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가장 먼저 기계화되고 공장화된 선진적인 산업이었다. 그러므로 영국 면직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그 기초를 마련했고 세계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아는 것은 영국 산업혁명의 성격 이해에 필수적이다.
면직산업의 이런 운명은 면직물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의 다른 어떤 직물보다 우월한 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면사는 모사보다 더 강하고 모, 아마, 실크 같은 다른 실보다 가공하기에 편리하므로 나중의 기계제 생산에도 적합했다. 또 면직물은 다른 직물보다 표백이나 염색이 잘 되었고 오래 갔다. 게다가 가볍고 세탁하기도 편했으니 어떤 직물보다 잠재적으로 큰 시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면직물은 원래 인도의 주종 수출품으로 일찍부터 유럽에서의 수요가 많았다. 영국인들은 17세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면직물을 수입하여 본국에서 사용하는 이외에 다른 유럽지역과 나아가 아프리카, 아메리카로도 수출했다. 이는 매우 수지 맞는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17세기 중반까지는 수입되는 주종품목인 캘리코(20수짜리 면사로 짠 거친 면직물)의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17세기 말에 가서야 전체 수입 직물의 1/4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1700년에 영국의 직물 총생산액은 850만 파운드였고 수출량은 450만 파운드(주로 모직물), 수입량은 150만 파운드(4/3은 아마포)정도였다.
당시에 면직물을 독점적으로 수입한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였는데 수입량이 너무 많아지자 정부는 이에 제한을 가했다. 전통적인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모직과의 혼방제품만 수입하도록 규제하기도 했고 또 1680년부터는 국내에서 혼방 제품 이외에 순면제품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수입 면직물에 대한 규제는 이렇게 1770년대까지 여러 형태로 유지되었는데 그것은 중상주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 국가의 전략 목표나 정치적 안정, 조세 수입 등을 다각도로 고려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면직물이 이익이 많이 남는 상품임이 분명했으므로 영국 상인들은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 들어와 수입 원면을 이용하여 국내에서의 면직물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다. 대체로 전대제도를 통해 농촌 마을에서 생산했는데 이는 도시에는 길드의 규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면직산업이 1760년대 이후 급성장하게 된 것은 인도의 벵골지역 식민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도로부터 원면이 쉽게 조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기계의 개량이나 공장제도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면직산업의 공장화에 가장 기여한 인물은 리차드 아크라이트이다. 그가 1771년에 자신이 개량한 직기들을 물레방아와 결합한 공장을 더비셔의 크롬포드에 설립한 것이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 면직공장이다. 1773년부터는 인도 직물을 본뜬 최초의 순면 캘리코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국내 면직산업이 가져올 희망찬 미래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그 발전을 위한 모든 조치를 다했다. 1774년에 원면 수입에 대한 관세 면제 혜택을 베풀었다.
같은 해에 영국 내에서 생산한 면직물은 혼방이 아니더라도 의복뿐 아니라 커튼이나 식탁보 등의 집안 살림살이용이나 가구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이는 국내의 면직물 수요를 증가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인도 면직물은 재수출을 조건으로 런던에서만 수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잉글랜드 면직업자들을 인도로부터의 경쟁에서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정부가 철저하게 자국 면직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은 1784년부터 유럽 최대의 면직물 생산국이 될 수 있었고 1787년부터는 세계최대의 무역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의 산업혁명이 유럽 다른 나라의 산업혁명과 달리 사기업가들이 주도한 것이라는 주장은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사기업가들이 주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철저한 비호 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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