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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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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으로 가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2>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이 땅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으로 들어가는 날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지난 밤 내리던 많은 비는 아침이 되자 말끔히 그쳐 있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하늘은 맑았다. 설레는 마음 다잡으며 부지런히 짐을 꾸려 해 저물기 전 집을 나서자 바람이 불었다. 점점 세차게 불어왔다. 집 앞 공원에 있는 화단의 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며 몸을 뒤집고 있었다. 냇가의 작은 물고기들이 은빛 배를 뒤집으며 유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출렁이며 부서지는 은빛 물결 같기도 했다.

지리산 깊은 숲의 풀들도 이렇게 바람에 쓸리고 있을까.

이 땅 한반도를 품어 있게 한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크고 깊은 산 지리산의 나무들도 이렇게 흔들리고 있을까. 숲도 이렇게 흔들리고 있을까. 그 흔들림마다 오랜 세월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어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들이 묻어나고 있을까.

오후부터 불어온 바람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차는 바람 사이를 지나 낮게 드리운 하늘 아래 저 남도를 향하고 있었다. 하늘이 낮아진 탓이었을까. 지리산으로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낯설게 다가왔다. 몇 차례 다녀 익숙한 길이었지만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5월과는 어울리지 않는 유달리 검고 낮게 드리운 하늘도 그러했고 간간이 창틈으로 들어오는 한 여름처럼 무거운 바람도 그러했다. 지나던 고속도로의 익숙한 풍경들도 낯선 땅을 지나는 듯 생경했고 밥을 먹을 때에도 설익은 생쌀을 씹는 듯 입 안이 서걱거렸다.

지리산으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이 정체모를 낯섦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 이럴까. 이 낯섦은 무엇 때문일까. 어디서 온 것일까.
▲ 여명, 그리고 지리산 ⓒ이호상

내가 이 낯섦의 정체를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리산에 다다랐을 때 나는 아주 분명하게 이 낯섦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백두대간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지난 오십 여 년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괴감 때문이었다. 이 땅 이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온 지난 오십 여 년의 세월 동안 그 이름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우리 땅 우리 산 백두대간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지어준 소백산맥의 한 쪽 끝에 있는 지리산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다.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이 민족 5천년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수 천 년 몸 기대어 살아 온 민초들의 삶을 말하고, 공동체와 삶에 대해 말하고, 산과 숲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품어 있게 한 백두대간을 철저히 잃어버린 채 살아왔던 지난 세월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나는 참으로 백두대간을 걸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백두대간이 나를 받아들여줄까.
나는 백두대간으로 찾아들며 설렘에 앞서 낯설고 두려웠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극일(克日)에 대해 수도 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어떻게 아직도 가르치고 배우고 있을까.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지질학자였던 고토 분지로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명을 받아 14개월의 연구 조사 끝에 1903년 '조선 산악론'을 발표했다. 이 연구 조사의 목적은 효과적인 자원 침탈이었다. 그는 이 목적에 맞게 이 땅의 산악체계를 지질을 중심으로 가르고 쪼개었다. 그 결과 이 땅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던 인문지리학적 관점은 폐기되었다. 1대간(백두대간), 1정간(장백정간), 13정맥(낙남정맥,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으로 나뉘어져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되었던 한국의 산하는 모든 지형적 연관성을 상실한 채 찢겨지고 나뉘어 졌다. 한 줄기 속에서 하나로 흐르던 산들이 모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개의 산으로 쪼개졌다. 백두대간조차도 그 의미를 잃고 아무런 지형적 연관성이 없는 여러 개의 산맥들로 나뉘어 졌다. 이 땅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외우느라 고생하였던 산맥들이 바로 그것이다. 고토 분지로에 의해 나뉘고 붙여진 이름들이다.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낭림산맥,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묘향산맥, 언진산맥, 멸악산맥, 마식령산맥, 광주산맥, 태백산맥, 차령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 등이 그것들이다. 고토 분지로가 '조선 산악론'을 발표한지 백 년이 훨씬 지나고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 된지 53년이 지난 2008년 8월인 지금도 이 땅의 학생들은 일제총독부에 의해 만들어진 산맥의 이름들을 그대로 배우고 있다.
▲ 능선에 서다. ⓒ이호상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슬픈 일이다.
이런 부끄러움과 자괴감이었으리라.
결코 낯설 수 없는 우리 땅 우리 산을 가면서도 이토록 낯선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 말이다.

차는 깊어진 어둠 속으로 익숙하게 나아갔다. 차창 밤으로 드리운 깊어진 밤하늘에 보름달이 보였다. 유달리 창백해 보였다. 구름과 바람 사이로 간간이 별이 빛나고 있었다. 이미 어둠 깃든 차 안은 조용했다.

모두들 잠들었거나 나처럼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있으리라.

지리산이 보였다. 어둠 속의 지리산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맞아주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고 넓어 보였다. 그러나 유년 시절 헤어졌던 어머니를 수 십 년이 지난 후 만날 때와 같은 낯섦과 서먹함도 있었다.

이런 설렘과 낯섦의 감정에 동시에 젖어 들 수 있다니...

차가 지리산의 숙소에 도착하였을 때 지리산의 깊은 골만큼이나 밤은 깊어 있었다. 산행에 대한 가벼운 점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산을 지나는 바람에 창이 흔들리고 있었다.
산이 깊은 탓에 바람 또한 깊은 소리를 냈다.

바람 때문인지 산은 밤 내내 '웅~ 우웅~' 울었고 숲은 '쏴아~ 쏴아~' 흔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깊은 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이 땅에서 쓰러져 간 수많은 생명들의 아우성 같기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 30분부터 산행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 땅을 품어 있게 한 백두대간을 향한 첫발걸음을 떼는 새벽이었다. 백두대간 1,625km 를 향해 첫 발을 떼는 날이었다. 남쪽 구간 도상거리 약 690km, 실제거리 약 1,000km를 향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맡기는 첫 날이었다.

산길이 아니라 마음 길을 따라 걸어야만 하는 산행을 떠나는 첫새벽이었다.
마음 길을 따라 백두대간으로 들어가는 첫 날이었다.
마음 길을 따라 걸으면 백두대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그 오랜 세월 품고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의 울림을 느낄 수 있을까.
그 밤 산도 설레었든지 밤 내내 요란했다. 창도 더불어 덜컹거렸다.
낮게 드리운 검은 하늘과 잠 못 이룬 밤 사이로 별은 총총했다.
원인 모를 그리움 가득한 밤이었다.

필자 이메일 : from-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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