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도 우린 오후에 인도식 홍차인 짜이를 한 잔 마시면서 사료가 갖는 신뢰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대뜸 은사님이 물으셨다. 왜 역사학을 하느냐고? 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거나, 사실인 것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믿는 신화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화와 실재를 역사학자가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되물으셨다. 난 마땅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1 년여가 지난 지금도 신화와 역사를 분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선뜻 자신이 없다. 그것은 신화 또한 역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신화에서 역사를 추출해내고 가능한 데까지 그 둘을 분리해야 하는 것이 역사학자에게 주어진 소임이자 의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명백하게 사실인 것을 거짓이라고 주장하거나, 사기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을 참이라고 믿는 것일까? 왜 전두환이 광주 학살을 주도한 것을 믿으려 들지 않고 여전히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무리들이 있는 것일까? 왜 소위 햇볕 정책은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정책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북한과의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는 목사가 버젓이 존재하고, 또 그에게 열광하는 신도들이 있는 것일까? 왜 황우석 박사는 과학적으로 거짓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할까?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는 사람들이 그에 관한 신화에 익숙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역사를 분리하려는 이성적 노력을 포기하거나 유보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다. 신화는 어떤 의도를 표현하고 소통하기 위한 특정한 방편에 따라 만들어지고, 한 번 만들어진 신화는 그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사회 속에서 실재를 구성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실재로서의 효력을 행사하는 신화로부터 허구와 사실을 분리하여 읽어내기를 꺼려하곤 한다. 아는 듯 모르는 듯 하는 사이에 신화를 그냥 실재로 바꿔 이해하고 소화하고자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사실(혹은 진리)로서 알고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하여 깨부순다고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그 신화와 연계되는 물질적 이익을 얻고 있는데다가 그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사회 내에서 여론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다면 그들이 이끌어가는 흐름으로부터 개인이 용감하게 빠져나오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인도사에서 신화와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실재하는 힘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두 가지의 이야기를 꺼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카스트의 기원에 관한 신화이다. 몇 년 전,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들 녀석이 중학교에 갓 입학 했을 때 심심풀이로 사회 과목 참고서 가운데 인도사에 관한 부분을 한 번 살펴본 적이 있다. 그러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설명을 하나 발견했는데, 카스트의 기원에 관한 설명 부분이었다. 그 설명은 태초에 사람이 한 사람 살았는데, 그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머리에서 브라만을 만들고, 팔에서 끄샤뜨리야를 만들고, 넓적다리에서 바이샤를 만들고, 발에서 슈드라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부산에서 고등학교 역사 과목 교사를 위한 연수에서 인도사를 강의할 기회가 있어 강의를 들으러 온 현직 교사들께 카스트의 기원에 관해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같은 종류의 대답이 나왔다. 이에 정색을 하고 내가 물었다, 정말 사회 계급인 카스트가 사람을 제사해서 만들어졌겠냐고, 그것이 아니라면 왜들 그렇게 이해하고 있느냐고,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현상이 끼치는 영향이 어떠한지를 아시느냐고.
이 신화는 인도 사회 구조의 기원에 관한 성스러운 재가의 역할을 한다. 신화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태초의 원인(原人)이 스스로를 제사 지내 그 몸 각 부분에서 네 카스트를 출생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몸의 각 부분은 철저히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그 상징은 위계의 높낮이를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브라만은 머리에서 나왔으니 머리를 쓰는 일을 하면서 머리는 가장 소중한 것이니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끄샤뜨리야는 팔에서 나왔으니 싸움을 하는 일을 하면서 그 팔은 머리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니 그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바이샤는 넓적다리에서 나왔으니 먹고 사는 일을 해야 담당해야 하며 여기까지는 그래도 지체 낮은 땅을 바로 대하진 않으니 그나마 사회에서 정상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 슈드라는 발이 몸의 모든 부분을 떠받들고 섬기듯 섬기는 일만 하고, 천한 땅바닥을 대고 다니듯 가장 낮은 위치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이 신화를 통해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네 계급 가운데 위 세 계급은 사회적으로 정상인으로 인정을 받는 반면 슈드라는 사회적으로 불구로 규정되어 정상적인 사회 활동, 즉 교육을 받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세금을 내거나, 재산을 갖거나 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없게 규정해 놓았다.
고대 인도 사람들은 이 신화를 태초의 진리로 믿도록 강요받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이렇게 신화 즉 태초의 말씀에 따라 규정되었기 때문에 이를 어기는 것은 엄청난 죄를 짓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다르마 즉 세상의 이치요 인간의 도리요 우주의 법이니 이를 지키고 따르고 보존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목숨 부지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였다. 이를 잘 지키면 다음 세상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불 못으로 떨어진다는 게 힌두 신화의 얼개다. 그래서 이 신화는 태초의 이야기요, 영원한 회귀의 고향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다.
이 대목에서 아주 쉬운 질문 하나 해보자. 이 신화는 실제로 카스트 체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만들어졌겠는가, 아니면 만들어진 후에 만들어졌겠는가? 두 말 하면 잔소리, 카스트 체계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 만들어졌다. 마치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난 후 성리학자들이 그 창제의 맥락과 이치가 세상의 법도에 맞지 않는 불경한 것이라고 비판을 하니 조정 편에 선 정인지가 성리학의 논리를 끌어 당겨 해례본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를 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런 신화를 만들어 유포했을까? 이 신화는 이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즉 브라만 중심의 카스트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 즉 그 체제의 고안자이자 작동자인 브라만이 만들었다.
처음 카스트 체계가 형성되었을 때는 이런 신화는 필요 없었다. 그것은 처음 카스트 체계가 발생할 당시에는 카스트 즉 계급은 각기 하는 일에 따라 역할 분담의 차원에서 고유한 일이 주어졌고, 그것이 신성한 영역도, 불가침의 영역도 아니었다. 하지만 농경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점차 생산이 많아지고, 브라만이 제사를 통해 그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이미 주어진 사회적 기능을 서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 둘 필요가 생겼다. 이에 브라만은 각 기능에 제한과 규제를 두었고 나아가 이에 성스러움과 불경함이라는 종교의 색채를 덧씌워 영구불변의 신화로 만든 것이다.
이렇듯 인도의 고대 초기 사회에는 애초의 네 개의 카스트만 존재해 왔는데 느닷없는 이런 저런 사정이 생기면서 카스트가 자꾸 불어나기 시작했다. 카스트가 전혀 보급되지 않은 곳에서 문명의 바깥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문명화되면서 대거 이 체제 안으로 들어온다거나, 카스트 법을 위반한다든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실제 사회에서는 슈드라 밑에 존재하는 새로운 카스트가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브라만 세계관에서 가장 오염되고 더러운 일 즉 땀 흘리고 막노동 하는 일, 즉 분뇨 처리, 시체 처리, 푸줏간 일, 세탁, 산파 일, 이발과 같은 일이 주어졌다. 그러한 일은 너무나 더럽고 불결해 카스트를 부여 받은 네 계급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실제로 그 일은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불가촉천민에게 그 일을 시키도록 강요하고, 그 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신화로 얽어매어 놓았다.
그렇지만 그들을 기존의 성스러운 네 카스트 구조 안으로 편입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넷의 구조는 성스러운 신화에 의해 확고부동하게 정해져버렸기 때문에 수를 늘리는 일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불가촉천민의 개념이었다. 불가촉천민은 실제 사회에서는 존재하나, 신화에 등재하지 않음으로써 그 어떠한 법적, 사회적, 종교적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천형을 지닌 인간이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화석처럼 굳어져 내려온 봉건 시대의 신화와 현대에 만들어진 경쟁과 지배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에 의해 그 정당한 대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불가촉천민이라는 슬픈 이름이다.
인도 고대 사회에서의 불가촉천민, 지금 한국 사회에는 없는가? 동성동본으로 결혼한 부부, 그 사이에 태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 호적이 올라가 있는 사람, 미군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혼혈'의 굴레를 쓰고 사회의 온갖 박해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 온 우리의 형제자매, 남의 나라 베트남에 전쟁하러 갔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베트남 여인과의 사이에 낳았으나 두고 온 자식, 이미 몸은 여성임에도 호적은 여전히 남성인 사람, '간첩' 생활을 한 죄로 4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산 후 세상으로 나와 마음은 북에 있으나 몸은 남에 있는 사람, 능력은 있으나 지방대학의 여대생이라는 이유로 그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마저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수많은 학생들. 그들 모두가 이 시대 한국 사회의 불가촉천민이라면 너무 과한 비유인가?
힌두 신화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암흑기'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힌두 신화에 나오는 암흑기는 태초에 우주가 만들어진 이후 황금 낙원의 시기가 사라지고 도래한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현 시기를 말한다. 신화 속에서 그 암흑기는 더러운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고, 세속 권력이 감히 영적 권력의 영역을 침범하고, 세상의 도리가 무너지고, 그것도 모자라 제사를 소홀히 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약육강식의 질서가 판치는 시대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 신화를 자세히 보면 그 장면은 농업과 상업으로 부를 획득한 바이샤와 국가 권력이 강대해지면서 세력이 커진 왕과 끄샤뜨리야 계급이 브라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적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구체적으로 한 신화를 살펴보면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옛날 옛적에, 비나(Vina)라고 하는 왕이 살았는데, 그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 등 불경하고 불의한 짓을 하도 많이 저질러 현자들 손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 후 현자들은 비나의 오른 팔에서 정의로운 왕을 만들어 내 세상을 잘 다스리도록 하엿고, 태평성대가 찾아 왔다.
이 신화 이야기에서 비나가 사악한 자로 몰린 이유는 다름 아닌 제사를 수행하지 않음이고 또 그는 그의 백성들에 의해 쫓겨 난 것이 아니고 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여기에서 현자란 제사를 옹호하는 브라만을 가리킴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브라만을 배척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 실제 역사적으로 볼 때, 아쇼까의 경우에서와 같이 - 용납될 수가 없다는 메시지다. 더불어 브라만 그들만이 통치자를 갈아치울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는 뜻도 이 신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태초의 이야기 즉 신화를 통해 그 '무지몽매한' 백성들에게 깊이 각인된다.
이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의 신화는 무엇일까? 하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겠지만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것으로 '라이온킹' 이야기를 한 번 해보도록 하자. '라이온킹'은 잘 알다시피 1994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만화 영화다. 무파사라는 사자가 통치하던 왕국이 위험에 처하나 결국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한다는 줄거리다. 그런데 이 안에 녹아 있는 메시지가 심히 고약하다. 이 라이온킹에 의하면 무파사 왕이 죽은 뒤 왕권은 반드시 그의 아들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그가 어리든지, 약하든지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적통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의 줄거리는 감히 적통을 넘보지 말라는 거다. 하이에나는 적통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아예 정해진 질서 바깥에 있는 세력으로 묘사된다. 그들이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결국 세상은 다시 그 적통이 평정을 하게 되어 있으니 까불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다. 이런 것이 신화다.
신화라는 게 옛날 옛적에 있던 이야기가 아니고, 옛날 옛적을 지향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신화에서 무파사와 라이온킹은 일차적으로 미국이고 스카와 하이에나는 중국이나 일본 혹은 중동 세력, 혹은 유럽일 수 있다. 백인 대 유색 인종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로 환원하면 서울 대 지방일 수도 있고, 서울대 대 비서울대일 수도 있다. 경상도 대 비경상도 일 수도 있고, 강남 대 비강남일 수도 있다.
그들만의 영원한 제국이자, 불멸의 신화를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그들의 모습이 처연하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신화의 틀 안에서 놀아나는 많은 지방 사람들, 비서울대 사람들, 비경상도 사람들 - 사실은 경상도 안에 포함되지만 그 또한 사실은 주류에 편입될 수 없는 못 살고 소외당하고 있는 그 경상도 사람들 -, 비강남 사람들이 더 처량하고 측은하다. 그들이야말로 이 나라는 적어도 SKY 정도의 대학은 나오고, 돈도 많이 벌고, 집안도 좋고 - 그 좋다는 말이 얼마나 봉건적이고 자신의 삶을 짓밟아 왔는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 하는 사람이 다스려야지, 자기 같은 못 배운 노동자가 뭘 알겠느냐고 하는 사람들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국의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현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 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지지를 받은 세력의 가장 큰 무기는 '경제'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경제'를 앞세운 그 대통령과 그 당이 만든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타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반대하는 사람의 많은 부분이 그들을 지지했음직한 사람들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그들은 이른바 그 '경제'가 주는 신화의 실재를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개인의 '성공 신화' 그것도 영리를 제1의 가치로 추구하는 경영술로 만들어낸 신화에 함몰되어 공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자질과 덕목을 요구하지 못한 우를 범한 것이다. 신화에서 실재를 추출할 줄 아는 혜안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교훈을 너무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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