 통계 없이는 관료제를 운영할 수도 없고, 통치 기구를 조직할 수도 없고 결국 그런 맥락에서 도입된 체계는 인도를 사실과 다른 왜곡된 정치 단위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결국 식민 통치는 숫자를 통해 얻은 상상의 결과를 통치 구조의 시스템으로 삼았고 그것이 근대 국가의 정치 질서를 가져왔다. 센서스는 자원 선용을 위한 데이터의 체계적 확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도 사회와 문화에 대한 문외한인 자신들의 그릇된 잣대로 인도가 언어, 카스트, 종교, 에쓰닉 등으로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왜곡된 결론이 도출된다는 사실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그 안에서 인도는 수많은 미개의 에쓰닉으로 구성된 나라로 그려지고 그러한 에쓰닉은 자신들의 근대 국가에 의해 개화되고 발전해야 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렇게 창출된 전통은 19세기 후반 이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근대 국가의 체제 위에서 식민 통치자들이 통치의 수단으로 삼은 대표적인 것은 법이다. 법은 상상의 통계 위에서 문명화의 사명을 띠고 사회 개혁을 추진하는 전령이다. 식민주의자들은 그들의 법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힌두들은 법을 갖추어 본 적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존재라는 그리고 종교 공동체 분쟁과 같은 일련의 사회적 소요의 원인은 법의 부재에 있다는 등의 전통 사회에서부터 당대 사회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역사 왜곡을 자행하였다. 인도 땅에서의 법이 서양의 근대법으로 그리고 통일된 법으로 단일화 되어야 했던 것은 이렇듯 식민주의와 계몽주의의 왜곡된 만남과 그로 인한 통치 이데올로기의 창출로 인해서이다.
서양법 위에서 근대인이라는 개념의 개인은 사회 행위의 주체로 강요되고 그에 따라 기존의 인도를 지탱해 오던 여러 가지 형태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 재산, 규율 등은 모두 대체되어야 하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사회 혼란을 야기 시켰다. 농촌 사회에서의 지주-소작인 사이에 형성된 공동 경작권, 재산의 사적 소유권, 대가족 내의 재산권, 카스트 공동체 소유의 재산, 농촌 공동체 소유의 재산 등에 관한 문제 등이 급격하게 파괴되고, 그 결과 인도 사회가 전체적으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인위적으로 통합하고 단일화 된 법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의 근대 국가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피지배자의 단합을 심각하게 저해할 뿐만 아니라 잠복되어 있던 상호 갈등을 유발하기 안성맞춤이어서 통치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는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의 제1의 근간인 분할 통치가 매우 원활하게 작동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결국 유럽에서와는 달리 인도에서는 봉건 제도의 타파나 시민권의 형성과 같은 사회적·정치적 동질 집단으로서의 민족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타자의 지배에 대한 저항 단위로서 만들어지다 보니 그 민족주의 안에는 사회 내의 소수자나 피지배 계층을 억압하기 위한 체제 유지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국가 수립에 의해 법질서, 시민권, 사회 공공성 등이 확보됨으로써 소수자나 피지배 계층을 보호하는 체제를 어느 정도 갖출 수는 있겠으나, 실제 역사가 이행된 것을 보면 여전히 민족이라는 틀 안에서 소수자와 피지배 계층의 갈등이 무마되는 측면이 강하다.
한국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일제 강점에 의해 주권이 상실되고 그에 대한 저항 민족주의가 강렬하게 일어났을 때 그들 피지배 계층도 그 틀 안에 갈등 없이 동참하였고, 유신 독재 아래에서도 그들은 전체 민족을 위해 갈등 없이 헌신했으며 아이엠에프(IMF) 구제 금융 체제 아래서도 마찬가지로 민족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 국가 재건을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런데 그 안에서 돌아 온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일제 강점기 이후 현재까지 그 기득권자들은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여전히 그 위치를 구가하고 있고, 피지배 계층은 오늘 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더불어 또 하나 슬픈 사실은 그들 피지배 소외 계층은 이제 중산층으로부터조차도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철저하게 중산층 시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촛불 집회'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넘어 반이명박 정부의 기치로 타오르는 동안 그 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이 파묻혀버렸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촛불이 타오를수록 이명박 정부도 위태롭지만 동시에 진보적 의제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상상의 공동체 '힌두'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가 성장할수록 영국 식민 권력의 위치가 불안해지지만 다문화 복합 사회의 생명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연계시켜 본다면 심한 비약일까?
민족주의가 서구에서와 같이 시민권 확보의 측면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원초적 민족의 성격을 강조하면 그것은 대부분 국가주의로 진행된다. 삼성이라는 재벌의 이익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이익으로 착각되기도 하고, 그 안에서 모든 인간적 가치를 거두절미 하고 오로지 미국에 충성하여 경제 성장하는 것이 애국애족이라고 하는 성장 지상주의적 국가주의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해외로 진출하는 기업은 과거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행했던 죄악의 새로운 버전을 행하면서도 국가의 이름으로 보호되고 있다.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보수 진보를 망라하고 내놓는 군대 파견론이나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이 땅의 민족주의의 실상이다. 동아시아에서의 노동자 연대를 추구해야 하는 한국과 일본의 진보 정당조차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모두 보수적 국가주의에 함몰되어 있지 않은가?
유권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유권자를 설득시킬 수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들 스스로가 아직도 민족주의를 진보적 담론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어쨌든 퇴행적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역사학자의 말마따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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