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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폭력'이 문제의 핵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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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폭력'이 문제의 핵심일까?

[촛불의 소리] '불법시위'와 '폭력진압'를 둘러싼 부질없는 논쟁

요즘 웹이나 심지어 100분토론에서도 전경과 시민의 폭력성에 대한 잡담들(논쟁이라고 하기도 민망한)이 오가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이를 보고 있자면 초등학교 시절의 교실이 많이 생각난다. 나는 '스승'들과의 인연이 그리 좋은 편이 못 됐다. 학생의 목소리를 듣고 배려하려는 좋은 분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화장실 청소를 했네 안 했네, 머리를 길렀네 말았네, 교복을 제대로 입었네 말았네, 같은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 학생들을 때리고 구박하는 사람들이었다. 짜증나고 갑갑했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룰이었던 것을.
  
  그런데 가끔 몇몇 친구들이 억압적인 처사에 대해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많은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이들어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다면 지킬 수 있었을 예절, 험한 말 안 쓰고 일방적인 기준으로 처벌을 행사하지 않는 것 정도. 그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소박한 태클들은 일방적인 폭력으로 무마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여기서 재밌는 게 선생과 학생의 싸움을 지켜보는 나의 심리였다. 대놓고 쌍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요구도 혁명적이거나 대단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친구들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매우 '초조했다.' 평소에는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했지만, 막상 권력자 앞에서 그런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나는 '그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과 "아오, 쟤는 왜 나서고 난리야"하는 원망이 동시에 들었다.
  
  촛불시위와 쇠고기정국에서 문제의 본질은 '소수 권력층의 오만'에 있다. 디씨 힛갤에 올라온 만화 '썰'처럼 전의경과 시민들, 피지배층은 엉뚱하게도 이 '오만의 대가'를 대신 치러주고 있다. 본질을 외면한 채로 시위의 일부 폭력적 양상의 책임이 전의경에게 있느냐 시민에게 있느냐는 따지는 것은 상황을, 역사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정말 억지로 시위를 진압하며 눈물을 흘리는 전의경도 있고, 광분한 나머지 정말 청와대로 가서 이명박의 목을 치자는 폭력적인 시위대도 있다.
  
  문제의 포인트는 거시적으로는. 비장함이 깃든 전쟁이 아니라 웃음과 분노가 섞여 축제처럼 진행된다는 점이 이번 시위의 '전반적 성격'이다. 민족감정, 군중심리 이외에 촛불집회는 '플러스 알파'를 가지고 있다. 시민들이 직접 거리에 나와 자신의 주권을 외치고 있다는 것. 믿을 만한 정당 하나도 없는 시점에서 국회의원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여과없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겠다는 것이 촛불집회의 가장 큰 가치다. 어떤 주변적 요소도 이 점을 흐릴 만한 무게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보다 미시적이고 심리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전경 편이냐 시민 편이냐'라는 부질없는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해 열정적으로 리플을 다는 사람들의 '심리'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쪽에 대한 일방적인 옹호나 비판도 사태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책임을 따지는 데 집착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 또는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20% 이하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시민의 폭력성을 논하는 것은 의외로 손쉬운 일이다. 회의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인 웹에서 리플 하나 달랑 다는 것은 어떤 경제적 정신적 비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손쉬운 선택은 '냉소주의자'에게는 크나큰 위로를 준다. 냉소주의자들은 사건을 똑바로 바라보려는 의지가 없다. 늘상 그래왔듯이 사건의 일부분을 취해 자신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가공해 섭취하려 할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 결국 다른 친구가 스승과 논쟁을 벌이던 친구에게 핀잔을 던졌다. 정말로 스승의 분노와 매질이 두려웠든 어쨌든 간에, 그는 '불편한 분위기의 해소'를 들어 당시 자신의 감정적 부담을 덜고자 했다. 스승이든 제자든 간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사건을 자신에게 이롭게 이용해 먹을 수 없을까 하는 이기적 욕망이다.
  
  사실 작년 12월, 이명박의 당선은 냉소주의가 사회에 만연했음에 알리는 징후였다. 그것은 자유니 민주주의니 변화니 하는 것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붕괴되었다는, 그리고 그 빈 공간에는 '돈이나 좀 벌어달라'는 차가운 물신적 가치가 정치를 지배할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냉소주의자는 꿈이 참 소박한 사람이다. 어차피 변하지 않을 세상에 대한 기대는 접은 지 오래요 정치인들은 지갑이나 좀 채워줬으면 좋겠다는 게 냉소주의자다. 하지만 너무나도 놀랍게도 냉소주의는 그리 굳건하지 않았다.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민들은 자유를 향한 열망이 인간의 본성임을 입증하는 사례일까. 비록 관성적인 삶에 주저앉아 시국을 외면하고, 또 그러기에 '전경이냐 시민이냐'를 더욱 수다스럽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냉소주의의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나는 갑갑한 세상 자체가 변하는 걸 보고 싶다. 왈가왈부 떠들며 나 자신을 방어하는 데 지쳤다. 다시 초등학교로 돌아간다면 용기 있었던 그 친구의 말을 거들어 주거나, 적어도 나같이 남을 이용해 먹으려는 친구가 있다면 혼내주고 싶다. 무조건 '선량한 시민'을 논하는 이들도 짜증나지만, 소신있는 척하며 '시민의 폭력성'을 사태의 전부고 본질인 것처럼 불평해대는 소인배들은 더 끔찍하다. 그들은 거기에서 경험하는 만족감을 부인한 채, 마치 '이성적인' 척하며 자위에 몰두하고 있다. 꿈꾸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젊음과 사랑이 남아있겠는가. 행복의 필요조건으로 돈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이들이야말로 제 2의 이명박, 제 3의 이명박이다. 촛불시위를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지 말라. 멀찍하니 떨어져서 불구경만 할 게 아니라 이 화재가 자기 자신의 인생의 맥락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라. 그것이야말로 '이성적인 삶'으로의 한 걸음 전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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