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미국 예일대 음대 함신익 교숩니다. 함신익 교수는 1957년 서울 출생으로 건국대 졸업 후 1984년 단돈 250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라이스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이스트만 음악 학교에서 지휘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스트만 재학 당시 '깁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1991년 폴란드의 피텔버그 국제 지휘 대회에서 입상하며 프로 지휘자로 데뷔했습니다. 미국의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갈 차세대 지휘자 5인에 꼽히기도 한 그는 1995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예일대 교수가 돼 2004년부터 대학원생 중심의 예일 필하모니아 지휘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미국 애벌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그린베이 교향악단·투스칼루사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로 일했고 한국에서는 대전 시립 교향악단 예술 감독 겸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으며, 92년부터 KBS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바쁘신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고국 방문이 얼마만이시죠?
함신익 : 2006년 대전을 떠난 이후 거의 2년 돼가네요.
박인규 : 2년 만에 고국 무대에 서니 어떠시던가요?
함신익 : 고국 무대는 항상 흥분됩니다. 제게 가장 두려운 것이기도 하고, 청중들 반응이나 무대에서 느끼는 화학성분이 다른 데와는 다릅니다.
박인규 : 피가 끓는 데가 있나보죠. 이번 연주회에서는 굉장히 대작들만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곡들입니까?
함신익 : 규모가 굉장히 큰 곡들을 했죠. 맨 처음은 한국 애국가를 미국 작곡가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편곡했어요. 멜로디는 그대로, 편곡을 현대 감각에 맞게 만들어 봤고, 번스타인의 교향적 무곡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 나오는 규모가 큰 곡을 했고,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한국에서는. 중국에서는 생상스의 첼로협주곡을 했습니다.
박인규 : 중국에도 갔다오셨어요,.
함신익 : 중국에는 이번 올림픽 행사의 일환으로 문화올림픽이라고 하죠. 거기 중국에 엄청나게 큰 홀이 새로 지어졌어요. 올림픽을 위해서 새로 만들었는데 인민회의 대회의장 뒤에 얼마나 멋있습니까...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인민회의 대회의장 뒤에 가장 현대적 문화적 건물이 지어졌는데, 거기 오프닝 콘서트도 저희가 했고, 그리고 자금성 안에 있는 멋진 홀에서도 연주했고. 25일에는 상하이의 대극장 홀이 너무 좋아요. 거기서도 연주를 마치고 왔습니다.
박인규 : 올림픽을 위해 새로 만든 극장에서 오프닝 공연을 했다면 굉장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예일 필하모니아는 학생들로 구성된 거라고 해요. 어떤 데인지 소개해 주시죠
함신익 : 저희 예일대학원 오케스트라는 예일 필하모니아라고 부르는데, 이 오케스트라는 학부를 졸업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모인 대학원 학생들로 구성됐고 운영도 프로페셔널하게 하공 있어요. 연습횟수를 다섯 번 하고 연주하는, 학부 같으면 연습횟수를 더 늘려서 해야 되지만 우리가 미국이나 한국 유럽의 프로 오케스트라를 보면 네다섯 번 연습을 하고 연주합니다. 그래서 그런 형태로 운영하고, 연주가 많다는 소리죠. 단원들 자체도 곧 몇 개월 후면 프로로 나가야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트레이닝을 시키는 오케스트라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카네기홀, 보스톤, 이번에 한국 중국 연주를 하면서 여기 출신의 많은 단원들이 미국이나 유럽의 메이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진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박인규 : 학생들로 구성돼 있지만 사실 거의 프로 오케스트라나 다름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미국 음악학교 하면 줄리어드, 커티스가 많이 알려져 있는데 예일대 음대의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함신익 : 줄리어드, 커티스 훌륭한 학교입니다. 우리 대학원 애들 중에 거의 2,30%는 줄리어드, 커티스 출신인데, 예일의 다른 점은 첫째 줄리어드, 커티스, 제가 나온 이스트만 음악학교나 이런 데 보면 건물 하나에요. 그래서 공원이나 나무나 좋은 건물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건물 안에서 연습만 하고 배우기만 하는데, 예일에 오면 종합적인... 별도 볼 수 있고 초저녁엔 예쁜 달도 볼 수 있고 체육관에 가서 다른 과 학생들과 농구도 할 수 있고 골프장 축구장 수영장 같은 데서 어울려서 모든 걸 배울 수 있는 종합적인 학교죠. 그렇기 때문에 가령 내가 우주학을 배우고 싶다. 바로 옆 건물에 가면 우주학을 공부할 수 있고, 다양한 공부를 함으로써 결국 음악은 음악으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총체적인 문학, 예술, 미술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음악이 잘 되는데 그런 면에서 예일이 적당합니다.
박인규 : 음악에도 인문학적 소양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걸 쌓기에 굉장히 유리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함신익 : 그런 데 취향이 있는 학생들이 많이 모이죠.
박인규 : 함신익 교수 같은 경우 오케스트라의 부흥사다, 이래가지고 굉장히 많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신 걸로 아는데 예일 필하모니아처럼 곧 프로 연주가가 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이끌어가는 건 지금까지의 오케스트라 지휘와는 색다른 경험일 것 같은데요
함신익 : 다릅니다. 프로 오케스트라들은 짧은 시간 안에 흥행에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요. 그런데 대학원 오케스트라는 얼마나 이들에게 많은 걸 배워주느냐가 중요합니다. 교육적 측면이 있어서 훈련이나 레퍼토리나 운영방법에서 프로와 다릅니다. 그래서 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만족할 만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이 나가서 프로에 가서 연주할 때 내가 해본 곡인데... 그 정도로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커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박인규 : 교수님 겸 지휘자신데, 그 전에 그냥 지휘자 하실 때보다 만족하십니까?
함신익 : 따로 구분이 없어요. 사실 지휘자인 경우는 선생 역할이 항상 포함돼 있기 때문에 제가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든지 자그마한 다코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더라도 지휘자의 사명 안에는 선생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다만 다른 건 학생들을 다룰 때는 좀 더 사랑이 더 필요하죠. 용서, 사랑, 이해가 좀 더 필요합니다.
박인규 : 이번에 책을 내셨어요. 예일대 명물 교수 함토벤. 보니까 머리도 약간 곱슬이시고 베토벤과 비슷한 것 같은데, 예전에도 비슷한 책이 나왔었죠? 다락방의 베토벤
함신익 : 네. 이게 제가 너무 교만하게 책을 썼죠. 책을 제가 쓰고 싶지 않았을 때 썼고 너무 저를 가리고 싶은 게 많았고, 부끄러운 건 나타내고 싶지 않았고 잘난 것만 보여주고 싶을 때 부탁을 받아서 쓴 책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그걸 보니까 다시 읽어보니 너무 부끄러운 게 많아서 다 고쳐서 저의 부끄러운 면을 더 많이 나타내는 책으로 바뀌었어요
박인규 : 어떻습니까. 함토벤이란 별명은 언제 생기신 거예요?
함신익 : 제가 대학교 때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제가 그때부터 특이했던 것 같아요. 제 이름 함신익을 안 알려주고 칠판에 함토벤이라고 지었어요.
박인규 : 스스로 베토벤을 지향하신 거군요.
함신익 : 교생실습을 하는 중간에 학습일지를 적는데 학생들이, 거기다가 음악 담당교사 함토벤이라고 썼는데 교감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라고요. 함선생, 이름이 함토벤입니까? 학습일지에 함토벤이라고 써있는데. 그 다음부터 학교에서 공식적이라고 함토벤으로 불려졌고 요즘도 제가 사는 코네티컷이나 뉴저지에서는 다들 저를 베토벤 아저씨라고 불러요. 그래서 제가 베토벤의 그림자를 밟을 자격도 없지만 베토벤의 열정, 음악에 대한 끊임없는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본보기해서 함토벤이라고 불리는 것이 싫지 않다고 해서 이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박인규 : 혹시 예일대 학생들도 함교수를 함토벤이라고 부릅니까?
함신익 : 거기서는 미스터 베토벤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베토벤을 가장 사랑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니까
박인규 : 또 하나의 별명이 오케스트라 부흥사라는 별명을 갖고 계신데, 그건 말하자면 죽어가는 오케스트라를 되살려냈다는 뜻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불리시게 된 겁니까?
함신익 : 저는 맨 처음 음악도 늦게 시작했고 스타트한 순간도 남들보다 늦었고 가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제로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제로까지 내 능력을 보여주고 그 다음 같이 한 번 뛰어보자. 항상 그랬어요. 미국 오케스트라에 응모할 때나 미국 대학원에 진학할 때나 항상 남들보다 더 많은걸 보여줘야 된다는 일종의 압박, 사명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커버하는 과정 중에서 남들이 볼 때 평범하지는 않고. 살려내는, 예를 들어 애벌린에서는 석유시대가 지난 다음 고가시대가 지난 다음 95년에 오케스트라가 다 죽었어요. 동네도 다 죽었고. 다운타운의 불이 다 꺼졌어요 초저녁에. 그걸 살려낸 방법이 그 지역 다운타운의 레스토랑들, 서점들을 오케스트라와 연계해서 모든 걸 살려내면서 10년간 오케스트라가 흑자로 돌아서고 프로그램이 다양해지고 동네 레스토랑도 살고 오케스트라가 있는 곳은 꽉꽉 차고, 다양한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을 통해서 지역 경제도 살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줬죠
박인규 : 오케스트라가 그 지역의 분위기나 경기 경제를 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데 좀 궁금하네요.
함신익 : 미국에서는 문화의 활동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부수적인 게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것이 문화활동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문화가 약간 럭셔리...
박인규 : 여유있는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즐기는 정도로 생각하는데요.
함신익 : 여기서는 문화 없이는 없는, 노동자들도 문화가 곳은 안 갑니다. 직업에 대한 오퍼를 받았어도 절대 가지 않죠. 그래서 이 문화적인 걸 해결해주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겁니다.
박인규 : 멕시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시면서 춤곡인데 너무 분위기가 죽었다, 그래서 거기 계신 여자분과 왈츠를 추면서 기분이 나도록 하셨다고요 책 보니까
함신익 : 하이든의 교향곡 보면 3악장에 미뉴엣과 트리오가 나옵니다. 미뉴엣은 세박자의 곡이죠. 그런데 곡들을 너무 분위기가 안 나게 연주해요.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세박자구나. 그래서 다음날 다 일어서라고 했어요. 원래 다 앉아서 하지 않습니까, 일어서서 춤추는 것처럼 해보자. 한 명씩 왈츠를 같이 췄어요. 분위기가 살더라고요. 바로 이것이 하이든이 원했던 분위기다. 그 분위기를 알려주기 우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 연주 때는 그렇게 안 했습니다.
박인규 : 그런 느낌을 살려주는 거군요. 그게 지휘자의 역할이기도 하네요. 대전시향 계실 때는 축구복을 입고 올라가셨다고 하던데
함신익 : 대전시향은 아주 훌륭한 곡에 청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여러 가지 제약요소로 인해 오케스트라가 침체돼 있었어요. 문화적인 충격을 못 주고 거기 청중들이 서울에 와서 욕구를 해결하고 문화적인 걸 해결하고 가는 걸 발견하고, 이 수준 높은 분들에게 다양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주자. 그 분들 눈높이에 맞춰야지 우리가 우리대로 유지하면 안 되겠다. 이 분들에게 축구복을 입히는 연주, 주얼리가 유명하지 않았을 때 2001년도에 박정아씨가 와서 저랑 나레이션도 하고, 뽀뽀뽀의 뽀미누나 이런 분들을 데려다가 어린이음악회, 가족음악회부터 시작해서 거기 청중들을 수준을 높여주는 다양한 디스커버리 시리즈로 시작해서 훌륭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주는 과정에서 아주 필요했던 연주였죠.
박인규 :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지만 2006년도 대전 시향 떠나신 게 단원들과의 불화 때문에 안 좋았다는 식의 보도가 있었어요.
함신익 : 지휘자가 6년이면 많은 인간적인 단점들이 나타나죠. 제가 고칠 점도 나타나고, 더 잘 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를 위해서 너무 치중하다 보면 과정 중에 나오는 불찰이 있고, 계약이 만료된 거고 재계약을 안 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기회를 통해서 2년 동안 많은 걸 느꼈죠. 이런 점에서 내가 실수한 적이 있고 이런 인간적인 면에서 내가 더 성숙해져야겠구나. 지휘자가 지휘봉 끝에서 음악이 나오는 게 아니라 단원들을 감동시켜서 음악을 만들어야겠구나. 이런 최근 2년이 제게는 엄청난 배움의 세월이었습니다.
박인규 :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신 게 92년부터 17년째 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말하자면 지휘자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진짜 좀 더 깊이 느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함신익 : 92년부터는 프로 지휘자로 데뷔한 것이고 그 다음부터 지휘라는 관점이 많이 바뀐 거예요. 특히 그 전에는 나의 성공을 위해서 오케스트라의 완벽함을 위해서 지휘했는데 최근 2년 전부터는 남의 성공과 남의 완전함을 위해서 내가 도와주는 역할이구나. 그리고 그 안에 감동이 있도록 내 스스로 점점 낮아져야 되겠구나, 이런 걸 많이 느낍니다.
박인규 : 이건 좀 유치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그동안 지휘해 보신 오케스트라가 몇 개나 됩니까? 혹시 세어보셨습니까?
함신익 : 유감스럽게도, 좀 세어봐야겠는데, 제가 볼 때는 아프리카만 빼고는 거의 다 간 것 같아요. 남미, 멕시코, 페루, 미국도 거의 50개 중에서 30개주는 간 것 같고 유럽도 거의 갔는데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못가본 것 같고 아시아도 많이 가본 것 같고. 한 100개 이상은 하지 않았을까
박인규 : 역시 또 유치한 질문인데 그동안 지휘해보신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가 있다면 하나를 꼽을 수 있을까요?
함신익 : 쉽지 않죠. 오늘까지의 기억으로 볼 때는 가장 최근에 기억에 남는 건 한 3주 전 몽골에 처음 갔습니다. 몽골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했는데 제가 자원봉사로 간 겁니다. 비행기값도 제가 다 내서 간 건데 저는 주기 위해서 갔어요. 그런데 오히려 많이 받고 왔어요. 그 분들로부터 음악적인 영감과 감동, 아직 악기도 70년대에 사서 한 번도 못 고친 악기들, 형편없는 환경이지만 제게 너무 많은 걸 줬고 그 사람들고 연주를 통해서 저도 울고 단원들도 운, 그것도 소용돌이 속에 투표가 있었지 않습니까? 폭동이 있었던, 소용돌이 안에 연주가 있었는데 모든 걸 볼 때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구나, 제게는 너무 감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런 걸 느끼게 해준 좋은 기회였습니다.
박인규 :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볼까 하는데, 저와 연배도 비슷하신데요. 보니까 삼양동 개척교회 목사님 아드님, 굉장히 어려우셨던 것 같고. 저희 또래는 사실 남자가 피아노 치는 건 잘 생각 안 했거든요. 돈 있는 집안 여자들이 친다고 생각했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셨어요.
함신익 : 저희 어머니가 평북 철산 출신인데 그곳이 예술적 기질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의 소원은 아마 막내아들이 감수성과 예민함이 있기 때문에 피아노를 배워서 나중에 교회에서 피아노를 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미리 하셨던 것 같아요. 저도 거부를 안 했고 즐겼고 그게 시작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박인규 : 그래도 그 당시 음대 간다는 게 집안이 좀 가난한 사람들은 생각하기 어려웠을 텐데
함신익 : 음대 진학할 생각은 없었어요. 저는 음악이 좋아서 했는데 중학교 때는 축구선수가 되는 게 소원이었어요. 피아노를 계속 배우다가 중학교 때는 안 했습니다. 축구 하러 돌아다녔어요. 어머니가 새벽에 문 꽉 잠그고 있으면 담 넘어서 운동하러 가고, 그때는 다 그렇게 어렵게 살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문제지 환경과... 교육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음악을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박인규 : 중요한 건 열정, 열망이다. 그렇다고 해도 250달러 들고 미국 유학 가는 건 상당히 무모하지 않았나요?
함신익 : 제가 군대 갔을 때 결국 내가 빨리 미국에 가서 내가 하고 싶은 지휘를 공부해야 되겠구나. 군대를 마치고 대학을 마치자마자 미국에 수소문해서 가장 싼 학교, 가장 장학금을 많이 주는 학교를 찾았어요. 그래서 텍사스의 남부 주립대학을 찾아서 갔는데 그 당시 한 달 아파트 렌트가 250불 정도였어요. 그래서 그것만 들고 가면 그 다음은 내가 해결한다.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박인규 : 그래도 바로 학교는 라이스라는 대학이 명문대학인 걸로 알고 있는데
함신익 : 저는 쌀만 만드는 학교인 줄 알았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갔으니까 그 동네 가서 텍사스 서든대학에 갔다가 라이스 대학의 청강생을 했습니다. 가서 맨 처음에는 쌀만 하는 학교인 줄 알았다가 도서관에 가보고 너무 배울 게 많아요. 그래서 여기서 좀 청강을 해야겠다. 청강을 한 학기 하니까 선생님이 이 학교 오디션 한 번 해봐라 지휘과, 그래서 가게 된 겁니다.
박인규 : 오디션에서 실력을 인정받으신 거군요. 이번에 나온 책 함토벤을 보니까 미국 교포 사회에서도 예일대 교수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학벌에 대한 편견일까요?
함신익 : 학벌은 이렇게 봅니다. 필요합니다. 제 딸도 하버드 간다면 거절 안 합니다. 학풍이 있고 그 학교에서 배우는 퀄리티 있는 교육이 있고 학생들이 목표를 정해놓고 한다는건 상당히 중요해요. 예일에서 제가 15년째 가르치고 있지만 정말 똑똑해요. 학부 아이들 특히 보면 세계 어디에 갖다 놔도 1개월이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아이들이 많아요. 모든 면에서 우수한 아이들. 당연히 우수하게 키워내는 게 중요하지만 혹시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우수하게 뒤늦게 발견할 수 있어요. 능력이 있으면 그것을 미리 자르면 안 된다. 그래서 학벌 중요하게 여기고 거기서 훌륭하게 나온 사람들을 인정해 주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훨씬 그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돼야 되는데 미국에서는 제가 아직 본보기죠. 그렇지 않더라도 저희는 한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군대까지 3년 다 마치고. 박사과정도 마치기 전에 취직이 됐으니까, 그런 과정을 볼 때 저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건 미국이 실력 위주로 사람을 뽑는구나...
박인규 : 지금 50대 초반이시니까 지휘자로서 완숙한 경지에 들어가신 걸로 제가 알고 있는데, 앞으로 지휘자로서의 꿈이 있다면 어떤 게 있으십니까?
함신익 : 지금 이제 겨우 지휘가 보여요. 소리가 보여요. 소리가 듣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바뀌는 그런 성숙한, 완숙보다는 성숙한 과정으로 이제 지휘가 뭔지 알겠어요. 어떤 분들은 30대에 보일 수 있죠. 저는 그동안 불만이었죠. 왜 나는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에서 부르지 않나? 아직도 난 왜 소위 말하는 2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나라는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같이 경쟁했던 친구들이 뉴욕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가 되고, 최근에 깨달았어요. 아직 내가 때가 아니구나. 내가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저 사람들은 빨리 성숙했구나. 이제는 그런 성숙과정에 도달한 걸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비저블, 듣는 음악에서 보이는 음악으로 바뀌는 과정에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떤 환경, 어떤 오케스트라... 몽골이든지 유럽 최고 오케스트라든지 제가 최선을 다하면서 그 분들에게 내 인간적인 면까지도 배울 수 있도록 전달하는 지휘자가 되는 것이 지금의 가장 시급한 사명이고, 그 다음에는 한국의 열정을 가진 음악인들로 만든 정말 작지만 훌륭한 오케스트라를 세계시장에 내놔도 손색없는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게 작은 소망입니다.
박인규 : 그런 측면에서 음악을 지향하지만 어려운 환경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말씀을 마지막 마무리말씀으로 해주시죠.
함신익 : 미국에서는 그게 통합니다. 가령 우수한 학생이 능력만 있으면 다 장학금을 줘요. 예일대 대학원은 100% 장학금 주고 이제 생활비까지 줘요. 그리고 학부에 들어오려면 1년에 5만불, 6만불이 되는데 가정형편이 안 되면 100% 장학금을 줘요. 본인의 능력을 탓하지 주위 환경을 탓하지 마라. 능력있으면 살아갈 길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본인의 생각을 항상 프로로 바꿔라. 학생, 불평, 불만, 또 내가 쓰기 싫은 말이, 아르바이트...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나는 프로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나는 해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나의 꿈도 이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희망을 가족 세상을 살아나가야지, 포기하지 말라.
박인규 : 젊은이들이 자신감을 갖는 것도 중요하고 우리 사회가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도와주는 시스템도 중요하겠지요.
함신익 : 중요합니다. 1등만 키워주지 마라. 2등 3등도 사랑해 줘라. 2등 3등을 더 키워줘서 1등이 많이 나오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박인규 : 앞으로도 계속 쭉쭉 뻗어나가셔서 한국을 많이 알리시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함신익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미국 예일대 음대 함신익 교수를 초대해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 교수가 되기까지의 음악인생과 그가 생각하는 지휘자의 리더십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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