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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 저놈 하는 너는 누구냐?

[김민웅 칼럼] 권력만이 모르는 비밀

"마이크 든" 한 경찰의 "놈" 소리

기가 차다. "놈"이란다. "소리 지른 놈, 깃발 든 놈, 촛불 든 놈. 잡아." 촛불집회 이후 거리행진을 한 시민을 향해 "마이크 든" 경찰이 "지른 소리"였다. 얼굴이 생각보다 젊은 경찰이었다. 2008년 7월 10일, 이 날은 다른 일로 을지로 입구 현장에 가보지 못하고 후에 동영상으로만 본 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이미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충분히 목격된다.

이명박 정부의 촛불진압은 이렇게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위아래 없이 함부로 "놈"이라고 부르며 연행 작전을 펼치는 나라를 만들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무책임한 쇠고기 협상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에게 "이놈 저놈" 하면서 윽박지르는 경찰이 활보하는 나라는 이미 파시스트 국가다. 파시스트 국가는 민주주의 시대에 존재이유가 없다.

기세등등한 집권세력의 오만

180명 이상의 거대 여당이 된 집권세력의 기세가 등등하다. 그 기세를 믿고 경찰은 시민들에게 위압적이다. "누구보고 놈이라고 하느냐?"며 항의하는 시민을 체포해가는 경찰은 경찰 아니다. 그건 제복을 입은 조폭이 되어가고 있는 국가폭력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은 이 국가폭력을 지휘하는 총본산이 되는가?

"촛불"은 지쳐있다. 두 달 넘게 이러한 상황을 끌고 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누가 자신의 일상을 뒤로 하고 여기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을 수 있겠는가? 이만하면 어떻게 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는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이러한 상황을 기다리고 "촛불"이 제풀에 꺾여 소멸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하나 모르는 것이 있다. "촛불"이 이런 식으로 지쳐버리고 그 인내가 바닥이 나면 그와 함께 씻어지기 어려운 분노가 광범위하고 깊게 번져나가게 된다는 점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그 분노는 당장에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내연되어갈 것이다.

촛불, 그 내연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그 내연의 과정에서, 묵과할 수 없는 권력의 폭력과 부당한 조처는 하나하나 뚜렷하게 기억되어가고 있다. 이러는 가운데, 막다른 골목에 처한 시민 민주주의는 더는 이러한 방식이 아닌 다른 선택을 상상하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촛불"은 지쳐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촛불"은 "이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구나" 하고 깨닫고 있는 것이다. 권력이 제대로 민심을 들어 주기를 바라면서 "소리를 지르고 깃발을 들고 촛불을 드는 것"을 연행대상으로만 여기는 권력의 운명에 대해, 좀 더 본질적이고 좀 더 강력하고 좀 더 확실한 조처를 취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행동에 옮길 방법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권력은 지금 모를 것이다. 모든 역사의 혁명적 변화에는 이러한 과정이 축적되어갔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권력의 봉쇄망은 민심에 좌절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래도 믿지 못하며 저래도 믿지 못하는 권력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통치능력을 상실해가는 지점에 스스로 이르게 될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모세와 바로 사이에서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모세는 고대 이집트 제국의 폭력적 억압에 시달리고 있던 히브리 인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어 자유의 역사를 펼쳐내기 위해 최고 권력자 <바로> 앞에 선다. 모세의 마음속에는, 히브리 인들이 자유를 얻고 인간대접 받게 하라는 신의 명령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들판의 어떤 떨기나무 위에 불꽃으로 내려앉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그의 가슴도 뜨겁고 환한 불꽃이 되어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가 나일 강에 스미자, 그 강물은 핏빛으로 변한다. 이집트 제국의 거대한 부와 위세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히브리 노예의 피를 고발하는 장면이다. 제국의 권세와 풍요의 진실이 폭로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바로는 히브리 인들을 자유하게 하라는 요구를 철저하게 무시하다가 온갖 미물의 습격을 받게 된다. 이, 파리, 개구리 등의 공격은 말하자면 파리 목숨처럼 여겼던 미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던 존재들의 반격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이런 반격에도 불구하고 바로의 체제는 마치 난공불락처럼 버티고 있었다. 흔히 "10가지의 재앙"으로 표현되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그러나 사실상 바로 체제의 폭력적 권력을 허물어 가는 과정이었다.

최종적으로 일어난 일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바가 하나 있다. 이만하면 바로도 물러서겠지 했던 모세와 히브리인들은 번번이 기만당하고 실패한다. 모세와 히브리 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듯 들어줄 듯 했다가 고비만 넘기면 자기가 했던 말을 뒤집고 이들을 속였다. 그러기를 여덟 번, 아홉 번,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바로의 아들이 죽고 만다. 그건 <바로>의 체제가 더 이상 역사에서 계승의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이 왔다는 것을 뜻한다.

히브리인들이 거의 기진맥진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사실은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하나 축적되어 바로의 체제를 허물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는 결과적으로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었고, 이집트 제국 도처에서 저항은 더 이상 막아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 열 번의 고비는 권력이 판단했듯이 저항이 진압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 권력의 기반이 어느 사이에 총체적으로 무너져가는 과정이 된 것이었다.

이 이면의 진실을 알아보는 이들은 오늘의 현실이 결코 암담하지 않다. 꺼져가는 줄로 알았던 촛불은 여전히 켜져 있고, 한국사회 이곳저곳에 옮겨 붙고 있다. 서울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청계천에서 시청광장으로, 광화문에서 보신각으로, 한 강을 건너간 촛불은 여의도에서 강남 역 앞으로 번져가고 있다. 끈질기게 확산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번져가는 촛불, 긴 싸움

이명박 정권은, "촛불"을 경제위기로 협박하고 있다. 살기 힘들어 죽을 판에 무슨 촛불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고 있는 경제위기는 과장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하여, 그 위기의 진상은 바로 투기자본의 횡포를 막아내지 못하고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로 소비시장의 능력을 고갈시켜버린 신자유주의 체제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되고 있다. "촛불"은 이 은폐된 진실을 꿰뚫어본 것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아닌가? 살기 힘들어질 판이기 때문에 촛불을 든 것이다.

생각보다 긴 싸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은 안중에도 없고 이놈 저놈 하는 권력은 이대로 묵과할 수 없다. 이 싸움이 아무리 길고 어려워도 우리가 지나온 역사는, 시민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권력이 결국 이기지 못하고 만다는 것을 명확히 입증한다.

촛불에 대한 평론이 쏟아져 나온다. 촛불진영 안에서도 이런 저런 비판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다 잘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촛불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식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열일을 재끼고 현장에 나오는 이들의 손에 들린 촛불은 이 시대 우리의 존엄을 지켜내는 작은 봉화(�Y)다.

불씨

희망은 그저 태어나지 않는다. 이만하면 되었지 하는 낙관을 졸지에 뒤집는 절망 앞에서 태어나는 의지가 다름 아닌 희망이다. 단 하나의 촛불이라도 켜져 있는 한, 그건 언제나 <불씨>가 된다. 우리가 그 불씨를 스스로 끄지 않는 한, 촛불은 누구도 끌 수 없다. 권력만이 모르는 비밀이다. 이걸 모르는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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