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관광의 북측 관리 당국인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은 12일 피격 사건에 유감을 표하면서도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다"며 남측 정부 조사단의 방북을 거부했다.
북한은 다음날인 13일 <노동신문>을 통해 '전면적인 대화'를 제의한 이명박 대통령의 국회 개원 연설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거부했다.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의 이행을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가소로운 잔꾀"라고 평가 절하했다.
■ 잃을 것 없는 북한, 강경 드라이브
북한의 강수는 남측과 일시적인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지도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금강산 사건이 북측의 사전 기획에 의해 일어난 일일 가능성은 낮지만, 북한에 대한 남한 여론의 악화를 무릅쓰고서라도 강하게 나가겠다는 의미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정창현 <민족21> 대표는 "내부적으로 강경한 입장이 있고, 금강산은 군부가 중심이 되어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남북관계를 중시하자는 입장이 설 자리는 좁아질 것"이라며 "명승지개발지도국 바로 윗선에서 유감 표명이 더 있을 수는 있어도 '사과'는 어렵다"고 전망했다.
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명승지지도국이 입장을 낸 것은 군부가 이 사건에서 거리를 두겠다는 뜻"이라며 "북한 사정상 군부 대신 나올 당국은 없는데, 그렇다면 입장이 안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 '정세는 우리 편, MB 정책 완전히 바뀔 때까지 간다'
북한이 강경 모드를 택한 이유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최고위층의 전략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대통령의 국회 연설로 대북정책의 변화 조짐이 나타나긴 했지만, 6.15 및 10.4선언의 완전한 존중과 이행으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남측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6자회담을 둘러싼 대외 정세가 북한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12일 끝난 6자회담에서 참가국들은 10월 말까지 북핵 불능화와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을 완료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북한의 핵 신고서를 검증할 체제를 수립하기로 하면서 8월 11일로 예정된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는 확실시 된다.
합의 사항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면 북미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다. 일본인 납치 문제에서 북한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북일관계 또한 순풍을 탈 수 있다.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쌀 지원을 받기로 했기 때문에 남측에 당장 아쉬울 것도 없다.
그같은 국면이 이어진다면 급해지는 쪽은 한국이다. 급변하는 동북아 환경 속에서 남북관계를 복원해 정세 주도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국내외의 압박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명박 정부도 북의 요구대로 6.15 및 10.4선언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북한은 지금 당장 사과해 얻는 것과 강하게 대응해 얻는 것을 계산한 후 후자가 낫다고 봤을 것"이라며 "남북관계가 파탄나면서 남측이 정치적·경제적 피해를 입고 다시 북에 손을 내밀 것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도 "단기간에 남쪽을 밀어붙이는 게 대북정책 변화에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남북관계 경색의 정도에 있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개성관광·공단까지 중단하며 극한 대립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시각이 있지만, 김연철 소장은 "개성공단은 기업이 들어갔기 때문에 중단하면 남북 양쪽에 부담이 있다"며 신중한 견해를 보였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사건이 일어나도 개성관광 취소가 거의 없는 걸 보면 금강산 관광 중단쯤에서 멈추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 진퇴양난 MB, 고민만 깊어져
이명박 정부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6자회담이 풀리면서 대북정책을 '순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북한의 강경한 반응이 나오면서 맞대응을 피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보수 지지층은 물론 '국민정서법'으로 볼 때도 남북관계와 피격 사건을 분리하는 건 어렵게 됐다. 정부 조사단을 보내겠다는 대북 전화통지문을 이례적으로 공개하고, 통일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발표해 북한의 수용을 재차 촉구한 것은 퇴로가 없는 정부의 입장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어떤 수를 쓴다고 해도 북한이 정부 조사단을 거부하는 한 진상을 규명할 뾰족수가 없다는 것은 곤혹스런 부분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 카드는 이미 써버렸고, 개성관광·공단을 중단한다 하더라도 북한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게 뻔해 북한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 낼 수단이 없다. 말로만 강경하고 구체적으로는 아무런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할 공산이 크다.
■ MB 정부 초기 대응 미흡
이에 따라 피격 사건에 대한 정부의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진정으로 남북관계와 피격 사건을 분리해 대응하려 했다면 이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할 때 피격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한나라당에서도 나왔다.
처음부터 정부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나선 것도 국민 정서에 기댄 현실성 없는 대책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홍익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우리 국민이 제3국에서 사망해도 당국자가 가서 조사할 수 없고 다만 그 나라의 조사 결과를 청취만 할 수 있을 뿐"이라며 "차라리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이 방북할 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관계자 등 정부가 인정하는 전문가를 대동케 하는 게 실효성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정치적 요소 철저 배제' 한 목소리
이처럼 이명박 정부가 진퇴양난에 빠져 있지만 국내정치적 요소를 가급적 배제하고 신중하게 대응한다면 길이 없진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홍 연구원은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실효성 있는 해법을 찾는다면 악재이면서도 호기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금강산 관광 초기 억류 사건 등이 있었지만 지난 7~8년 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냉정히 봐야 한다"라며 "그런 일을 없애자는 게 화해·협력정책의 근본 취지다. 남북간의 대결이 깊어지면 금강산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더 많아진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화재단 이사장인 법륜 스님은 13일 '평화논평'에서 "이번 피격 사건을 통해서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 상황이 완화되지 않는 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라며 "서로가 책임을 전가하며 더 적대적으로 돌아설 게 아니라 이번 일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함께 재발 방지 대책을 강구하면서 오히려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법륜 스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군사적 긴장을 풀 수 있는 길을 모색하여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되고 금강산 관광이 더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라며 "남북 양측이 모두 자신의 입장을 조금씩 누그러뜨려 서로 양보하면서 대화로 이 난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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