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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사회

[최무영의 과학이야기] <87> 과학과 인간 ③

과학과 사회

과학자는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나라에서는 공학자나 마찬가지로 과학자도 대체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적어도 내 주위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한편 외국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서도 과학자는 일반인들보다는 대부분 진보적입니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하고 이론체계를 창조하는 과학의 본질을 생각하면 사실 진보적인 것이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반대라니 희한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와 관련해서 '전문인'과 '지식인', 한걸음 더 나가서 '지성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에 지성인은 참 드문 듯합니다. 지식인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네요. 과학의 경우에도 과학의 유형적인 활용에만 치중한다면 과학의 목적이 도구적인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한 것으로만 보게 됩니다. 도구적인 지식으로만 보느냐 아니면 진정한 의미의 과학정신―합리적인 과학적 사고―이라는 무형적 과학의 본질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역사와 사회를 보는 눈도 상당히 달라질 수 있겠지요. 여기에는 교육, 특히 처음에 지적한 문과와 이과의 격리 문제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 듯합니다. 과학을 통한 인간과 삶, 사회의 본원적 이해를 추구하지 못하니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가지기 어렵게 되지요. 결국 체제 순응적이고 결과적으로 보수적인 권력에 봉사하는 전문인만 양성하는 체계로 전락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튼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학이란 전문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고 인류 전체의 공통된 자산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에 강조했지만 과학도 소중한 문화유산이지요. 위대한 예술작품이 예술인의 전유물이 아니듯이 과학이라는 정신문화도 몇몇 전문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공유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과학교육은 그리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특히 고등학교에서 과학교육은 매우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고등학교 때 과학교육을 받았겠지만, 글쎄요, 대부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대학 입시라는 절대적 조건 앞에서 기계적인 암기와 문제풀이로 전락했지요. 이는 진정한 의미의 과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기르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과학을 왜곡되게 인식하게 되느니 차라리 아예 배우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결국 대학 입시의 모순이 너무 심하므로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발전에 희망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하기는 입시와 관계없는 대학에서도 과학교육은 미흡하고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공학은 물론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에게도 도구적 지식의 성격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듯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에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급격히 심해졌는데, 방금 지적했듯이 비판적인 사고를 오히려 억제하게 되고 체제 순응적인 전문인을 기르게 됩니다. 한편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교양으로서 자연과학을 배우게 되는데 그 비중이 너무 작을 뿐 아니라 역시 과학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단편적인 지식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처음에 교양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러한 과학을 포함한 교양 교육, 곧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이 적절히 조화된 교양 교육은 사실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층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체제 순응보다는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입장, 이른바 '불온한' 사상을 말해주게 되니까요.

과학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지니면 인간을 억압하게 되고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게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특히 과학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중요합니다. 과학을 무비판적으로 신뢰하면 - 이른바 묻지마 지지라고 하지요 - 앞서 말했듯이 위험한 낙관주의로 귀착하게 됩니다. 핵발전이나 핵폐기물, 유전자 조작, 환경오염 같은 문제가 과학의 활용에서 생겨났는데 과학이 더 발전하면 이런 문제도 다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반인뿐 아니라 과학자 중에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요. 이러한 낙관주의는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면 이른바 '과학(만능)주의'에 이르게 되겠지요.

이와 반대로 과학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혐오할 수도 있는데, 이것도 역시 잘못된 시각으로서 인간을 억압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문화와 문명의 성취를 포기하게 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폐쇄적인 보수주의로 빠질 수 있어서 바람직한 방향이 아닙니다. 어쨌든 과학을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학은 귀중한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유형적 성과도 잘 활용하면 인간을 해방하는데 유용하게 쓸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쓰는가가 중요한 문제지요.

현대사회의 병폐는 많은 부분 기계론적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는 듯합니다. 어떤 면에서 현대사회는 아직 고전물리 시기, 곧 17-18세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3강에서인가요, ≪우리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었다≫라는 저서도 언급했지만, 과학의 발전에 비추어보면 전혀 근대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이 아주 타당하지요.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사회는 아직 고전물리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했고, 결국 아예 과학적이던 적이 없었다고 해야 할 듯합니다.

뉴턴의 고전역학적인 결정론 대신에 현대과학―상대론과 양자역학, 통계역학, 혼돈, 그리고 복잡성―의 바탕에서 보면 현대사회에서 기술문명을 이끌고 나가는 관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특히 복잡성이 새로운 사고의 틀로 인식돼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존의 환원론이나 결정론 등을 완전히 교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상호보완의 관계로서 이른바 변증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까지 물리학은 주로 기본원리를 얻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거기에는 환원론과 결정론이 매우 유용하고 성공적인 사고의 틀이 되었지요. 하지만 이것으로는 간단한 현상만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에서 아주 제한돼 있는 현상만 다룰 수 있었지요. 실제로 물리 교과서에 실린 내용을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현상 중에서 간단하게 단순화할 수 있는 것들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예외적인 것들이고 실제 우리가 일상에서 감각기관으로 경험하는 자연현상 중에는 교과서를 통해 배운 관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21세기 물리학은 기본원리보다는 자연을 해석하는 데에 주안점을 둘 것으로 예상합니다. 전체론(전일론; holism)과 예측불가능성이 매우 중요하고, 환원론과 결정론을 보완하게 되겠지요. 그래야 비로소 복잡한 현상, 자연에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 본질적인 현상의 해석이 가능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제 시작이므로 앞으로 얼마나 성과가 있을지는 사실 알 수 없지요. 아무튼 궁극적인 복잡계는 생체계라 할 수 있어서 생명현상의 이해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 이 연재기사는 지난 2008년 12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라는 제목의 책으로(책갈피 출판사)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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