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때로 한 순간에 화산 폭발처럼 시대를 바꾸는 거대한 불덩이의 용암을 내뿜는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에서도 이런 역사 변혁의 용광로 같은 시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동학농민혁명, 3·1운동, 4·19혁명, 6월 항쟁 등의 이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울컥 뜨거운 그 무엇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게 만든다. 그런 질풍노도의 역사는 그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단순한 호명만으로도 우리로 하여금 피를 들끓게 한다. 거기에는 수많은 민중들, 인민들, 시민들, 바로 우리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 고조의 선조들,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 청계광장과 서울광장, 세종로와 광화문을 뒤덮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촛불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불의와 비리, 불평등과 억압, 착취에 맞서 과감하게 몸을 던져 오로지 사람다운 삶과 공동체를 추구했던 수없이 많은 열정의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아무도 이 촛불 대장정의 끝이 어디일지 알지 못한다. 아무도 이 촛불의 용암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지 못한다. 아무도 알지 못하기에 더더욱 촛불은 미지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예정조화의 역사란 없다. 우리는 지금 이전의 낡은 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의 어린 묘목을 발아시키고 있는 중이다.
촛불 시위는 비폭력 독립 전쟁의 시작이다
우리가 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광우병 쇠고기만은 아니다. 광우병 쇠고기보다 더 위험할 지도 모를 유전자조작(GMO) 옥수수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 숫한 미제 상품들만이 아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 남쪽에 미국의 군사정부가 설치되어 거의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점령된 이래, 그리고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미국이 만든 친미정부가 수립된 이래, 남한은 미국의 각종 미친 제도, 미친 생각까지 수입하는, 사상의 충실한 노예국가였다. 말하자면 미국식 사회와 체제,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무비판으로 지상 최고의 것으로 우상 숭배되는 '값싸게 먹히고 질 좋은' 미국의 시장이었다.
이런 미국식 사고와 제도의 충실한 전파와 실행은 미국 유학생 출신들과 친일파 출신 관리들과 군인들이 담당했다.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한국의 미국 숭배자들은 미국인들보다 더한 '한국식 미국인'들임을 입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는 안전하다고 언론에 홍보하는 일은 그런 역사의 유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광우병 쇠고기는 괴담이며 미국이 안전하다고 말하니까 안전하다고 공언하는 관리들을 보면 안쓰럽기조차 하면서도 이해는 간다. 그들에게는 미국이야말로 모든 가치의 표준이자 거스를 수 없는 신과도 같은 권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개 미국 대사가 한국인들보고 과학을 더 배우라고 식민지 총독처럼 훈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 미국식 사고에 푹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관리들과 이른바 전문가들은 미국 대통령 부시가 식량 자급을 못하는 국가는 국가 자격도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은 아예 모르기도 할 뿐더러 관심조차 없다. 적어도 식량 위기에 대한 준비만을 놓고 보면 식량 자급율 20%대, 그것도 쌀을 제외하면 5%인 한국은 부시의 기준으로는 국가도 아니다. 이들 가운데 조만간 곧 들이닥칠 식량 쓰나미가 얼마나 무서운 재앙일지, 광우병 쇠고기와는 질이 다른 사태임을 자각하는 이들은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저 맹목의 미국식 산업화와 자유무역에 매여 온 우리의 참담한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전경련의 경제 전문가가 태연하게 식량위기는 없으며, 식량 문제는 유능한 곡물 딜러만 있으면 해결된다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대책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민주주의의 제도와 민주주의 사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마치 미국만이 민주주의의 모범국가인 것처럼 말하는, 우글거리는 미국 유학파 정치학자들을 지천으로 만난다. 이미 미국은 민주주의에서 한참이나 이탈하고 있는 거의 파시즘 수준의 국가로 전락했다고 말하면 빨간 뿔난 좌파 빨갱이를 만난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람들이 이들이다. 하긴 어느 날인가 촛불 집회 때 빨간 야광 도깨비 뿔을 단 시민들이 있긴 있었다.
심지어는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이나 양식 있는 사람들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 가운데도 실제로는 이런 미국식 사상에 물든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정부에 대신하여 군중집회가 해결의 방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거기에서 새로운 민주정치의 활력을 발견한다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활력이 아니"(김우창, '쇠고기 문제와 반성의 여유', <경향신문>, 2008년 6월 5일)라는 글을 읽다보면 한심한 정도를 넘어서 연민의 정까지 든다. 너무나 한가하고 '고상한', 누런 피부 흰가면의 서구 추종 지식인들을 볼 때마다 우리 학문의 식민지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뿐이다.
이제 이런 사상과 제도의 식민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출애굽의 바닷길을 우리는 지금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4년 내지 5년에 하루만 시민들이 투표권자인 주인으로서 한 표를 던진 다음에는 그야말로 민주주의는 없는, 하루살이 민주주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머지 기간 내내 한국 정치의 주인은 선거로 뽑힌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다. 그 기간 동안 일반 시민들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무력한 개인으로 지내야만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 특히 그 가운데 선거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잘못된 선거 민주주의를 근본에서부터 뒤바꾸는 민주주의 혁명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민(民)이 주인이고 또 주인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정치는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아무리 선거 민주주의가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민이 주인으로서 민주주의의 자립과 자치 정치에 직접 참여해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수많은 민주주의의 직접행동과 직접 민주주의 장치를 필요로 한다. 수많은 일반 시민들의 풀뿌리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풀뿌리 직접 민주주의야말로 선거 민주주의를 지탱시켜 줄 수 있는 주춧돌이다.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 사법부 건물의 그 많은 주춧돌이 실제 어디 있었는지를 국가가 성립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리는 촛불 대행진을 통해 처음으로 비추어 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 대장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탐사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사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일반 시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숱한 풀뿌리 공동체의 직접 민주주의와 일반 시민들의 직접 행동이 없다면 언제나 지금의 한국 정치 현실처럼 소수 정치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엘리트 귀족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언제든 상황에 따라 독재와 파시즘으로 회귀할 수 있다. 서구의 정치현실이 이를 너무나 잘 입증해준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민주주의 사상과 상상력의 푸르고 무성한 나뭇잎들을, 그리고 그것이 직접 실천되는 자유롭고 활발한 광장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대영제국에 맞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사상을 펼치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나갔던 독립전쟁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그렇다. 촛불 대장정은 민주주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는 독립전쟁과 혁명의 시작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변화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촛불 집회는 기존의 진보-보수 담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도약이다. 이제 낡은 보수-진보의 사상으로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가 없다. 1980년대 9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의 관성으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사회의 상상력을 이끌어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낡은 제도정치와 일반 시민대중의 직접 민주주의 정치 사이에 있는 극심한 단절과 괴리를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와중에 6·29선언이 나오자 이후 국민운동본부는 비판적 지지, 후보단일화, 독자후보 등 곧바로 대통령 선거라는 제도정치의 장으로 분열,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는 제도정당의 지도자들이 그래도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었고 일반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보수-진보 어느 정당도 강력한 리더십은커녕 그때그때 임기응변의 땜질식 정치를 반복해 왔을 뿐이다. 이른바 진보정당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낡은 사회주의나 사민주의, 또는 민족해방-민중민주의 도식에 갇혀 새로운 민주주의와 사회에 대한 진지한 도전과 실험을 오히려 억압하려 했다. 때문에 촛불 대장정은 아마도 스스로 새로운 제도정치의 장을 활짝 열어젖힐 수밖에 없을 것이며 새로운 촛불 정당의 형성은 필연이다.
촛불 대장정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 일반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은 이미 기존의 보수-진보 정당정치, 의회정치 현실의 민주주의 수준을 훌쩍 추월해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일반 시민들을 강력한 주체로 내세우는 정당정치의 틀과 비전이 새롭게 형성되고 제시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생존의 위협에 허덕이는 비정규직과 자영업자 수만 해도 1000만 명이 훌쩍 넘는 현실에서 민주주의 의식으로 충만한 자유인들의 연합체로서 촛불정당의 등장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나아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촛불 대장정은 묻고 있다. 기존의 정당은 이런 질문조차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그런 질문을 해왔고, 또 나름의 대안을 모색한다고 했지만, 그들 또한 정당정치의 관행에 갇혀 창조와 도전정신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진보신당이 그런 질문을 던지고자 시도했지만 그 또한 민주노동당 10년의 관성에 얽매여 과감한 환골탈태를 하지 못했다고 하면 지나친 지적일까.
시민사회운동도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생활세계의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시민사회운동은 활동가-회원이라는 전통의 구조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활동가-회원 구조는 일과 사업 중심의 조직 구조이다. 당연히 사람 중심의 커뮤니티, 공동체운동과는 일정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촛불 대장정의 주요한 주춧돌은 커뮤티니, 공동체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들이다. 아고라라는 공동의 토론마당과 수많은 카페, 블로그들은 정보의 소통구조이자 사람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다. 자유인들의 연합으로서, 공동체는 사막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오아시스이다. 한국의 정당정치와 시민사회운동은 이런 오아시스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그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산이 깨져 나갔던 공동체들이 어떻게 새롭게 형성되어 나가고 있는지를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노예로 죽을 것인가,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광우병 괴담의 배후를 찾는다고 청와대와 조·중·동이 소동을 벌인 것이 엊그제이다. 솔직히 배후가 있긴 있다.
1991년 11월에 창간된 <녹색평론>이란 잡지야말로 이번 촛불 대장정의 배후이다. 지금 당장 가까운 서점에 가서 <녹색평론>이나 녹색평론사에서 발간한 책자들을 들쳐보라. 광우병 쇠고기에 대해 이렇게 오래 전부터 괴담을 유포시키고, 경고하고 또 경고한 글들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면 아마도 놀라 자빠질 것이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광우병 쇠고기를 넘어서 공장식 축산의 실태와 대안까지 지치지 않고 글을 게재했다. 그리고 물론 녹색평론과 함께 광우병 괴담을 끈질기게 유포시킨 <프레시안>도 배후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예컨대 16년 전인 1992년 3~4월호(통권 5호)에 실린 제레미 리프킨의 '쇠고기를 넘어서'는 지금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촛불 대장정에 나가기 전에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필독의 글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광우병에 관한 진실의 상당 부분은 이미 <녹색평론>에서 다루었거나 실렸던 내용들이다.
실제로 어떤 시인은 촛불 집회 초기에 촛불 집회를 제안하고 마당을 펼치는 데 기여했던 청년들 가운데 <녹색평론>을 읽었던 자(!?)들이 있었다고 증언하면서 <녹색평론>이 촛불 집회의 배후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녹색평론>의 글들도 사회와 정치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근본의 질문을 던지는 것뿐이다. <녹색평론>은 근대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근본에서 분석하고 이를 비판하면서 지속가능한 생태사회,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사회를 설파한다. 무엇보다도 식량과 에너지의 자립 자치를 역설하면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을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녹색평론>이 이웃과 벗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근본 까닭은 사람은 바로 그렇게 가족과 벗과 공동체에서 살아야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주제의 글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같이 불온하기 짝이 없는, 사회 혼란과 혁명을 은근히 획책하는 아주 악질의 글들 일색이다. 그런데도 왜 청와대와 검찰, 경찰이 <녹색평론>을 압수 수색하고 그 책을 수거해 배후로서 불태워 버리지 않는지 심히 의아할 따름이다. 아마도 대통령이나 청와대, 검찰, 경찰 간부들이란 사람들이 워낙 책하고는 담을 쌓은 2메가 용량 정도의 돌대가리들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녹색평론선집2>는 1993년 출판된 <녹색평론선집1> 이후 녹색평론에 실린 글들 가운데 중요한 글을 추린 선집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개미가 아님을(루돌프 바로), 그리고 지금 우리의 중고등학생들이 왜 촛불을 들어야만 하는지 저 끔찍한 학교 교육의 횡포를(존 테일러 개토), 삶의 가르침과 진실을(장일순, 박경리) 듣게 된다.
경제성장 사회가 이제는 불가능함을, 성장사회는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임을, 농업이야말로 삶의 근원임을,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는 죽음을 삶의 선물로 흔연히 받아들여야 함을 듣게 된다.
우리는 지금 노예의 삶을 살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자유인으로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공생(共生)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촛불 대장정은 물론 자유인들의 연합이라는 길로 용암처럼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촛불이 상징하는 바 근원의 성찰과 비폭력은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들 자신과 사회, 민주주의와 정치,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근원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자, 밤새워 촛불을 들기 위해 집과 직장을 나서기 전에, 촛불의 배후인 <녹색평론>의 선집을 아무 쪽이나 펼쳐 들고 한 번 큰 소리로 음미해보자. 그러면 아마도 당신은 운동화 끈을 훨씬 더 자유롭게 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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