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을 창시한 짠드라굽따의 뒤를 이은 사무드라굽따는 갠지스 강 중류 유역에서 출발하여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영토 확장 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서부의 일부 지역과 남부의 따밀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하고 복속시켰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의 행정 통치의 어려움 때문에 데칸 이남 지역은 독립시켜 주어 그 곳에 다른 왕국이 세워졌다. 그 후 짠드라굽따 II세는 무역의 거점인 서부 지역을 확보하여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00년이 넘는 오랜 동안 평화 시대가 계속 되었다.
그렇지만 많은 제국이 그렇듯 굽따 또한 약 초기 100년의 평화 시기가 지나면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이전 시기부터 이어져 오면서 북부의 꾸샤나와 남부의 사따바하나 모두에게 커다란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준 로마와의 무역의 단절 때문이었다. 로마는 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실크, 옥양목, 향료, 보석, 철제 식탁 용기 등 귀족의 사치와 향락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대거 수입하였고 그 대가로 금과 은으로 만든 주화를 크게 지출하였다. 그러자 무역 수지는 인도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그로 인해 로마의 경제가 크게 흔들렸다. 결국, 로마 정부는 인도와의 수출을 일방적으로 단절시켜버렸다.
로마와의 무역은 고대 사회 체제를 급거 흔들어버렸다. 우선,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오던 로마와의 무역이 단절되면서 벵갈만에서부터 남부를 지나 아라비아만까지 이어지는 긴 해안에 즐비하게 들어선 고대 도시의 경제가 쇠퇴하면서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했다. 도시 경제의 몰락은 그 동안 안정되게 유지되어 온 카스트 체제의 균열로 이어졌다.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많은 장인과 상인의 동업조합이 몰락하면서 그들은 대대적으로 이어져 오던 직업을 버리고 농촌으로 이주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부분 낮은 신분 즉 슈드라 카스트로 강등되었다.
꾸샨 제국을 전후로 한 시기에 수많은 외래민이 대거 인도 땅에 들어 와 정착을 한 것 또한 카스트를 사회 체제를 흔든 또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외래 정복자였으나 이 땅에 정착하고자 하였으니 카스트 체제 안으로 편입되었고, 대부분 끄샤뜨리야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굽따 초기에 각지로 문명이 본격적으로 전파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문명화가 일어난 것 또한 고대 카스트 사회 체제 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전까지는 농경 문명권 밖에 있던 부족들은 갠지스 철기 문명이 보급되면서 대거 그 체제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두 최하위 카스트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여러 과정이 한꺼번에 진행되면서 네 개의 카스트로 조직되었던 고대 사회가 더 이상 그 넷만으로 운용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여러 새로운 카스트가 생겨났다. 또 사회에서 생산을 도맡아 하는 바이샤의 불만이 급증하였다. 바이샤는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과중한 조세 납부와 부역의 의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브라만은 사제니까 세금을 안 내고, 끄샤뜨리야는 무사 계급이니까 세금을 안 낸다. 또 슈드라는 천민이라 세금을 내지 않는다. 결국 농사와 장사를 하는 바이샤만 세금을 내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여기에 슈드라가 부역을 거부하는 일도 수시로 발생했다.
한 마디로 사회가 총체적으로 위기를 맞이하는 시기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약 10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네 가지 카스트 중심의 고대 질서가 흔들리면서 사회가 크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카스트 사회의 최고 지위를 누리던 브라만들은 그 동안 지탱해 온 카스트 사회 구조에 대한 위협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브라만들은 사회의 실질 권력을 쥐고 있는 왕과 끄샤뜨리야와의 연합을 시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브라만을 정점으로 하는 카스트 사회의 유지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왕권 강화는 권력을 종교와 접목시키는 것을 통해서 시도되었으니, 굽따 왕들은 백성을 보호하고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힌두 최고의 신인 비슈누로 비유되었다. 왕 짠드라와르만은 자신을 비슈누 신의 첫째 종(僕)이라 칭하였다. 인간이 신에 대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그 이데올로기는 백성의 왕에 대한 충성 관계와 잘 조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신-인간 대 왕/브라만-백성 사이의 충성 이데올로기는 서로 다른 계급이나 계층 갈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굽따 왕조가 힌두교 신앙 행위를 통치권 차원에서 적극 장려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사실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다. 그것은 종교의 기본 원리가 신에 대한 복종이라는 사실 그리고 종교 교단이 물질적으로 독립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종교가 스스로 애써 권력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한 즉,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권력 혹은 다수에 대한 저항을 소명으로 삼거나, 사회로부터의 벗어남을 그 조건으로 삼는 것을 끝까지 유지하거나 하지 않는 한, 그것은 절대로 이 사회에 대한 저항 기제로 작동할 수 없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참고,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이라 결국 그것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사회의 안정이다. 불교가 불살생을 추구한다지만 원광법사는 살생을 부추겼고, 자장법사는 전쟁을 독려하고, 사명대사는 전쟁에 앞장섰다. 기독교가 살인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낙태를 반대하고,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다지만, 한국사의 해방 공간에서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람을 무자비하게 처단한 일에 앞장 선 것은 기독교 목사였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사랑과 자비의 이데올로기가 기본적으로 사회 유지와 연계되고 결국 그것은 권력과 밀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종교가 물질적으로 사회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다시 연결된다.
굽따 시대에 왕권과 브라만 권력이 협력 관계를 형성한 것은 주로 대규모 제사를 통해서였다. 제사를 통해 브라만은 절대 권력인 왕권을 선양하는 일을 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제사에서의 가장 큰 몫이 브라만 사제에게 돌아갔다. 특히 굽따의 왕은 토지를 브라만 사제에게 봉토로 대거 하사하였다. 그 봉토에는 물론 행정권과 납세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굽따 시기 이후 즉 고대 말기부터 인도 전역에 대규모의 사원 건축이 많이 일어나고, 사원에 대해 토지 하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인도에 중세가 시작된 것은 이런 역사적 상황 아래에서였다.
제사에서 브라만은 굽따 왕을 신으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브라만은 국가적으로 큰 제사를 열어 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 행위에 대해 영원한 축도를 하고, 점성술을 통해 권력을 찬양하고 그 통치를 운명적으로 신성시하였다. 대규모의 왕립 제사는 바로 이 왕권의 신성화와 그에 대해 선양하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런 제사를 통해 왕은 브라만의 축복을 받아 좋고, 브라만은 왕으로부터 물질을 받아 좋다. 그리고 두 세력 사이의 조화는 자연스럽게 백성에 대해 더욱 큰 권력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어 좋다.
역사적으로 굽따 시대에는 마우리야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문명의 확산으로 인해 각 지역에서 토후 정치 세력이 많이 성장하였다. 그래서 굽따 조는 사회적으로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던 데다 지역 세력이 커가면서 권력 분점을 통해 통치권을 극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치·행정적으로 제후들에게 많은 권력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고, 브라만 사제에게도 재정권과 행정권을 넘겨주는 봉토를 하사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브라만의 세 치 혀로 사회를 안정시켜달라는 것이 그 대가였다. 그 대가로 굽따의 왕은 원래 바이샤 출신이었으나 브라만들로부터 끄샤뜨리야 대접을 받았고, 신의 속성을 지닌 신성 군주로 칭송을 받았다.
왕과 사제의 협잡, 비단 굽따 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 한국에서도 혈기왕성하게 살아 있다. 1980년 5월 광주를 겪은 후 많은 기독교 목사들이 군사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을 위해 기도를 하였다. 그들은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어차피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가 뭐가 문제냐고 했다. 그러는 그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하나님의 불의 진노를 주문했다. 그것이 이 나라를 살리는 구국의 길이라 했다. 그 차이는 단 한 가지, 오랫동안 유지해 온 기득권 (즉 교회 권력)에 대통령이 협잡하고자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 뿐이다.
전두환이 교회를 위해 엄청난 특혜를 주고 기득권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를 기반으로 교회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에는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반면 노무현은 교회의 권위를 시도 때도 없이 깎아내렸으며 그들의 정신적 기반인 반공주의를 폐기하고 김대중의 평화 공존을 따름으로써 심각한 정신적 공황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개돼중, 놈현 등의 쌍소리를 그 성스럽다는 제단에서 시도 때도 없이 꺼내 뱉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키운 군대로 국민을 학살한 전두환에게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라는 찬양을 서슴지 않은 그들이 그렇게 하였다.
서기 5세기 인도 굽따 조의 그 브라만과 이 시대 그 목사들과 다를 바가 하등에 없다. 굽따 시대의 왕과 브라만의 세력 연합은 찬란한 귀족 문화를 꽃피웠다. 왕들이 물질을 통해 브라만 교육 체계를 후원해주고 그들의 문학과 예술 활동을 재정적으로 장려해주고 그들의 터전인 사원과 수도원을 세워주고 적극적으로 후원해 준 결과이다. 서사시 《마하바라따》와 《라마야나》, 신화와 전설 모음인 《뿌라나》등 종교 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근대 유럽의 낭만주의 문학인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송한 깔리다사의 《샤꾼딸라》를 비롯한 많은 세속 문학이 크게 꽃 피었다. 사법 제도도 확립되어, 많은 법률서의 편찬이 이루어졌는데, 각 카스트에 따르는 법률은 말할 것도 없고 민법·형법이 확실하게 규정되고 구분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함무라비 법전》이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마누 법전》이다. 뿐만 아니다. 언어학·수학·천문학·과학·예술 등이 이 시기에 와서 크게 발달하였다. 그래서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고대 인도의 황금기라 평가하고 칭송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하지만 이에 대해 좀 더 깊은 분석과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우선 이 시대에 법전이 많이 발달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고대 인도에서 법이란 다름 아닌 카스트 질서다. 그런데 법이 발달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카스트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반동적으로 틀어막으려는 움직임인 것이다. 종교 문학이 크게 성행하고 그 가운데 특히 신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민들의 사회 변화에 대한 움직임을 브라만이 세 치 혀로 틀어막으려는 움직임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 아무리 정교한 문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고, 제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썼다 할지라도 그것이 갖는 의미를 배제하고 평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언어학이 이 시대에 발달했다고 하는 평가 또한 다른 차원의 것은 아니다. 고대 인도에서 언어학이라는 게 성스러운 신의 말씀을 불경스럽게 문자로 적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정제된 언어 즉 산스끄리뜨로 성스러운 구조 안에서 대대손손 구전되어야 하기 때문에 언어학이 발달한 것이다. 천문학도 마찬가지이니 이 시대의 천문학이라는 게 다름 아닌 신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여러 학문이 모두 발달했다고 하는 것이 문화의 황금기라고만 평가할 수는 없지 않다. 그 발달이 인민의 삶의 질 향상과 - 물론 지금의 민주나 평등의 원리를 당시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 충돌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분석에 대해서는 온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굽따 시기는 경제가 침체해서 인민의 삶이 피폐해지고, 사회 질서는 일어나는 변화와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 간에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그 맥락에서 브라만 문화가 꽃을 피웠다고 해서 그것을 고대 인도의 황금기라 칭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일방적인 평가다. 따라서 - 백번 양보해서 - 이 시기는 브라만 문화의 황금기 혹은 힌두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고대 인도의 황금기는 아니다.
고려 시대의 문학이 아무리 아름답고, 그 건축물이 뛰어나고, 그 축제가 화려해 널리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리고, 그 철학적 수준이 서양의 그것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고, 세계적 유산인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 발달이 인민의 삶의 질 향상과 무관한 것이면서 귀족들의 놀이와 향락을 위해 존재했다면 그것은 그 뿐인 것으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나라가 전쟁에 시달리고, 경제가 어려워지고, 유민이 발생해 삶이 도탄에 빠졌다면 그것은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아니겠는가.
종교가 인민의 삶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자기 만족을 위한 신앙 행위일 뿐이다. 지금 한국에서의 종교는 어떠한가? 그 안에 있는 목사, 신부, 중, 그들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일인당 국민소득이 삼만 불을 향하고 있다는 지금, 88만원 세대가 나라 전체를 휩쓸고 있는 지금, 미국 쇠고기 수입에 관한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시작되어 사방으로 들불같이 타오르는 지금, 그들의 삶과 추구하는 바의 좌표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사람을 향하고 있는가? 권력을 향하고 있는가? 자위자족을 향하고 있는가? 그들이 국가 권력과 손을 잡고 인민이 외치는 변화를 세 치 혀로 누르는 모습이 굽따 시대 왕의 물질 앞에 세 치 혀를 나불거리는 그 브라만 모습과 너무나 똑같다. 데자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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