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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사흘간 두문불출한 까닭은?

MB정부, 북핵위기史에서 배워라 <2> 김대중 정부

북한학 박사이자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하고 있는 안정식 기자가 북핵 문제에 있어 한국의 역할을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안 기자는 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던 김영삼 정부 때부터 북한의 핵실험과 2.13 합의가 있던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북핵문제에 있어 한국은 '중재자'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두 번째 글은 김대중 정부 시절의 이야기이다. <편집자>

(☞ 북핵위기史 <1> "YS의 '변덕'도 어쨌든 미국에 통하더라")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이른바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북 간에 화해와 협력을 추구했다. 또, 남북 간에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질 경우 북한이 미국·일본과 교류, 협력을 추진해도 이를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북미·북일 관계의 정상화가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북핵문제의 궁극적 해결로 이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돼 있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 첫 해인 98년은 수차례의 간첩선 침투사건과 대포동 1호 발사, 금창리 핵개발 의혹 등으로 안보위기가 계속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금창리 핵개발 의혹이 아무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나고, '대포동 1호'로 인한 미사일 위기도 99년 9월 북미 고위급 회담으로 일단락되면서 98년 한반도를 위기로 이끌었던 요인들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 의회의 요구로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됐던 페리 전 국방장관도 우리 정부의 끈질긴 설득에 의해 한국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보고서를 미 의회에 제출함으로써 우리 정부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담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남북 정상회담은 반목과 불신으로 얼룩졌던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기반위에 올려놓는 계기였을 뿐 아니라, 북미관계를 개선의 길목으로 이끄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한국은 남북관계 발전을 바탕으로 북미관계의 발전을 유도했고, 한국의 이러한 역할에 힘입어 북한과 미국은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서로가 진정성을 갖고 양국관계 개선에 대해 진지하게 탐색해 보게 됐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과정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권유한 데 이어, 정상회담이 끝난 뒤에는 미국 측에 김정일 위원장이 미국과 관계개선을 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을 전달했다. 북한과 미국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다져진 한미 간의 신뢰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다져진 남북 간 신뢰 분위기가 한국의 중재를 통한 북미간의 데탕트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고 클린턴 대통령이 호응한 '한미공조'는 북미관계를 완전한 정상화 직전까지 이끌었다. ⓒ연합뉴스

미국이 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6월 19일 대북한 경제제재 조치를 완화하는 조치를 실시하자, 북한은 이틀 뒤 99년 9월에 발표한 미사일 발사 유예조치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히는 등 미국에 화답하기 시작했다. 이후 양국은 2000년 7월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포럼(ARF)에서 사상 첫 북미 외무장관 회담을 가졌고, 10월 9일에는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10월 23일에는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각각 미국과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과 미국은 2000년 10월 워싱턴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두 나라 사이의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로 하고 미국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추진하기로 했다. 북한을 방문할 미국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북미관계 정상화의 획기적 돌파구가 될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플로리다주 개표문제를 둘러싼 미 대선의 소송 사태로 이뤄지지 못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12월 29일 '북한과 더 이상 회담할 충분한 시간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방북 계획을 최종적으로 백지화했다.

만약, 북한과 미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오고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제네바 핵 합의에 이어 북미 간의 미사일 협상까지 타결되면서, 북미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통한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라는 대과업이 달성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그런 성과가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 북미관계의 개선은 남북관계 개선을 바탕으로 한 한국의 적극적 역할에 힘입은 바 컸다.

한국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의 관계를 발전시킨 뒤, 이러한 동력을 바탕으로 북미관계의 개선을 추동했다. 미국은 임기 말을 맞은 클린턴 정부가 레임덕 현상을 보이면서 대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김대중 정부는 클린턴 정부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대북정책의 중심축을 한국으로 끌어오면서 미국을 대북관계 개선의 길목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이 한편으로는 북한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을 견인하면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는 주요 행위자로 등장한 것으로, 이 시기 만큼은 한국의 적극적 역할이 빛났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클린턴 정부 시기 무르익었던 대북 화해 분위기는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급변했다. 부시 정부는 흔히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을 펼쳤다고 할 정도로 전임 클린턴 정부의 정책에 강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1년 3월 이뤄진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번째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극도의 회의감을 표출했다. 정상회담은 어색하게 끝났고 이후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선언이 나오기도 하지만,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의 대북 강경 분위기는 한층 더 강화됐다.

부시 미 대통령은 2002년 1월 29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북한·이란·이라크 등 불량국가들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테러를 비호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axis of evil)'을 이루고 있다고 비난했다. 부시 대통령은 특히 '북한은 주민들이 굶주리는 데도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정권'이라면서,'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이 가장 파괴적인 무기로 우리(미국)를 위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이라고 말해 선제공격 불사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2002년 9월에 발표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도 미국의 변화된 세계전략이 강조됐다. 이 보고서에서는 미국을 위협하는 것은 대규모 군대나 함대가 아니라 적대적 소수의 수중에 들어간 파괴적 기술이라면서, 이제 전통적인 새로운 위협이 구체화되기 전에 행동하는 선제공격이 정당화된다는 점이 역설됐다. 북한은 이 보고서에서 자체의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동시에 세계 탄도미사일의 주요 공급자였다고 지칭됐다.

2002년 2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불과 20여일 전에 터져 나온 '악의 축' 발언 등으로 인해, 부시 행정부가 혹시 북한에 대해 과격한 행동을 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정부와 민간단체를 망라해 폭넓게 퍼져가고 있었다. 학계와 시민단체 등에서는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우려하며 부시의 방한을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의 서울 방문을 며칠 앞두고 서울 시내 모처에서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3일 동안 장고에 들어갔다. 부시 대통령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관한 전략을 짜는 것이 김 대통령의 최대 과제였다. 2002년 2월 20일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간의 세 번째 정상회담. 이 회담에서 김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군사조치는 전면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다며 부시 대통령에게 대북 군사조치를 자제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인명피해 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이 초토화되며,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할 경우 현 세대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남긴다는 점도 강조했다.

부시 대통령은 처음에는 김 대통령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 듯 했지만 1시간여만에 일단 수긍하는 반응을 보였고, 정상회담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으며, 북한과의 대화가 조속히 재개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불과 20여일 전의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거론하며 선제공격 가능성을 열어뒀던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의 설득에 의해 북한에 대한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물론, 이 날의 발언으로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자체가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국의 설득이 거침없이 흘러가던 미국의 대북 강경노선을 일단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 2002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긴 설명을 들은 부시 대통령은 도라산 역에 가서 자신의 '악의 축' 발언을 완화하는 말을 해야 했다. ⓒ연합뉴스

한미 정상회담 이후 한국은 북한에 특사를 파견해 남북관계를 정상화시켰고,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북일관계도 개선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과 일본은 2002년 4월 거의 2년 만에 적십자 회담을 가진 데 이어, 9월 17일에는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간의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북한은 이 회담에서 일본인 납치를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일본에 사과했다. 하지만, 북한의 이러한 고백외교는 오히려 일본에 역풍을 불러왔고,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으로 제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면서 한반도 주변의 화해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2002년 9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방북을 계기로 점화된 제2차 북핵 위기는 94년 북미 제네바합의 이후 10년 가까이 잠복돼 있던 북핵 문제를 다시 수면위로 끌어올렸다.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켈리 차관보가 제기한 HEU 핵개발 의혹을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도전적으로 시인했다. 이후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 의해 이뤄져오던 중유 50만톤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나왔고, 12월초에는 스커드 미사일을 싣고 예멘으로 향하던 북한 선박 '서산호'를 나포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북한도 북한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북한은 12월 12일 핵시설 가동 재개를 선언해 사실상 제네바 합의의 파기를 선언한 데 이어, 2003년 1월 10일에는 NPT마저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날이 갈수록 사태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나름대로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진 직후 열린 8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북한에 대해 핵문제를 제기하긴 했지만 북핵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당장 중유 공급을 중단하자는 미국을 설득해 중유 공급을 한 달 더 연장시키기는 했지만 제네바 합의의 파탄을 막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승부수를 띄운 임동원 특사의 방북도, 임 특사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옴으로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한과 미국이 서로를 마주보고 첨예하게 대치해나가는 상황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의 범위는 극히 협소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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