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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때만 되면 저희들은 뜹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8/06] 88올림픽 개막곡 '손에 손 잡고' 부른 그룹 코리아나의 이승규씨와 홍화자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지금 들으시는 곡 기억하시는 분들 많을 겁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 울려 퍼지며 큰 인기를 모았던 올림픽 주제곡, 그룹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인데요. 올림픽을 떠올릴 때 메달의 순간만큼이나 잊혀 지지 않는 것, 바로 올림픽 주제가의 선율입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그룹 코리아나의 이승규씨와 홍화자씨를 초대해 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근황과 올림픽 역사상 가장 큰 인기를 모으며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던 '손에 손잡고' 그 감동의 순간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박인규 : 안녕하세요?

코리아나 : 안녕하세요??

박인규 : 반갑습니다.

이승규, 홍화자 : 네. 반갑습니다.

박인규 : 벌써 20년이 흘렀네요.

홍화자 : 참, 세월 빠르죠?

▲ ⓒ프레시안

박인규 :
아무리 들어도 그 때 감격이 떠오르는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홍화자씨는 지금 노래 들으니까 그 때 감격이 다시 떠오르시나요?

홍화자 : 예, 이 노래는 언제든 들을 때마다 참 가슴이 뭉클하면서 그 때를 회상하게 합니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부르던 그 때 당시.

박인규 : 이승규씨는 어떻십니까? 마찬가지시겠지만.

이승규: 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아직도 마음에서 콩닥콩닥 합니다.

박인규 : 코리아나가 원래 네 분이시죠?

이승규, 홍화자 : 네.

박인규 : 네 분인데 오늘 지금 바쁘셔서 두 분만 나오셨는데. 일부에서는 코리아나가 요즘 활동을 하나? 해체 된 것 아닌가? 그러시는 분이 있는데. 코리아나도 활동을 가끔 하십니까?

이승규: 예, 큰 무대하고 올림픽 가수가 되다보니까 4년마다 저희들은 뜹니다.

박인규 : 올림픽이 대목이시군요.

이승규, 홍화자 : 네. 하하하.

박인규 : 최근에 그럼 활동하신 건 언제? 공연하신 건 언제 하셨습니까?

홍화자 : 저는 화성에 세게 요트 대회 때. 6월 달에 했죠. 그리고 앞으로는 고성에서 세계 잼버리 거기에서 공연 할 거고요. 제가 주로 활동하는 곳은 봉사단체, 사랑을 나누는 감각 동인회라는 봉사단체에서 근 한 10년 동안 봉사활동을 했었어요.

박인규 : 홍화자씨께서는 솔로로도 활동을 하고 계시고. 그룹 코리아나가 다 같이 뭉쳐서 한 큰 공연은 최근에 것은 언제입니까?

이승규: 2006년 베이징 올림픽, 8월8일 날 카운트다운 때 저희가 단독 초대 받아서…….

박인규 : 그 때도 그때도 '손에 손잡고'를 부르셨겠네요?

이승규: 그렇죠. 거기에 플러스 '우리는 하나'라는 'WE ARE ONE' 이라는 노래를 저희가 선사하고 왔습니다.

박인규 : 진짜 올림픽이 대목은 대목이신가 보네요.

박인규 : 오늘 나오신 분이 이승규씨 형님이시고 그 다음에 홍화자씨가 형수님 되시고 이용규씨하고 이애숙씨가 또 계시죠? 형제분?

이승규: 이용규는 제 남동생, 이애숙은 여동생.

박인규 :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승규: 남동생은 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큰 사업이라면 구체적으로 밝히시기…….

이승규: 뭐, 부엌가수 유명브랜드 사업하고. 그 다음에 컨설팅하고.

박인규 : 사업가시군요. 이애숙씨는 뭐하고 계십니까?

이승규: 제 여동생은 교회 활동하고 그 쪽에 선교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박인규 : 가끔 만나실 기회가 있으신가요? 네 분이?

이승규: 제가 모임을 하나 가졌습니다. 골프 모임을 해갖고.

박인규 : 아, 그러세요?

홍화자 : 하하. 그것도 1년에 한 번.

박인규 : 이승규씨는 골프 잘 치셔서 티칭 프로 자격증도 따셨다고 그러던데?

이승규: 네, 제가 96년에 느지막하게 골프를 잡아가지고 한 번 시도를 해봤는데 전 도박을 했어요. 그래서 3개월 만에 80을 쳤어요. 이거 내가 뭔가 좀 있겠구나 싶어서 2003년에 프로증 땄습니다.

박인규 : 팔방미인이란 말이 있던데 노래도 잘하시고 골프도 잘하시고 그러네요.

이승규: 하, 예.

박인규 : 코리아나를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저희가 알기론 원래 유럽에서 아리랑 싱어즈로 활동을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코리아나라는 그룹이 만들어졌죠?

이승규: 79년도에 저희가 아리랑 싱어즈 때 'I LOVE YOU, YOU LOVE ME', 'DARK EYES'로 히트를 했는데. 라디오 방송국에서 발음이 하기가 힘들다. 아리랑이라고 했다, 애리랑으로 했다. 아르젠티나 싱어즈로 했다. 그래서 82년도 때 생각다 못해 그룹 이름을 코리아나로 하면 어떠냐? 한국인. 라틴어로 코리아나, 코리아노 이러잖아요. 코리아나로 82년도에 저희가 만들어가지고 앨범도 냈습니다.

박인규 : '손에 손잡고'라는 노래는 지금 들어봐도 참 노랫말도 그렇고 멜로디도 참 와 닿는데. 이게 아마 외국분이 작곡하신 거죠?

홍화자 : 네, 이태리 사람인데요. 미국에서 사시는 분인데. 아카데미 주제가 상을 플래시 댄스, 탑건, 미드 나잇 익스프레스를 작곡하신 분인데요. Giorgio Moroder 그 분이 맡으셨어요.

박인규 : 이 분이 이 노래를 작곡하기 위해서 직접 그 당시 한국까지 오셨다면서요?

홍화자 : 네, 코리아나 단장님 말씀을 들어보면 새벽에 남산을 한번 올라가 보자. 한국의 해 뜨는 장면을 보고 싶다. 그래서 같이 갔데요. 그래서 해 뜨는 장면을 딱 보고. 그 사람이 동양적인 감성을 가졌어요. 그래서 처음에 그 빠밤~ 하고 나오는 것이 해 뜨는 장면이에요.

박인규 : 그렇군요. 그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런 듯 하네요.

홍화자 : 예, 그렇죠?

박인규 : 이번 베이징 올림픽 주제가도 그 분이 작곡했다는 말이 있는 것 같던데? 맞습니까?

이승규: 네.

박인규 : 아직 발표는 안했죠?

이승규: 발표가 됐겠죠. 그런데 저희의 노래는 스위스 전 유럽에서 히트를 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차원이……. 베이징에서 저희들을 능가하지 못할 겁니다.

박인규 : 아, 그 당시에는 이미 유럽에서 히트하고 나서?

홍화자 : 예, 예. 다 히트하고 나서.

박인규 : 사실 올림픽은 4년 만에 한 번씩 전 세계 한 200개 국가에서 모여서 하는 그야말로 지구인의 축제인데 그 주제가를 부른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영광이거든요. 지금까지 올림픽도 스물 몇 번 밖에 안했고. 코리아나가 어떻게 해서 올림픽 주제곡을 부르게 된 거에요?

이승규: 그것은 우리 형님의 힘이 컸죠. 우리 형님이 올림픽 조직위원 위원장님을 만나게 됐고 위원장이 전 세계에 우리나라를 좀 알렸으면 좋겠다. 동기는 그런 식으로 시작이 됐는데. 전 우리 폴리그램 인터내셔널 회사에서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되지도 않았고.

박인규 : 형님이란 분이 지금 홍화자씨 남편 되시는 분?

홍화자 : 네, 단장. 큰형님.

박인규 :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홍화자 : 김영일.

박인규 : 돌아가셨다고?

홍화자 : 네. 7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심장마비로.

박인규 : 살아계셨으면 굉장히 좀……. 좋아하셨을 텐데.

이승규: 저하고 아침에 통화도 했었어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박인규 : 88년 당시로 한 번 돌아가 보죠. 그 때 잠실 운동장에서 부르실 때의 감격, 생각나십니까?

이승규: 아유, 정신없었습니다.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요. 저희들은 4분 10초, 12초 노래 하는데. 제일 마지막에 나오잖아요. 지루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멍해 갖고. 솔직히 연예인은 감동은 나중에 받습니다.

박인규 : 그 때는 아무 생각이 없는 거군요?

이승규: 아무 생각이 없고 어떻게 하면 잘 하느냐. 잘 됐느냐.

박인규 : 그럼 5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실제 노래를 부른 것은 몇 시였던가는 기억이 나십니까?

이승규, 홍화자 : 기억이……. 오후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튼 누가 지금 나올 때 됐다 그러면 그때서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나갔었어요.

박인규 :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 보면 패션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선글라스 끼시고 옷도 약간 심플하면서도.

이승규: 저희 옷이 까만색에다가 흰 바탕이잖아요. 그게 한 8개국 나라를 상징을 해서 만든 옷이에요.

박인규 : 어떻게 해서 8개국이 되죠?

이승규: 제 옷만 해도 두 나라 세 나라가 섞여 있어요. 바지만 해도 터키, 상의에는 오스트리아. 형수님은…….

홍화자 : 유럽, 스페인, 프랑스, 시누는 또 동양.

박인규 : 각각 입은 것 마다 다르게 한 거군요.

이승규: 한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이 한 2-3나라의 작품들이 다 들어가 있던 옷이에요.

박인규 : 그 디자인 하신 분이 꽤 유명한 디자이너라고 들었습니다.

▲ ⓒ프레시안

홍화자 :
조르지오 알마니라고요. 그 때 당시 세계적이었답니다. 사실은 헤어스타일, 화장, 구두, 모든 것을 안경까지 조르지오 알마니였습니다. 그래서 밀라노까지 갔었어요. 저희들이.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사진을 다 찍어서 거기에 세계 각국의 그걸 옷에다 다 넣은 거예요.

박인규 : 어떻게 보면 일생에 다시없는 호사를 하신 거네요. 세게 최고의 디자이너가 딱 한 분만을 위해서 만든 옷을 입으시고.

이승규: 알마니가 우리 헤어스타일을 바꾸어 놓았는데. 그걸로 제가 유지하지 않습니까.

박인규 : 지금 헤어스타일이 그 때 헤어스타일입니까?

이승규: 네. 그 당시 때에.

박인규 : 굉장히 멋있네요. TV였으면 청취자들이 보실 텐데.
박인규 : 아까 말씀하실 때 '손에 손잡고'가 이미 유럽에서 히트를 쳤다고 그러셨어요?

이승규: 네, 그 때 당시의 마이클 잭슨과 휘트니 휴스톤은 차트 랭킹 13위, 저희는 차트 랭킹 1위.

박인규 : 아……. 그럼 '손에 손잡고'를 언제부터 부르기 시작한 거예요? 88년도 올림픽은 9월인데?

이승규: 88년도……. 6개월 전부터 해 갖고. 히트가 전 독일, 전 유럽을 전부 쓸었죠.

박인규 : 혹시 음반판매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코리아나 : 지금까지 판매량은 1600만장으로 돼 있어요. 여기 보면 CD, LP, 싱글 해갖고.

박인규 : 엄청나네요. 1600만장이면은 저작권료라고 그럽니까? 상당히 많이 버셨을 것 같은데요?

이승규: 많이 벌었는데요. 연예인이 첫째, 유럽에서 앨범을 제작을 할 수 있는 그룹은 솔직히 하늘에서 별 따기거든요. 그 당시 때 저희를 계약을 해서 올림픽을 치를 수 있게 CD 앨범을 만들어 준 폴리그램 인터내셔널이 저희들은 너무 고맙죠. 돈하고는 액수를 얘기 할 수 가 없죠.

박인규 : 올림픽 때마다 주제가가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서울 올림픽 때 불려진 '손에 손잡고'가 가장 큰 히트곡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나요?

이승규: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역사에 없으니까요.

박인규 : 1600만장. 와, 대단하네요. 어떤 언론 보도를 보니까 코리아나를 스위스에 있는 사람들은 스위스 가수다.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얘기예요?

홍화자 : 우리의 코리아나 이랬었어요. 그 분들이. 우리가 거기서 살았고. 거기에 모든 매니저도 거기에 있었고. 스위스 친구들이 많아요, 또. 아침, 저녁 되면 그 때 당시에 워낙 히트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다 좋아하시고. 애기들이, 애들이 문을 두드리면서 나 사인해 달라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올림픽 때 저희들이 그 노래를 하기로 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코리아나라고 그랬었어요.

박인규 : 올림픽 때 '손에 손잡고'의 히트의 여세, 그 여세를 몰아서 계속 유럽에서 활동을 했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요?

이승규:: 그 때 당시의 스포츠 곡은 저희들이 다 쓸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되는 연도 수마다 봅슬레이나 윈터 스포츠죠. 거기도 주제가도 불렀고. 그런데 역시 'HAND IN HAND'를 꺾지를 못하더군요.

박인규 : '손에 손잡고'가 최고였다?

이승규, 홍화자 : 예, 예.

박인규 : 그 뒤에도 제가 알기에는 우리나라가 한일 월드컵을 유치할 때도 활동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승규: 그때도 저희가 노래를 만들어서 유럽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홍화자 : 유로파 컵, 거기에 운동장에서 공연을 했었어요.

박인규 : 그때가 어떻게 보면 그룹 코리아나로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활동하신 거라고 봐야겠네요.

이승규: 저희들 그룹은 활동을 국내 연예인같이 할 수가 없어요.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까, 움직이기가 힘들잖아요.

박인규 : 네 분이시면 사실 크다고는…….

이승규: 아니에요. 백 밴드가 10명에다가, 저희는 특히 자존심이 강해서 한 나라 국적을 가진 밴드를 안 씁니다.

박인규 : 인터내셔널 하네요.

이승규: 8, 9개국. 오죽하면 그때 당시에 공산국가였었죠, 유고슬로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까지.

박인규 : 20년이 되다 보니까 코리아나를 아시는 분들은 20년을 기념해서 코리아나가 뭉쳐서 손에 손잡고를 비롯해서 그 뒤에 나온 노래들, 이런 것을 공연했으면 좋겠다, 이런 팬들이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뭉쳐서 가까운 시일 내에 공연할 계획은 없으십니까?

이승규: 많죠. 계기가 되면 전국을 무료로 할 마음이 있습니다.

박인규 : 형제분이 합치시면 코리아나가 한번 뭉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특히, 올림픽.

이승규: 언제든지 뭉치죠.

홍화자 : 언제든지 저희들은 가족이기 때문에.

이승규: 개개인이 사업을 하다보니까. 남자들은 사업 쪽으로. 저는 스포츠 계통, 건강식품 쪽으로 있고, 형수님은 노래를 하시고, 여동생도 노래를 하고.

박인규 : 어쨌든 88올림픽 20주년을 맞아서 올해 안에 한번 뭉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기대를 해보겠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88서울올림픽 당시 올림픽 주제곡인 '손에 손잡고'를 부른 그룹 코리아나와 함께 얘기 들어보고 있는데요, 여기서 코리아나의 다른 곡 '그날은' 들어보시겠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88서울올림픽 당시 올림픽 주제곡인 '손에 손잡고'를 부른 그룹 코리아나의 이승규 씨와 홍화자 씨를 초대해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던 '손에 손잡고', 그 감동의 순간에 대해 얘기 나누고 있습니다. 방금 코리아나의 '그날은'이란 노래를 들었는데요, 이 노래는 언제, 어떤 행사에서 부른 겁니까?

이승규: 아닙니다. 이게 대전 엑스포 주제가였습니다.

박인규 : 93년도요. 큰 대회나 행사의 주제곡을 많이 부르시네요. 그 당시에는 또 어떻게 해서 코리아나가 이 노래를 부르게 된 거죠?

이승규: 그 당시에는 마찬가지로 대전 엑스포가 국내 엑스포가 아니라 전 세계 엑스포였잖아요.

박인규 : 그렇죠. 굉장히 큰.

이승규: 그래서 또다시 저희가 부르게 된 계기가 됐죠.

박인규 : 큰 행사의 주제곡을 전부 다 코리아나가 독식을 해서 다른 가수들이 별로 안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홍화자 : 그래서 2002년에는 저희가 양보했어요.

박인규 : 아, 그러면 2002년에도 코리아나 보고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었어요?

홍화자 : 네, 그런데 이번만큼은 후배들에게 양보하자.

이승규 : 저희는 그때 당시 홍보만 했죠.

박인규 : 코리아나의 역사에 관해서 얘기해 보죠. 이승규 씨 같은 경우는 5살부터 연예활동을 하셨다고 해요?

이승규: 제가 5살 때부터 저희 부모님 따라서 탭 댄스를 배웠어요. 그래서 6개월 만에 전국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박인규 : 6개월 만에요? 상당히 재주가 많으시네요.

이승규: 그래서 그 계기로 서울에서 구라파 보내는 대회가 있었는데, 그 대회를 치르러 올라왔다가 바로 4·19를 맞았습니다. 그때가 60년도 아닙니까.

박인규 : 그럼, 그때 못 나가신 겁니까?

이승규 : 못 가고. 그때 미8군에 갔습니다.

박인규 : 4·19 피해자도 있네요. 어머님께서 시키셨다고 했는데,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이승규: 어머님은 성악을 하셨어요. 우에노 대학 나오시고. 유도가 2단이시고.

홍화자 : 아주 못하시는 게 없으셨어요. 팔방미인이셨어요.

박인규 : 집안이 재주가 많은 유전자를 타고나신 모양이네요.

이승규 : 저희 아버지 쪽은 전주 이 씨니까, 굉장히 엄격하시고, 어머님이 굉장히 저걸 많이 받으셨죠. 옛날에는 음악을 가르치면 딴따라 한다고. 딴따라 한다고 해서 그걸 뿌리치시고 저희를 이끌어주신 장본인이 어머님이세요.

박인규 : 아직 생존해 계신가요?

▲ ⓒ프레시안

이승규
: 아니요. 일찍 돌아가셨어요. 68년에 태국에서 돌아가셨어요.

박인규 : 홍화자 씨까지 포함해서 활동하기 시작한 건 언제입니까?

홍화자 : 65년부터요.

박인규 : 그때도 유럽에서 활동을 하신 겁니까?

홍화자 : 아니오. 그때는 동남아시아, 중동을 같이.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이제 제가 그 뒤치다꺼리를 맡았는데요, 의상을 만든다든가.

박인규 : 남편 되시는 분이 단장을 하시고.

홍화자 : 네. 그래서 전 가족이 뭉쳐서 같이 쭉 올림픽 때까지 왔었는데…….

박인규 : 동남아시아, 중동을 거쳐서 유럽으로 진출하신 거네요. 유럽으로 가신 건 언제였나요?

이승규 : 79년도요.

박인규 : 그 당시에 사실은 월남 같은 데 위문공연을 가지만, 실제로 유럽 바닥으로 가서 활동을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승규: 그 계기가요, 62년도에 저희가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음악회가 있었어요. 음악 경연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 너희들 빨리 나가라, 절대 성공하기 전에는 들어오지 마라. 그래서 저희가 62년도에 일본으로 진출했습니다.

박인규 : 일본으로 동남아로 중동으로 해서. 어떻게 보면 요즘 우리가 세계화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미 한 40년 전에 세계화를 시도하신 거군요.

이승규: 네. 그래서 지금도 전 국 말을 합니다.

박인규 : 그 당시에 외국 나가서 활동한다는 게, 70년대에,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이승규: 비자 때문에 힘들었죠. 여권. 한국이란 나라를 중동 같은 데는 엄격히 몰라요. 특히 또, Republic of Korea라고 하면, Democratic Korea에서 왔다고 했는데, 어떻게 Republic은 들어 오냐. 그런데 이게 참 계기가 좋았어요. 호텔 자체가 국왕이 경영하는 호텔이라서.

박인규 : 어느 호텔?

이승규: 그게 오만 무스카시라고.

홍화자 : 한국 사람으로 처음 갔던 나라예요.

이승규: 외교를 저희가 먼저 한 겁니다. 나중에 보내서 대사님이 오셨는데, 저희가 거기서 먼저 공연을 하고 있었죠.

박인규 : 거의 전 세계를 누비셨군요. 유럽에서는 주로 어느 나라에서 활동하셨습니까?

이승규: 여러 나라를 다녔으니까요. 스위스를 본고지로 해서 전 나라를 다.

박인규 : 언론보도를 보니까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해서 한복 같은 것도 입으시고, 태극기도.

홍화자 : 저희들은 노래만 하는 게 아니라 쇼를 다 했기 때문에 시동생들도 한국적인 장구도 치고, 상모도 돌리고, 우리는 부채춤도 하고.

박인규 : 그래서 이름을 아리랑 싱어즈라고 했군요.

홍화자 : 네. 그래서 또 한국을 알리기 위해서 태극기를 스펑클을 제가 다 놨어요. 그걸 저희 시어머니한테 옷 만드는 걸, 그때 당시 시집와서 다 배웠어요. 그래서 스펑클한 태극기를 딱 걸어놓고, 의상도 제가 손수 다 만들어서 전 가족이, 저만 잘 한 게 아니고, 다 또 음악을 열심히 하고 해서.

박인규 : 활동을 지금도 계속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네요.

이승규: 원래 형수님 가족도 음악 가족이에요. 오빠 분이 아리랑 싱어즈 기타 선생님이셨어요.

박인규 : 음악 가족과 음악 가족이 합치셨군요.

홍화자 : 그래서 알게 됐어요, 사실은. 저희 오빠가.

박인규 : 가족이 이렇게 음악을 하시면 항상 모일 수 있고 서로 마음이 통해서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어렵거나 그런 점은 없었습니까?

이승규: 많죠. 그런데 가족이니까.

박인규 : 가족이니까 싸우다가도 화해하고. 코리아나는 아직 있는 거죠?

홍화자 : 네. 사람들은 자꾸 해체했다는데, 활동이 좀 뜸했을 뿐이지 저희 가족은 절대 해체되지 않았어요.

박인규 : 어머님이 말씀 하셔서 활동을 하셨고, 지금 2세 분들도 다 크셨을 것 같은데, 2세 분들도 연예계에서 활동하신다고요?

이승규: 저는 딸이 CF모델 이성민인데요.

박인규 : 제가 봤는데 굉장히 미모더라고요. 홍화자 씨 2세들도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홍화자 : 저는 아들만 둘인데요, 큰아들은 학교 음악 교사로 있고, 작은 아들은 KBS 윤도현 밴드는 아니지만, KBS에 속해있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고, 이문세 공연에 총 디렉터로 음악을 편곡을 하고 있더라고요. 와서 보니까.

박인규 : 계속 예술적인 재능이 대를 이어서 물려가고 있군요. 서울올림픽 20주년을 맞이해서 많은 분들이 코리아나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인사,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나머지 말씀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화자 : 올림픽이 지난 지 20년이 지났는데요,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금 공연 계획이 들어오고 있는데요, 저희들은 그거 한번 생각해 볼 거고요, 앞으로도 콘서트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희 코리아나를 사랑해주신 온 국민들에게 정말 감사를 드리고요, 코리아나 그룹보다 이 노래 자체를 저희들이 불렀다는 게 저희들은 자랑스럽고요. 이 노래가 국민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저희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가서 노래를 해 드릴 거고요, 앞으로 여러분 건강하시고, 희망을 가지고 사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이승규: 저는 끝으로 이번에 20주년을 맞이하여 베이징 올림픽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될까, 손에 손잡고를 깰 수 있을까, 저희들은 솔직히 코리아나를 좀 놔 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저희들 활동하기가 편하겠다. 그리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팬들이 항상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까 형수님이 말씀 하셨듯이 계획은 갖고 있으니까, 항상 지켜봐주시고 사랑해주십쇼.

박인규 : 각자 하시는 일들에 있어서 계속 잘 되시고, 국민들이 코리아나의 공연을 원하니까 가까운 시일 내에 공연을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이승규, 홍화자 : 고맙습니다.

박인규 :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88서울올림픽 당시 올림픽 주제곡인 '손에 손잡고'를 부른 그룹 코리아나의 이승규 씨와 홍화자 씨를 초대해,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근황과 올림픽 역사상 가장 큰 인기를 모으며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던 '손에 손잡고' 그 감동의 순간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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