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한 지난 한 달간 전국 곳곳에서 `착한 경제'의 싹이 돋고 있다.
이미 130건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조합설립 신청이 접수됐고, 설립을 서두르는 움직임도 적지 않다.
경제 민주화 바람을 타며 협동조합이 일자리와 따뜻한 경제를 만들 수 있는 대안으로 부상한데 따른 것이다.
◇협동조합기본법 한 달…조합설립 `열기'
지난 1~28일 접수된 협동조합 신고ㆍ인가신청은 총 128건이다. 이 기간 근무일이 총 19일이었으니 하루 7건꼴이다.
이 중 일반협동조합은 115건인데, 서울(41건)ㆍ경기(14건)ㆍ인천(4건) 등 수도권이 절반을 넘었다. 부산도 14건이나 돼 상대적으로 대도시에서의 설립신고가 많았다.
지난 1일 시행된 협동조합기본법에 따라 5명 이상의 조합원만 있으면 누구나 다양한 분야에서 소액ㆍ소규모 창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금융업만 제외하면 자활단체, 돌봄, 청소, 공동육아, 주택, 생산 등 모든 분야에서 가능하다.
협동조합은 독과점 등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고 취약층에 일자리와 사회서비스를 제공해 복지시스템을 강화하는 것도 장점이다. 이는 조합이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배경이기도 하다.
뒷사람은 따라오지 말라는 대기업의 `사다리 걷어차기'에 중소기업이 고사하고, 기업형슈퍼마켓(SSM)이 골목상권을 피폐하게 만드는 현실이 협동조합의 탄생을 불러왔다는 분석도 있다.
협동조합은 태생적으로 1% 특권층이 아닌 99% 다수를 위한 경제를 지향한다.
주식회사의 의결권(선거권)은 `1주 1표' 방식으로 대주주가 경영을 좌우하지만, 협동조합은 출자규모에 관계없이 조합원 모두가 평등하게 1표씩 갖는다. 영리 목적이 아니므로 배당 규모도 출자금의 10%를 초과하지 못한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경제민주화를 '1원 1표'라는 시장주의 원리를 민주주의의 원리인 '1인 1표'로 견제하는 것이라면서 협동조합을 경제민주화의 한 요소로 꼽은 바 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시민들은 시장과 정부가 실패한 영역에서 새로운 기업 모델을 찾고자 협동조합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각양각색 협동조합…대리운전ㆍ도시農ㆍ아웃소싱ㆍ급식 조합도
서울시에는 지난 1일 이후 모두 41건의 협동조합 설립신고가 들어왔다.
밤새 취객에게 시달리는 박봉의 대리운전기사 100여명이 꾸린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이 스타트를 끊었다. 이주노동자를 위한 급식소를 운영하는 '지구촌협동조합'은 인력중개소를 함께 운영해 직업교육과 취업알선을 제공할 계획이다.
캠퍼스 한쪽에서 텃밭을 일구던 대학생들이 모인 도시농업 협동조합 '씨앗들'은 28일 조합등록증 발급이 완료돼 등기를 앞두고 있다.
씨앗들 이사장인 황윤지(25ㆍ여ㆍ한국외대4학년)씨는 2년 전 고려대에서 시작된 대학연합동아리에서 농사를 짓고 생태강좌 '레알텃밭학교'를 운영해왔다. 동아리의 주축이던 친구들은 이제 25~26세, 모두 졸업을 코앞에 뒀다.
황씨는 "우리가 졸업한다고 도시농업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며 "지역민 대상으로 생태강좌를 열었듯이 이젠 지역사회와 함께 농사를 계속 짓고 싶어서 협동조합 전환을 준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경기도에는 14개의 협동조합이 신고서를 제출했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게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주려는 '한국아웃소싱협동조합'은 중소 아웃소싱업체들이 모여서 만들었다. 콜센터, 택배업체, 조선소 등에서 일하는 파견근로자들이 정규직 시장으로 옮아갈 수 있도록 교육과 취업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안성진 사무국장은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고 비정규직의 고용사정이 더 불안해졌다는 고민 끝에 국내 업체들과 공동브랜드를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다문화가정이 늘면서 이들의 한국사회 정착을 돕는 협동조합도 서울, 대전, 충남, 전남, 전북 등 곳곳에 설립신고를 마쳤다.
농축산물 공동 생산ㆍ유통을 위한 조합도 눈에 띈다. 충남 '한우리 고구마 협동조합', 전남 '영암무화과협동조합', 전북 '완주한우협동조합' 등이다.
사회적협동조합 인가 신청은 기획재정부에 '행복도시락' 등 8건이, 고용노동부에 '한국통합방과후아카데미' 등 1건이 접수됐다. 정부 심사를 거쳐 1월 중순께 제1호 사회적 협동조합이 탄생할 예정이다.
◇설립문의 잇따라…시행초기 행정불편도
작은 힘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다는 협동조합의 정신은 사회의 그늘진 곳에도 닿고 있다.
전남 목포의 시각장애인 안마사인 황모(34)씨는 얼마 전부터 시각장애인 안마사 협동조합 설립이 가능한지 알아보느라 분주하다.
피부관리실, 발마사지 등 뷰티 시장이 커지면서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은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불법 안마시술소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황씨는 "밤업소 안마일이라도 끊이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업소가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를 당하면 안마사들은 갈 곳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토로했다.
안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빠지면서 성매매와 무관한 안마시술소에도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시각장애인 안마사와 일반인이 협동조합을 만들고 조합원에게 안마서비스를 제공하는 방법을 찾고있다.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 등 관계부처에 문의를 마치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박창환 기재부 협동조합협력과장은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이후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설립 가능 여부에 대한 질문이 들어온다"며 "기본법상 금융업을 제외한 업종에선 5명만 모이면 누구나 설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첫 달 아쉬운 모습도 보였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이를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중앙정부의 업무처리도 미숙했기 때문이다.
최근 설립 신고를 마친 A씨는 범죄사실기록과 건축물관리대장 등 협동조합기본법상 규정되지 않은 서류도 제출해야 했다.
그는 "담당 공무원이 만약의 문제에도 대비하려고 관련 없는 서류까지 지나치게 요구하더라"며 "원래 협동조합기본법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 간편하게 조합을 세우게 하려던 취지 아니었느냐"고 말했다.
여러 지자체에 협동조합 설립신고를 한 B씨는 지자체별로 요구하는 서류가 통일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관을 제외한 서류에는 정해진 양식이 없어서 신청인이 작성양식을 직접 만들어 제출해야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기획재정부에 이러한 상황을 문의했지만, 설립신고 업무는 지자체의 소관이라며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업무를 서로 떠밀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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