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사소한 일 때문에 기쁘고 슬프다. 사소한 것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한다. 사소한 희망에 살기도 하고 사소한 절망에 죽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사람의 목숨이란 대체로 큰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생사를 좌우 한다. 삶에 사소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세계는 사소함으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실어 나르는 이 여객선도 기관의 사소한 고장으로 난파할 수 있다.
뉴매물도 페리호는 비진도에 나그네를 부려놓고 서둘러 떠난다. 저 배의 승객 대부분은 소매물도가 목적지다. 비진도 외항 마을 해변, 노인 한 분이 백사장에서 해초를 줍고 있다. 노인은 몸을 가누기도 힘겨운지 움직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린다.
"할머니 그거 몰이지요. 뭐에 쓰시려구요?"
"옛날에는 이거를 보리밭에 안 넣으면 밥 굶는다 했어요."
"보리밭에 거름 주려구요?"
"고추 심겨 아들 줄끼라. 고구마 밭에도 넣고. 옛날 집집마다 다 할 때 같으면 천신도 못하지."
과거 섬에서 농사를 많이 지을 때 해초는 요긴한 거름이었다. 진질이나 몰 같은 해초를 거두어다 발효시켜 퇴비를 만들면 똥거름보다 생산성이 높았다. 식용이 아니라도 해초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농경을 포기할 수 없는 비진도에서 해초는 여전히 유용한 거름이다.
"지루하다. 지루해. 어서 떠났으면 좋겠다."
노인은 고통스런 노동에서 해방될 방법이 삶을 떠나는 길 밖에 없음을 잘 안다.
"어렵고, 몸 아프고, 허리 아파 걷지도 못하고 그래가 살고 안 있나."
노인은 혼자 말처럼 하늘에 대고 고통을 하소연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하늘은 묵묵부답이다. 노인은 외항마을 바다에 바짝 붙어산다. 노인의 이웃집 하나는 지붕이 날아가고 없다. 할머니는 중학교 1학년, 손녀딸과 둘이 산다.
"아들 손주 하나 대꼬 산다. 아들은 대전에 가 일한다. 중노동 한다. 집 짓는데 다니는데, 거는 일 있으면 살고, 일 없으면 죽는다."
노인은 오늘 해변에서 미역과 톳을 거두었다.
"톳은 말라가지고 해묵기도 하고, 생으로도 해묵고, 김치도 해 담아 놓으면 맛있다. 요기 생미역 갖고는 생선 국 끓여놓으면 맛있다."
노인이 미역귀 하나를 떼어 준다.
"묵어봐, 꼬시다."
자식이 있어도 다들 어렵게 살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팔순의 노인. 노인은 병든 몸 이끌고 밭농사도 짓고 해초도 뜯고, 굴도 깨가며 하루씩 생을 연장한다. 지루한 삶, 어서 떠났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다면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돈을 벌 재주가 있나. 몸디가 주저 앉았는디. 뭔 부지런을 그리 떨어갔고 몸디가 성한데가 없다. 게을러서 방바닥에 주저앉아 살았어야 했는디. 옛날 수월케 산사람은 아직도 허리 빳빳하다."
노인은 부지런하게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만 때늦은 회한은 부질없다. 영감은 19년이나 병치레를 하다가 떠났다. 노인은 통영의 산양에서 태어나 스물다섯에 섬으로 시집 와 꼬박 55년을 살았다.
"일기장을 썼으면 석 짐도 더 될 것인디. 여그가 바람 때리면 겁나. 여그서 평생 살면서 큰 태풍만 세 번 만났다. 보릿고개 넘었제. 숭년 당했제. 아이고, 아이고 내가 뭐한다고 와갖고. 우리 아배, 옛날에는 시집 못 살고 가면 죽는 줄 알고, 그라이께내 살았제.
"처녀애들은 가서 박정희 수발해 주고"
노인은 유신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섬에 왔던 때를 기억한다. 작은 섬마을이 온통 떠들썩했었다. 대통령은 그가 성지로 만든 한산도에 들렀다가 내친김에 비진도까지 건너왔던 모양이다. 수 십 년이 지났지만 노인은 아직도 그날의 광경이 생생하다.
"박정희가 와서 젊은 사람들은 못 나오게 하고 그래서 숨어 있었다. 나이 많은 분들만 가서 악수 하고. 처녀애들은 가서 박정희 수발해 주고."
자를 들고 처녀들 치마길이까지 단속하던 '미풍양속의 수호자'가 비진도 해수욕장에 와서는 섬 처녀들 수발 받아가며 수영하고 놀다 갔다. 노인의 머리속에는 쓴 약 같은 세월의 흔적이 파편으로 남았다.
비진도는 안 섬과 바깥 섬, 두개의 섬이 시간의 물살에 밀려 하나로 이어졌다. 연결된 구릉 앞뒤로 모래와 몽돌 해변이 등 기대고 앉았다. 해수욕장이 드문 통영에서 비진도 해변은 피서객들에게 이름난 곳이다. 해수욕장 인근의 외항마을은 대부분의 집들이 민박을 친다. 대형 팬션도 서너 채 들어섰다.
"집도 이층으로만 해서 마을이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을텐디 멫 집만 잘 살라고들 집을 높이 올리니 못 사는 사람만 더 못 산다."
노인은 관광업의 혜택이 마을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재력 있는 몇 사람이 대규모로 고층의 팬션을 지어놓으니 관광객들은 허름한 민박은 잘 찾지 않는다.
비진도에는 제삿날이 같은 집이 여럿이다. 운명을 가른 것은 1959년 음력 8월 14일, 추석 전날이었다. 그해 한반도의 수많은 인명을 거두어간 사라호 태풍은 이 섬 어부들도 떼죽음으로 내몰았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앞 바다의 정치망 그물을 걷으러 간 섬의 남자들 아홉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삶을 건지는 그물이 자주 죽음의 덫이 되기도 하는 섬 살이.
"이래갖고 십년만 있으면 도깨비가 나겠구만."
고갯길을 걸어 내항마을로 간다. 산비탈 밭에서는 땅 두릅 수확이 한창이다. 땅 두릅은 봄철 한산도와 비진도를 비롯한 한산면 일대에서 가장 큰 효자 작물이다. 주민들은 시금치처럼 오래 뜯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땅 두릅은 수확 기간이 이 십여 일 안팎으로 짧다. 밭에서 수확한 두릅은 깨끗이 씻어 건조한 뒤 다음날이면 한산도 농협으로 보내져 경매된다. 수확 초기에는 2킬로 한 상자가 1만 7천원 까지 간 적도 있었지만 요즈음은 1킬로에 5천 원 선이다. 봄이 와도 이제는 더 이상 산과 들에 나물 캐는 처녀는 없다. 두릅나물 캐는 여인은 일흔 넷.
"때가 다 됐어요. 갈 때가 다 됐어요. 자녀들은 호빡 나가고 없고, 젊은 사람들은 아애 없어요."
길고 고단한 노동에 지친 생애의 벌판, 노인들만 남은 들은 생기가 없다. 해변에서도 밭에서도 노인들은 온통 생을 떠날 궁리뿐이다. 비진도는 반농반어의 전형적인 섬마을이다. 파도가 세서 물고기 가두리 양식은 어렵다. 바다에는 미역이나 전복, 해삼, 멍게 등을 가두지 않고 자연 상태로 양식한다. 내항마을 어느 창고 앞, 노부부의 두릅 손질이 한창이다. 노인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섬에 100가구 800여명이 살았다고 기억한다.
"그때는 작은 섬에 사람이 너무 많다 싶었지. 50가구만 살면 안 살아지겠나 했는데."
지금 섬에는 50가구, 120여명만 겨우 남았다.
"명절 때나 돼야 동네가 사람 사는 것 같지. 애 울음소리도 없어. 이래갖고 십년만 있으면 도깨비가 나겠구만."
창고 옆 텃밭에는 무슨 작물을 심었는지 밭두둑이 단정하다.
"여기 콩 심으셨어요."
"아니 팥 갈았어요."
"콩 심을 때가 안됐나요?"
"콩은 날짜 따져 갈면 안 되고, 감나무 이파리 세 잎 날 때 갈면 딱 좋습니다."
감나무 이파리 세 잎 나는 날 콩을 심는다! 노인의 말씀이 한편의 시(詩)다.
수포 가는 길
외항에서 수포 마을로 가는 해안 길은 오래된 흙길이다. 한동안 청보석의 바다가 보이는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가던 길이 숲으로 사라진다. 해변의 숲은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새 소리로 아득하다. 길가에는 사람의 자취 없다. 진달래와 산 벚꽃은 어두운 숲길의 가로등이다. 절정으로 피어오른 선홍의 진달래꽃, 하얀 산 벚꽃의 점등으로 숲은 눈부시게 환하다. 파도는 동백나무, 잣밤나무 숲 아래까지 와서 일렁이고 겁 많은 염소들은 인기척에 놀라 숲속으로 달아난다. 사람을 밀어내는 아스팔트길과 달리 흙길은 사람을 품어 안는다. 아스팔트길은 단절의 길이지만 흙길은 소통의 길이다. 길 가는 내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새들과 바람과 나뭇잎과 바다, 바다. 간간이 들리는 어선의 기관소리까지도 이 숲의 흙길에서는 자연의 소리로 포섭 된다.
길의 끝에 수포마을이 있다. 몇 집 되지 않는 마을은 인적이 없다. 마지막까지 살던 노인들이 이승을 떠난 뒤 마을은 폐촌이 된 것일까. 그래도 눈 밝은 수행자 하나 있었나 보다. 마을은 이제 절 골이 되었다. 허물어져 가는 집들 사이에 절이 들어섰다. 법당을 새로 지었고 빈집을 고쳐 요사채로 만들었다. 그러나 절도 조용하다. 살던 스님도 외로움에 지쳐 떠나버린 것일까.
외항마을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마을이 사라진 내력을 듣는다. 수포 마을 사람들은 강제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섬 노인은 그 때가 납북어부 사건으로 한참 시끄러운 뒤끝이었다고 기억한다. 1977년 통영호 납북 사건이 있었고, 비진도 이웃 섬, 부지도의 한 어부도 납북 되었다. 부지도에 살던 어부는 장어통발 어선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러 온 낯선 사람에게 선급금을 받고 따라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일련의 사건들 뒤 정부에서는 5가구 미만의 외딴 섬과 섬마을들에 대한 소개령을 내렸다. 그때 수포 마을 사람들도 모두 살던 집을 떠났다.
"통영도 살러 가고, 요기 큰 부락으로도 살러 오고."
수포 마을에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못했다. 최근에야 한 사람이 들어가 살았지만 그 또한 바로 떠났다. 절은 외항 마을 살던 여자가 이혼한 뒤 비구니가 되어 돌아와 지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비구니 스님도 오래 살지 않고 절을 육지의 어느 스님한테 팔았다. 절을 산 스님 또한 상주하지 않는 듯하다.
소개령이 내려진 뒤 많은 섬들이 무인도가 됐다. 수포 마을뿐만 아니라 그 때 섬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다시 섬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이 떠난 뒤 섬들의 오래된 문화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자국민이 간첩에게 납치되어도 지켜주지 못하던 무능한 독재 권력이 '안보'의 책임은 늘 국민들에게 떠넘기던 시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생명의 안위를 국민들 스스로 지켜야 하는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병든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을 자유도 없는 자유 무역국가. 어린 중학생들까지 스스로 나서서 생명의 '안보'을 지켜야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는 대체 누구의 나라일까. '국가안보'를 이유로 섬의 한 쪽에서 주민들이 쫓겨날 때 섬의 또 한쪽에서 대통령은 처녀들 수발 받으며 수영을 즐기던 시대. 혹시 이 나라는 지금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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