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 다찌 상차림에는 통영바다가 통째로 다 들어 있다. ⓒ이상희 |
다양한 해산물을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선술집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딜 가나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이다. 대부분 한 가지 요리뿐이다. 봄이면 주꾸미나 도다리 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한다. 식당들은 무조건 한 가지만 먹기를 강요한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종류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이다. 도대체 맛을 즐길 수가 없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느 식당에 가나 단품 요리만 대량으로 팔기 때문이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볼 수는 없을까. 주꾸미도 조금, 꽃게나 문어도 조금, 멍게도, 굴도, 물메기탕도 조금, 생선회도 종류별로 조금, 생선구이나 찜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 통영에서는 가능하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이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통영 바다와 들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음식이 다 있다. 그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전라도 음식만이 최고인 줄 알았던 내가 처음 맛본 통영 다찌집의 다양한 해산물 요리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준 것이 통영의 다찌이다. 다찌집은 해산물 음식의 보고다. 만 2년을 통영에 살면서 나는 어느새 다찌집의 광팬이 되고 말았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내주는 대로 먹는 술집문화가 다찌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음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뀐다. 막걸리를 시키면 안주가 한 상 따라나오는 전주의 삼천동이나 서신동 막걸리 골목을 가본 적이 있는가. 통영 다찌집이 그와 비슷하다.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줏값은 안 받는 술집 문화였다. 대신 술값은 비싼 편이다. 술값에 안줏값이 포함되니 당연하다. 그래도 전체 비용은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긴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하지만 다찌가 유명세를 타고 다찌를 찾는 관광객들이 늘면서 다찌 문화가 변했다. 관광객들은 술보다 안주를 맛보는 데 목적이 있으니 기존의 방식으로는 이익을 남길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이제는 1인당 일정액의 기본요금을 받는다. 기본적인 술을 포함한 가격이다. 소주는 3병, 맥주는 5병 정도가 기본이다. 그 후부터 마시는 술은 다시 술값이 추가된다. 조금 변하긴 했어도 다찌는 여전히 통영 술집문화의 최고다. 다찌집이 아니고서야 어디서 바다에서 나온 온갖 진미를 다 맛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모든 다찌집이 기대를 다 충족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관광객만을 상대로 하는 다찌집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 실망스런 다찌를 체험한 이들은 이 글을 다 읽어보지도 않고 욕설 가득한 댓글부터 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를 알고 제대로만 찾아가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다찌 집에서 실패하지 않는 법은 통영사람들이 잘 가는 다찌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통영의 다찌집과 비슷한 것이 진주나 삼천포에서는 실비집, 마산에서는 통술집이다.
▲ 전어회도 뼈째 썬 것보다 포를 떠서 숙성시킨 것이 더 깊은 맛이 난다. ⓒ강제윤 |
다찌, 실비, 통술집
통영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른다. 통영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김일룡 선생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서서 마시는 선술집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이다. 통영의 대표적인 술집문화가 일본 이름에서 온 것을 인정하기 싫은 사람들은 다찌란 말이 '다 있지'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해산물이 다 있어서 다찌라는 것이다. 억지 춘양이지만 그럼 좀 어떤가. 한국 술집문화에 한국이름과 기원을 부여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일 터.
한동안은 이 지방에서도 다찌란 말 대신에 실비란 말을 썼었다. 지금도 많은 다찌집들이 실비집 간판을 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찌란 이름에 왜색이 짙다고 피하던 중 어느 다찌집이 유명세를 타자 너도나도 다시 다찌란 이름으로 복귀했다. 다찌가 일본어에서 파생된 외래어라 해서 맛이 달라질 까닭은 없다. 다찌는 이미 통영 말이고 통영의 음식문화다.
오늘도 나그네는 벗들과 다찌집에 왔다. 요즈음 독한 술을 통 입에 못 대는 나그네는 화랑을 주문했다. 벗들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소주와 맥주를 시켰다. 얼음을 채운 양동이에 한가득 술이 담겨 나온다. 식탁에는 생밤과 배추, 다시마, 미역이 깔리고 된장과 갈치속젓이 나온다. 일종의 전채식이다. 시원한 굴젓도 나왔다. 생굴을 하루 동안 소금에 절였다가 무를 갈아 넣고,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한 뒤 물을 부어 며칠 삭힌 통영식 굴젓. 그 새콤한 국물이 어제 술을 먹고 아직 풀리지 않은 쓰린 속을 달래준다. 젓갈이라기보다는 굴 식해에 가깝다. 방풍 잎 데친 것도 나왔다. 방풍의 풍미는 다른 어떤 채소보다 뛰어나다. 방풍 잎은 나물이나 쌈으로 먹고 뿌리는 한약재로 사용된다. 해풍 맞고 자란 갯방풍이 더 풍미가 깊다. 풍을 방지한다는 약초. 방풍의 정유 성분은 정신도 맑게 한다.
▲ 유대관계가 깊으면 다찌 주인은 손님의 취향에 맞는 음식을 따로 내주기도 한다. ⓒ이상희 |
더덕향이 묻어나는 미더덕 회
멍게와 생굴, 개불, 피조개회 등을 담은 해물 접시도 나온다. 다들 술이 오른다. 분위기에 취하고 맛에 취한다. 통영출신 윤이상 선생은 생전에 전복과 멍게를 즐겼다 한다. 피조개 회도 달다. 피조개는 타우린 함량이 높아 시력회복이나 당뇨예방에도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피조개에 함유된 베타인 성분은 지방간 예방에도 효과가 크다고 한다. 그러니 안주가 곧 약이다.
그런데 미더덕처럼 생긴 저건 뭐지. 이게 바로 진짜 미더덕이다. 나그네는 통영에 와서 처음으로 진짜 미더덕을 맛본다. 그전까지는 해물된장찌개 같은데 들어가서 오도독 씹히는 것을 미더덕이라고 알고 먹었었다. 하지만 그건 미더덕이 아니라 미더덕 사촌, 오만디(오만둥이)란 것이다. 가짜 미더덕을 먹고 미더덕은 별맛이 없다고 생각했던 셈이다. 미더덕, 이건 더덕처럼 향기롭다. 그래서 미더덕을 바다에서 나는 더덕이라 한 것일까. 멍게보다 단맛도 강하다.
무를 넣고 지진 가자미조림도 나왔다. 생전에 박경리 선생이 그토록 좋아했다는 통영식 가자미조림이다. 볼락구이도 나오고, 생선살을 지진 생선전도 나왔다. 꼼장어 수육, 해물 잡채가 뒤따라 나오니 산해진미가 한 상이다. 아, 그런데 이건 또 무슨 호사인가. '고노와다'라니! 고노와다는 해삼 내장이나 해삼 내장 젓갈을 말한다. 흔히 일본말인 고노와다나 와다로 통한다. 나그네의 입맛에 '고노와다'의 풍미는 단연 최고다. 서유구의 전어지에는 "해삼은 바다의 생물 중 사람을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이라 했다. 해삼은 동물 중 드물게 알칼리성이다. 그 해삼 중에서도 해삼 내장의 맛은 단연 최고다.
▲ 바다의 최고 진미 해삼 내장젓갈(고노와다)과 성게 알. ⓒ강제윤 |
내장을 쏙 빼먹고 버려도 다시 살아나는 해삼
고노와다의 맛은 중독성이 깊다. 고노와다는 생으로 먹기도 하지만 나그네에게는 소금 간을 해서 약간 삭힌 젓갈이 더 깊은 맛이 느껴진다. 다찌집에서도 고노와다를 내주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워낙 고가인 때문이다. 오늘 고노와다는 참기름과 김 가루가 약간 뿌려져 나왔다. 그냥 먹기에는 너무도 귀한 음식이라 조금씩 맛을 음미한다. 밥에 비벼 먹으면 천상의 맛이다. 더러 고노와다 비빔밥을 파는 집들도 있다.
뱃사람들이나 바닷가 남자들은 해삼 살은 입에도 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장만 쏙 빼먹고 껍질은 던져 버리기도 한다. 해삼내장이 강장 효과가 뛰어나다는 믿음 때문이다. 거친 뱃사람들도 속은 여리다. 감성도, 입맛도 섬세하다. 해삼내장의 맛도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해삼이 산문이라면 해삼 내장젓갈은 시다. 해삼은 어떤 생물보다 재생력이 강하다. 배를 따서 내장을 꺼낸 뒤 바다로 돌려보내면 일주일 안에 배가 아물고 3개월이면 다시 내장이 꽉 찬다. 반으로 잘라도 70일이면 두 개의 독립된 개체로 살아난다. 그래서 일본의 시코쿠 지방에서는 고노와다만을 얻기 위해 해삼을 양식한다. 내장을 꺼내고 다시 바다에 넣어 내장을 재생시키기를 거듭한다.
홍합초도 나왔다. 홍합초는 삶은 홍합을 무친 것이다. 홍합도 그저 그런 해산물이 아니다. 홍합은 타우린 함량이 굴 다음으로 높다. 시력회복이나 간 기능 향상에 좋다. 흔히 먹는다고 예사로 취급할 조개가 아닌 것이다. 자산어보에도 전복, 해삼, 담치(홍합)를 삼화라 했다. 세 가지 보화란 뜻이니 홍합 또한 그만큼 진기한 음식이다. 저건 또 뭐지! 대합구이 같이 생겼는데 개조개 유곽이다. 다진 개조개 살에 야채와 된장 등을 버무려 구워낸 유곽은 조선 시대부터 통영의 대표적인 겨울철 음식이었다.
▲ 횟감용 생선으로 부쳐주는 생선전은 입안에서 녹는다. ⓒ강제윤 |
촛대 고동회를 먹어본 적이 있는가?
이제 생선회가 나온다. 밀치와 감성돔, 전복 회가 접시 가득하다. 밀치는 참숭어다. 겨울 참숭어는 도미 맛에 못지않다. 옛날 일본인들은 참숭어와 성게 알, 고노와다를 천하 삼대 진미라 했다 한다. 해산물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에서도 먹기 쉽지 않은 진미가 나왔으니 무엇이 부러울까.
회는 방어, 밀치, 감성돔 세 종류다. 다들 최고의 겨울 횟감이다. 여름 숭어는 맛이 없어 개도 안 먹는다 했다. 하지만 겨울 숭어, 그중에서도 참숭어는 최고의 횟감 중 하나다. 겨울에는 지방질의 함량이 높아서 기름지고 맛도 고소하다. 통영에서는 겨울 참숭어를 밀치라 한다. 감성돔은 김시라 하는데 겨울에는 그 맛이 달고 차지고 쫄깃하다. 방어는 겨울이 제철이다. 어느 때보다 고소하고 기름지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생선은 너무 크면 질기고 맛이 떨어지지만, 방어와 삼치 등은 클수록 맛이 뛰어나다.
그런데 특이한 회가 또 하나 있다. 촛대고동 회. 소라고동 회는 먹어봤지만 다른 고동회는 처음이다. 이 촛대고동 회는 통영이 아니면 먹기 어려운 귀한 음식이다. 촛대고동은 생김새가 촛대 같아서 촛대고동, 머리끝이 빨개서 빨간고동이라고도 한다. 또 해고동, 앵무고동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고동은 익혀 먹으면 탈이 나기 때문에 생으로만 먹는다. 다디달다.
이제 안주가 거의 다 나왔다 싶은 생각이 들자 물메기탕이 나온다. 오늘의 마지막 요리다. 안주이기도하고 해장국이기도 하다. 다들 행복하게 취한 밤이다. 다찌집은 통영 맛의 알파요 오메가다. 처음이면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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