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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준 이경, 용기를 잃지 마시라!"

[기고] 더이상 몰이성(沒理性)의 정치가 판 칠 수 없는 세상이다

광우병 정국이 석 달 넘게 지속되면서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민과 이를 진압하는 전ㆍ의경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더니 기어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촛불집회를 진압하던 한 신참 이경이 부대복무를 거부하며 양심선언을 했다. 이름이 이길준이란다.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정부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현재 한 용기있는 천주교 신부가 마련해 준 거처에 자리를 잡고 '전ㆍ의경 제도 폐지'를 주장하며 무기한 농성 중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내팽겨친 '매국노'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국가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는 의로운 행위라고 격려를 한다. 어느 쪽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릴 수 밖에 없는 애매한,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절대성을 먼저 보는 사람은 이 이병의 행위를 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볼 것이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먼저 보는 사람은 양심의 문제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보아도 둘 다 국방의 의무를 명시한 헌법 제 39조와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 제 10조에 해당되는 정당한 주장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길준 이병의 고독한 싸움이 결코 혼자만의 싸움일 수 없다는 내 양심의 소리에 답하고자 함이다.
  
  군대를 다녀 온 사람들은 군대생활이 왜 고달픈지 다 안다. 국방의 의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개인의 욕구나 양심 따위는 이유를 불문하고 접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관의 명령이 아무리 부당하고 모욕적일지라도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미덕이다. 사람들은 사정이 어떻든 그것을 참고 견뎌내야만 진정한 군인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해서 대한민국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만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는다. 우리가 워낙에 폭압적인 시절을 지나왔기에 이 그 동안은 군인들에게 인권 또는 기본권과 같은 용어를 감히 적용해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80년대를 거치면서 군대 내 부당한 폭력행위가 '공식적'으로 금지되고 민주화 바람이 확산되면서 군대도 마냥 인권사각지대일 수만은 없게 된다. 특히 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투쟁이 격화되면서 군인인지 경찰인지 정체성이 모호한 전ㆍ의경의 숫자가 방대하게 불어나는데 이들은 자신의 이웃이자 친구일지도 모를 시민을 상대로 작전을 펼침으로써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원래 군인이란 적의 공격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고 적을 섬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자신의 부모형제나 같은 사람들을 진압하려니 매순간 양심의 갈등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심리적 혼돈을 해결하기 위해 공안당국이 택한 방법이 바로 '색깔론'이다. 시민이건 뭐건 정부당국에 반기를 드는 모든 시위세력은 '빨갱이' 또는 '빨갱이의 선동에 놀아나는 폭도'라는 것이다. 이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공안당국은 시위주도 세력 가운데 좌익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찍어내어 집중적으로 언론플레이를 하는 한편 시위가 폭력으로 흐르도록 끊임없이 공작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듣고도 여전히 주저하는 전ㆍ의경은 두 가지 압박에 시달린다. 만약에 이 명령을 거부하게 되면 첫째로 국방의 의무를 저버리게 될 것이고, 둘째로 빨갱이의 선동에 동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이후 이 이병에게 쏟아지는 대부분의 비난은 이 두 가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방부는 대답해야 한다.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시민을 상대로 폭력진압을 하도록 내모는 것이 과연 국방의 의무에 합당한 것인지, 그리고 국민 대다수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 과연 빨갱이의 국가전복 음모인지? 추측건대 이길준 이경은 자신의 건전한 상식과 양심에 비추어 볼 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지 않다고 판단을 하지 않았나 싶다.
  
  대한민국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면 반드시 작동하는 내부검열 장치가 있다. 나의 상식과 양심에 의하면 반드시 '아'라고 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내부검열 장치'에 의해 '어'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아예 침묵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국가폭력'이다. 국가폭력은 보통 법의 가면 아래 숨겨져 있어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험한 시절을 겪어본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안다. 정부 또는 기존 지배질서에 어긋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다친다는 것이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에는 술김에 길거리에서 정부를 비방해도 처벌을 받았다. 지금은 인터넷 공간에서 10대 아이들조차 대통령에게 쌍욕을 해대는 시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폭력이 결코 사라지거나 약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통신정보 기술의 발달로 더욱 교묘해지고 섬세해졌다.
  
  나처럼 공안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공안전력자들은 공식적으로 '보안관찰법'이라는 반인권적인 법률에 의해 감시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국가폭력은 백주의 테러에서부터 고문, 은밀한 감시, 검열, 사적인 불이익, 압력 등 그 촉수가 너무도 넓어 이미 국민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길준 이병의 귀대거부 소식이 알려진 이후 그의 행위에 공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맨 먼저 떠올린 것은 아마도 국가폭력에 의한 보복일 것이다. 국가의 기강에 관련되는 저런 문제에 대해 섣불리 의견을 표시했다가 국가로부터 어떤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이는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 공안정국을 거쳐 오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된 정서일 것이다.
  
  사안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길준 이경과 그에게 격려를 보내는 일부 시민들은 국가폭력이라는 괴물의 목에 방울을 다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의 절대성을 외치는 자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에 포위된 사회주의국가들이 국가의 절대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을 희생시키고 왜곡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세계의 일원이라고 말하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마치 좌익정권(북한)과 좌익세력(남한)에게 포위되어 살고 있는 듯이 행동해 왔다.
  
  심지어 국가총생산이 북한의 몇 십 배에 달하는 지금까지도. 그 과정에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정체성'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는(듯한) 국민의 발언이나 행위에 대해 가차 없는 보복을 해왔다. 이 나라 우익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누군가 자신의 의견과 다른 말을 하면 바로 '반국가주의자'나 자유국가를 음해하려는 '빨갱이'로 매도한다. 마치 국가를 전세라도 낸 듯이 행동한다. 자가당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에 개인의 자유로운 견해와 양심이 설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비록 뒤늦었지만 우리사회는 2008년의 촛불집회를 통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총체적인 성찰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길준 이경은 견고한 체제내부의 틈새를 찢고 나와 우리 모두에게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왜 형제들에게 주먹질을 해야만 하는가?"
  "도대체 전의경에게 국방의 의무란 것이 무엇인가?"
  "국가는 개인의 양심에 우선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해묵은 색깔론이나 군복무지침 따위를 내걸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는 당연히 실정법을 어겼으므로 법대로 처벌을 받을 것이고 이후 대한민국에 사는 한 국가폭력이라는 망령 속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한 젊은이의 조급함이나 판단미숙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 우리는 반세기가 넘게 국가폭력 앞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왔으며 지금까지도 '좌빨'이니 '알바'니 하면서 서로 상처내기에 골몰하고 있다. 그는 분명 국가폭력의 희생자이며 그것의 부당함을 자신의 양심에 걸고 온 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내 글이 이렇게 길어진 이유에 대해 사족을 달고자 한다. 나 역시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무소불위의 국가폭력 앞에서 한 개인의 양심이 무참히 유린당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대전교도소에서 공안수로 복역 중이던 나는 개인의 양심에 반하는 강제전향에 굴복함으로써 평생의 짐을 안은 채 살고 있다.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 강제로 전향까지 시키는 파렴치한 국가폭력 앞에서 고립무원의 나는 처절한 번민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죽을 때까지 '빨갱이 간첩'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도장을 찍음으로써 '양순한 국민'으로 남을 것인가? 국가가 존재하는 한,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한, 국가를 개인과 동일시하는 지배세력이 있는 한 이와 같은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나는 비록 세상과 격리된 공간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길준 이경은 다르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몰이성(沒理性)의 정치가 판을 칠 수 없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이길준 이경, 용기를 잃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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