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과 촛불광장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은 오늘날 촛불광장에서 그 역사적 실체를 뚜렷이 보이고 있다. 그건 누구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씨알의 주체성과 개성, 그리고 씨알끼리의 연대가 뜨겁게 확인된 현장이었다. 씨알 하나하나에 담긴 하늘이 곧 세상을 다스리는 기본이 되는 무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이 시대에 마주하여 싸워야 할 상대를 발견한 씨알의 힘이다. 시민 민주주의의 직접행동은 씨알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현실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의 주장은 제도의 변화나 혁명의 운명도 결국 씨알의 머리와 가슴에 무엇이 담겨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백번 옳다. 모든 역사의 문명사적 진전에는 먼저 씨알의 사유가 능히 독자적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 길이 엇갈린다. 권력은 언제나 씨알이 혁명적 주체가 되는 길을 봉쇄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며, 씨알은 그런 권력의 세뇌에 자기의 진정한 씨알 됨을 내어주는 어리석음을 자주 저지른다.
씨알의 주체성과 씨알의 성장
따라서 씨알의 존엄함과 그 놀라운 주체성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못지않게, 자칫 어리석은 선택이 되풀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신랄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며 또한 체험하고 있는 씨알의 역동적인 운동, 시민민주주의의 직접행동에는 씨알의 각성과 의지만이 아니라 권력의 기만과 욕망의 부추김에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공존한다.
말하자면, 씨알이 역사의 중심에 서는 일은 어떤 혁명적 계기가 마련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교양과 혁신, 그리고 씨알끼리의 연대를 통한 자신감의 공동체적 역량을 길러나가는 것에서 가능해진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씨알 하나하나는 자신의 존엄성과 능력에 매 순간 격려를 받고 힘을 얻어야하는 동시에, 새로운 존재로 진화하는 과정을 일상의 삶으로 만들어내는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씨알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파괴하고 자신감을 박탈하며 연대의 끈을 놓게 하는 세력의 중단 없는 공세에 씨알은 자신의 진실을 자기도 모르게 포기해버릴 수 있다.
씨알 지식인, 씨알 싸움꾼, 그리고 먹물과의 결별
바로 이 지점에서 씨알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늘을 일깨우는 씨알 지식인의 역할이 있다. 이들은 이른바 먹물이 아니다. 먹물이 편안한 곳에서 말만 토해내는 자들이라면, 씨알 지식인은 현장에 투신한다. 그곳에서 배우며 그곳에서 부딪히고 그곳에서 쟁투한다. 그래서 씨알의 몸이 되고 씨알의 영혼이 되는 길을 스스로 치열하게 뚫고 나가는 자들이다.
씨알을 짓밟는 악과 결연히 싸울 용기와 실천이 없는 지식인은 씨알 지식인이 결코 될 수 없다. 씨알 지식인은 그래서 <씨알의 싸움꾼>이다. 자신을 내놓고 씨알의 역사를 위해 전면에 나서 싸우는 자래야 이 싸움꾼의 자격을 얻는다. 그 싸움꾼은 하늘이 내리는 카리스마를 입는다. 함석헌이 바로 그 카리스마를 입은 씨알 싸움꾼이었다.
이 싸움꾼은 기묘하다. 웃으면서 싸울 줄 안다. 맹렬하나 또한 부드럽기 한이 없다. 몸이 밀려 물러선다 해도 그의 뜻은 결코 물러섬이 없다. 넘어지면 어느새 일어나고, 치열하면서도 기품 있다. 쩌렁쩌렁하나 다정하며, 조용하나 그 울림이 크다. 논리적이면서 동시에 시적이다. 긴 이야기를 풍부하게 가져 서사적이면서 이와 함께, 압축된 잠언의 능력을 가졌다.
어느 자리에 세워도 씨알 지식인은 그 싸우는 방법이 그 현장에 따라 변화무쌍하며, 씨알의 영혼과 자신을 밀착시킬 줄 안다. 하늘이 그의 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전략의 교리가 따로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필요하면 언제든 벗어날 줄 안다. 자기 확신에도 갇히지 않는다. 자유의 능력이 그 씨알의 존재를 규정한다. 시작은 씨알이지만, 그 끝은 무한히 열려 있다.
씨알 싸움꾼의 전략
그리하여 씨알 지식인은 이론과 노선을 선택하지 않는다. 세상을 변모시키는 일은 무수한 냇물이 모여 강이 되고 그 강이 바다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이론과 그에 따른 노선의 선택에 묶이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담아내도 여전히 여유롭고, 아직도 더 담아낼 것이 풍부한 자루다. 그는 지혜로워 낡은 것과 새 것을 가려내 아무리 아까와도 낡은 것은 버리고, 아무리 낯설어도 씨알의 행복에 필요하면 그것을 스스럼없이 잡는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촛불광장의 함성과 운동은 그런 씨알 지식인을 부르고 있다. 침묵하는 이는 역사에 참여할 축복을 갖지 못한다. 오늘의 현실을 아파하며 광장으로 달려가는 이는 거대한 씨알 하나가 되어 역사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할 것이다.
통권 200호 기념 혁신호 <씨알의 소리>는 그 일을 위한 아름다운 무대다. 역사가 전율하는 또 하나의 뜨거운 현장이다. 권력과 부의 부당하고 탐욕스러운 지배를 이기는 씨알의 진지이자 참호다. 씨알 혁명의 성채다.
왜 다시 <씨알의 소리>인가?
그렇다면, 30여 년 전 <씨알의 소리>가 세상에 터져 나왔던 때와 오늘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왜 오늘 또 다시 <씨알의 소리>가 필요해지는 것인가? 이건 혹 이젠 낡은 것의 되풀이는 아닐까? 회고취미에 빠진 구세대의 낭만은 또한 아니겠는가?
군화로 역사를 다스리려했던 시절의 <씨알의 소리>는 저항의 주체를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정체를 숨기지 않고 있던 무수한 형태의 강도들이 씨알의 삶을 질식시키려 할 때, 그래서 모두가 겁을 집어 먹고 있을 때 <씨알의 소리>는 용기로 나섰다. 그건 죽을 각오를 한 씨알 싸움꾼의 자기 투신이었다. 현장을 떠나지 않는 씨알 지식인의 치열한 쟁투였다.
지금 또 다시 그런 저항의 투쟁이 필요해지고 있다. 몸을 사린 자들이 지식인 행세를 하면서 권력의 기만을 칭송하는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상황에서, <씨알의 소리>는 거침없는 진실의 소리를 토해내는 선두에 서는 이들의 봉화(�Y)다. 이 땅의 권력은 지금 다시 기만과 탄압의 장치를 강화하면서 씨알의 길을 막고 있다. 권력의 오만을 맹렬하게 질타하는 예언의 목소리가 나와야 하고,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흩어진 씨알들에게 용기와 지혜를 공급해야 하는 하늘의 소리가 들려야 한다.
씨알의 새로운 싸움
그런데 오늘의 <씨알의 소리>는 이전의 과제에 하나 더 추가된 숙명을 지니고 있다. 그건 거대 자본과의 싸움이다. 그런데 이 거대 자본은 세계적 지배 망을 가지고 있다. 군부정권 정도가 아니다. 제동이 걸리지 않는 자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씨알의 삶을 도처에서 무섭게 삼키고 있으며 그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 땅의 현실 역시 좌지우지 되고 있다.
하여 우리가 직면한 싸움은 그 수준이 달라졌다. 씨알들은 욕망의 정치에 관리되고 자본이 가져다주는 환상에 이끌려간다. 씨알의 자기배반이다. 자본의 진영에 이탈하고 넘어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이 땅에 가난한 사람들을 절벽에 몰아놓고 있으며, "부자 되세요"의 구호 아래 굽은 길로 씨알들을 현혹시켜가고 있다. 씨알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 싸움의 끝에 대한 희망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아차, 하면 넘어질 판이다.
언론과 방송은 물론이고, 공공영역에서 자본의 지배는 계속 관철되어가려 한다. 모든 씨알들은 이들 자본의 탐욕 앞에서 희생될 처지에 놓여 있고, 권력의 정치적 선택은 이 자본의 명령에 따른 방향으로 씨알들의 공적 영토를 침범하고 있다. 광우병 우려가 있는 미국 쇠고기 수입이 그렇고, 한-미 FTA가 그러하며 공공부문의 파괴와 KBS, MBC에 대한 장악시도가 또한 그렇다.
그래서 씨알의 힘은 이제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마주하여 인간의 길, 참된 생명의 길, 씨알의 행복이 이루어지는 길을 뚫어내야 한다. 저항과 함께, 대안의 권력과 공동체를 세우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과 쟁투하는 씨알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지속적인 조명이 필요하다.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무너지는가에 대한 고발이 있어야 한다. 누가 탐욕의 최전선에서 부를 독점하고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을 고난의 지경에 몰아놓고 있는지 폭로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씨알들이 이건 아니다, 라고 결단하는 영혼의 체질변화가 있도록 해야 한다. 자본의 논리에 포로 된 씨알의 정신을 해방시키는 적나라한 싸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그것은 또 다른 위선적인 먹물이 될 뿐이다.
소박하면서도 진정으로 풍요한 삶, 적게 누리면서도 아름다운 인생, 혼자의 시간이 존중받으면서도 또한 함께 있음이 유쾌한 사회. 자연의 숨결과 하나가 되는 인간, 노동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환경의 가치가 소중히 여김을 받는 정치와 경제, 권력과 자본이 씨알 공동체의 필요에 봉사하는 현실을 만들어 나가는 그런 변화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씨알의 소리>, 그 집결의 호각소리
싸워야 할 것에 결연히 싸우고, 지켜야 할 것을 굳게 지키며 그러는 가운데도 우리가 갈망하는 삶을 이루어내는 씨알의 힘을 하나 되게 하는 집결처가 필요하다. 거기에서 씨알의 지혜는 자라날 것이며, 그 체질은 변모하고 하늘이 내린 카리스마가 역사를 진동시키는 감격이 있게 될 것이다. 권력은 씨알의 손과 발이 되며, 자본은 씨알의 소와 양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일구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새롭게 태어난 <씨알의 소리>는 바로 그 집결의 호각소리를 내는 현장이다. 우리는 집결한다. 그리고 광장으로 나갈 것이다. 씨알의 역사는 이제 새롭게 쓰일 것이다. 강도들은 도망가고 강도만난 이들은 힘을 내어 일어설 것이며, 씨알의 권력은 현실이 된다. 하늘이 이 땅에서 살아 움직이는 씨알의 몸이 되는 것이다.
* 이 글은 지난 27일 <씨알의 소리> 통권 200호 혁신호 발간 기념식장에서의 발제강연 원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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