弗과 不의 발음이 똑같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다'라는 뜻으로 '불' 발음의 말이 있었고, 이를 표기하기 위해 별도의 글자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테니 같은 발음인 다른 글자들을 끌어다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그것이 6서 가운데 하나인 가차다).
非(비)와 勿(물)도 부정의 의미다. 非는 弗·不과 마찬가지로 '아니다'의 뜻이고 勿은 '하지 말라'는 의미로 조금 뉘앙스가 다르지만, 반드시 그렇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어서 처음에는 같은 의미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非 역시 弗 계통에서 費(비)·沸(비) 등의 파생자가 나온 것을 보면 같은 범위내의 발음이었다고 볼 수 있고, 勿은 弗·不과 초성만 약간 달라졌다.
결국 弗·不·非·勿은 '아니다'라는 같은 말을 표기하기 위해 동원된 글자들이다. 너무 무분별하게 여러 글자들을 동원했다 생각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非는 반대쪽으로 향한 새의 두 날개를 그려 '어긋나다'의 뜻을 나타냈고 여기서 '아니다' '그르다'의 뜻이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형성자 이전 단계에서 '어긋나다'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위해 새로 글자를 만들었다는 얘기는 믿기 어렵고, '아니다'의 의미를 끌어내기 위한 중간고리로 동원된 혐의가 짙다. 그 때문인지, 같은 새 날개로 보면서도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나타내 飛(비)의 본래 글자라는 설명도 있지만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다.
<그림 1>을 보자. 얼핏 보면 弗도 아니고 非도 아닌 이상한 모습인데, 이는 弗의 갑골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弗이라고 하기에는 弓 부분에서 지워진 획들이 많다. 여기서 두 세로획 사이의 획들을 더 지워보면? 바로 非자다.
무슨 황당한 장난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장난이 아니라 갑골문에 분명히 존재했던 현상이다. 갑골문에는 가끔 한쪽 방향의 획이 빠진 글자들이 있다. 소뼈 같은 딱딱한 판에 글자를 새기다 보면 지금처럼 획순에 맞추어 글자 모양을 예쁘게 꾸미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고, 그저 비슷한 모양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따라서 같은 방향의 획을 먼저 새긴 다음에 판을 90도 돌려 새로운 방향의 획을 마저 채워넣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는 게 편리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정에 의해 후반부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모든 과정이 끝났더라도 판의 재질이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특정 방향이나 특정 부분의 획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본래의 글자와 일부 획이 빠진 글자가 공존하고, 나중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별개의 글자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弗과 非는 그런 사정으로 만들어진 이체자로 보인다. 非는 弗에서 획이 드문드문 이어지지 않은 모습에 불과하며, 지금 모습으로도 非에 간단히 획 몇 개만 추가하면 바로 弗자가 되는 것이다. <그림 1>은 바로 弗과 非의 중간고리에 해당한다.
勿의 해석은 크게 '칼'과 '쟁기'로 양분된다(<그림 2, 3>). 바깥의 勹 부분은 '칼'인 刀(도)의 변형 또는 쟁기의 모습, 나머지 두 점은 칼에 잘려나간 부분이나 고기 같은 것을 자를 경우 칼에 묻은 핏방울, 쟁기질할 때의 흙덩이 등으로 설명한다. 활줄이 진동하는 모습, 깃발의 모습이라는 얘기도 있다. 不은 씨앗에서 뿌리가 뻗어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꽃의 씨방이라는 얘기도 있다. <설문해자>는 새가 하늘(一)로 날아올라가 내려오지 않는 것이라 했지만, 그런 추상적인 얘기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림 2> 같은 勿의 모습을 보면 오른쪽은 弓으로 볼 수 있고 왼쪽은 두 선이어서 弗과 비슷한 구조다. 弓 부분과 두 선이 弗에서는 겹쳤지만 勿에서는 분리됐을 뿐이다. 弗을 흘려 쓴 셈인데, 구성 요소가 같고 발음과 의미 등이 거의 일치하는 점을 생각하면 별개의 글자라고 보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不의 경우도 <그림 4>의 금문보다 조금 이른 시기의 갑골문인 <그림 5>를 보면 오른쪽의 丂 형태로 더욱 간략화된 弓와 왼쪽의 두 선으로 볼 수 있어 같은 구조다.
결국 勿과 不은 弗을 흘려 쓴 모습일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원시적인 초서체다. 非는 弗에서 획이 드문드문 빠진 것이고 勿·不은 弗을 흘려 쓴 것이라면, 이 네 글자는 별개의 글자들로서 '아니다'라는 뜻으로 각기 가차된 게 아니라, 한 글자가 가차됐다가 여러 모습으로 변형된 것이다. 非·勿·不의 별도 상형설은 믿기가 어렵다.
弗 역시 상형자로 설명돼왔다. 화살(弓)을 끈으로 묶어 고정하는 것이라거나, 막대기로 먼지를 떠는 모습이라는 식이지만 '장면 상형'은 믿기 어렵다. 갑골문에서 弓을 둘 겹친 弜 형태의 글자가 부정의 의미로 쓰였는데, 弗은 그 변형이 아닐까 생각된다. 弜을 두 부분으로 보지 않고 몰아 쓰면 弗이 되는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글자 가운데 弼(필)이 弜의 발음을 이어받은 파생자인 듯하다.
한편 옷감의 길이나 말을 세는 단위, 또는 '짝'의 뜻으로 쓰이는 匹(필)은 옷감을 겹쳐 놓은 모습이라거나 말 꼬리의 상형이라는 등의 설명이 있다. 그러나 匸 부분은 弓이 丂를 거쳐 더욱 간략화된 모습이라고 보면 弗 등과 같은 구조다. 발음 역시 큰 차이가 없어 이들의 변형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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