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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의 역사를 통해 대중화의 힘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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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의 역사를 통해 대중화의 힘을 읽는다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9>

마우리야 제국이 붕괴된 후 인도는 오랫동안 마우리야와 같이 거대한 제국의 탄생을 보지 못했다. 중부에서는 브라만들이 나라를 세워 아쇼까의 흔적을 지우려 애를 썼고, 남부에서는 마우리야가 문명을 전파해 준 덕에 갠지스 강 유역의 선진 철기 문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이제 인도 전역에 카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 체계가 자리를 잡았고, 그 위에서 법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바야흐로 브라만 문명화를 이룬 것이다.

북부와 서북부의 상황은 이와는 조금 달랐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이후 많은 외지 사람들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아대륙 안으로 밀고 들어 왔다. 침략과 이주의 물결은 알렉산드로스 이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눌러 앉아 그곳을 통치하던 그리스 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족의 압박을 피해 인도로 대거 몰려들어 온 것이었다. 이는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아 그 유목민들이 중국 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기 때문에 일인데, 스키타이 족들이 어쩔 수 없이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그리스 인을 압박했고, 마침 그곳에는 마우리야 이후 강력한 세력이 형성되지 않아 그들의 침략과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도로 들어 와 정착을 한 그들은 힌두쿠시 이남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델리 지역을 넘어 멀리 갠지스 강 중류 유역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 후 중앙아시아로부터 샤까 족이 들어오고, 또 이란으로부터 파르티아 인이 들어왔다.

이후 인도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꾸샨 족이 들어 왔다. 꾸샨 족은 중앙아시아에 살던 유예치 족의 일파로 중국 변경을 떠돌다가 카불을 거쳐 힌두쿠시를 타고 내려와 인도아대륙 북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제국을 중앙아시아의 옥서스 강에서부터 인도아대륙의 갠지스 강까지 넓혔다. 꾸샨 제국은 현재의 타지키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를 걸쳐 형성된 고대 세계 최고의 코스모폴리탄 세력이었다.

그리스 인 이후 꾸샨 족까지 외래인은 하나같이 다시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 정착을 했다. 그들은 카스트를 받아 들여 인도의 사회 제도 안으로 들어 왔는데, 모두 끄샤뜨리야로 편입되었다. 그들은 왜 카스트 체계 안으로 들어 왔을까? 그들은 외래인으로서 무력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 온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정국을 안정되게 이끌어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그 사회의 기득권자인 브라만과의 연합을 꾀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당시를 기록한 여러 사료에서 브라만이 이구동성으로 왕을 '카스트의 보호자'로 명명한 이유는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왕은 카스트 질서를 지켜내고, 브라만은 공물을 받아 경제 사회적으로 세력을 축적하면서 두 세력은 연합해서 통치 하는 것이다. 기반이 없는 외래인은 브라만과 권력 유착을 하지 못하면 왕국을 편안하게 다스릴 수 없었다.

데칸 고원 이남으로 넓은 유역을 통치하던 사따와하나 왕국이 카스트를 받아들여 유지한 것 또한 같은 의미에서였다. 카스트는 원래 갠지스 중상류 유역에서 발생하여 애초 그 틀 안에 들어가지 못한 갠지스 유역 바깥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낮은 카스트로 편입이 되는 사실을 생각하면 굳이 사따와하나 왕국같이 토착민 왕국이 그런 제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남부 인도에 있는 사람이라도 힘이 있는 실력자 즉 왕이 처한 입장은 백성과는 크게 다르다.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하다면, 외부로부터 하루 속히 받아 들여 정권의 정당성도 취하고, 신화도 만들어서 권력도 강화하고, 사회 조직도 체계적으로 하고, 농업을 발달시켜 경제적 발전을 이뤄 국고도 채우고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북에서 내려 온 브라만들이 남의 실력자를 끄샤뜨리야로 삼아주는 것이고 남에서 나온 왕은 카스트를 보급하고 굳건히 유지하면서 브라만에게 물질을 안겨 주는 대신 브라만의 신화 만들기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서력 기원 초기, 이 시대 외래인들은 카스트를 적극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나 힌두교와 같은 인도의 종교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실 그 외래인, 특히 그리스 인은 근본적으로 인도인과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 만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대단히 영적이고, 직관적이며, 관념적인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관과 종교 문화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에게 불경을 통해 밀린다로 알려진 메난데르였다. 그는 우리에게 나가르주나 혹은 한자어로 용수(龍樹)로 널리 알려진 나가세나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불교 교리에 대해 물어 보았다. 이후 그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경전으로 편찬한 것이《밀린다왕문경》이다. 밀린다왕은 묻기를, 불교가 세상을 부인한다는데 그러면 이 사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왜 불교 신자인지를 물엇다. 또 이 세상에 남아 궁극을 추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도 물었다. 사회에 남아 있는 사람과 사회를 떠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결국 나가세나는 사회에 나간 사람은 나간 사람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대로 각자의 종교적 궁극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교리를 바꾼다. 파격적인 변화이자 실질적으로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다. 이것이 대승불교다.

그래서 이제 그 외래인들은 굳이 세상을 떠날 필요도 없고, 개념 파악도 쉽지 않은 해탈이나 깨달음 혹은 열반 등에 대해서 매달릴 필요도 없고,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 다음 세상에서 보다 좋은 곳으로 윤회를 하도록 기원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 시대 외래인은 우상이 없이 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해 쉽게 이해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불상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것이 부처의 말씀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지만 근본을 중시하지 않는 인도 땅에서 그런 변화는 대수롭지 않았다. 원래 부처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숭배하는 움직임은 붓다가 죽은 직후 혹은 생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붓다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일은 없었고, 보리수나 수레바퀴의 형태로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 시기에 와서 보다 공격적으로 바뀐 것이다.
▲ 인도의 생각과 유럽의 생각이 만나 새로운 문화를 낳았다. 이것이 꾸샨 시대가 보여준 문화 발전의 정수다.

그것은 종교에 대해 물질적 후원을 하는 사람들이 갖는 생각을 교단에서 적극 수용하는 전통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불상에서 부처의 모습은 전적으로 그리스 사람과 같이 생기고 그리스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그레꼬-로망 풍의 미술은 그들이 주로 세력을 형성하던 간다라 지역 즉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서 크게 성행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이를 간다라 미술이라 한다.
▲ 인류 문명의 보고인 아프가니스탄에 전쟁의 일상화만 남아 있다. 문명화와 전쟁은 둘 다 세력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유사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시대 우리는 문화 통합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북쪽에서는 그리스,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들어 와 간다라 예술이라고 부르는 문화 통합이 일어났고, 남쪽에서는 아대륙 내의 지배적 문명 세력인 브라만 체계를 토착 세력이 받아들임으로써 문화 통합을 이룬 것이다.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와의 접촉을 통해 고대 인도의 문화는 한층 다양해졌다. 중앙아시아의 발달된 기마술 특히 안장과 발걸이, 터번, 외투, 두건, 투구, 장화 등이 널리 보급되었고, 대규모로 말이 보급되었으며 이로서 고대 인도의 군사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로마로부터는 주화 제조나 유리 제조의 발달된 기술이 도입되어 경제가 한층 강화되는 결과도 가져왔다. 꾸샨 제국은 한(漢)과 로마 사이의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였고 중앙아시아의 많은 금광을 확보하면서 많은 양의 함량 높은 금화를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남부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에 광범위한 브라만 문명화가 이루어지면서 남부 여러 왕국과 사따와하나 그리고 꾸샤나는 모두 로마와의 왕성한 무역 교류에 힘썼다.

인도가 로마에 수출한 것으로는 향료를 비롯해 인도에서 나오는 진주·옥양목·보석·다양한 철제 식탁 용기 등과 비단과 같은 중국이나 중앙아시아로부터 들여와 전해주는 것들이었다. 인도는 이러한 물건들을 팔아 주로 금화·은화·토기 등을 사들여 왔다. 그로 인해 무역 수지가 일방적으로 인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마침내 로마는 인도와의 무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수공업과 상업의 성장 및 화폐 사용의 증가는 많은 도시의 번영을 촉진시키고 경제를 매우 발전시켰다. 이 시기는 고대 인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시기다.

이러한 힘은 적극적인 문화 통합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대는 마침 중국 한나라의 서역 경영이 열린 시대였는데, 이로 인해 인도와 중국이 직접 접하게 되었고, 두 제국의 문화적, 경제적인 교류가 활발히 행해졌다. 또 육로 뿐만 아니라 해로로도 중국과 인도는 로마제국과 교류를 활발하게 가짐으로써 인류 고대 문화가 훨씬 다양하고 성숙해졌다. 중국, 인도 그리고 로마 모두 고대에 가장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와 예술 또한 크게 발전한다. 인도에서는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강고한 카스트 체계에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보다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문화가 융성해졌다. 중국과 로마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통합은 현대 사회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통합은 전통적 사회에서는 대척점에 있는 사이 즉 남녀, 노소, 사제, 권력자와 국민 등의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갈등의 관계에 있는 노동자와 사용자의 사이 또한 더욱 허물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용자가 더 양보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도 마찬가지고, 국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사이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사고 체계에 안주하면서 기득권에 집착하면 양자가 모두 같이 도태될 수밖에 없음은 단호한 역사의 사실이다.

통합은 곧 대중화와도 통한다. 과거에는 돈 있는 사람들만 즐기는 문화였는데, 그것이 대중화되면서 문화 평등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외 여행이 특권층만의 권리가 아닌 지 벌써 오래 됐다. 마찬가지로 최근 일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와 사진 열풍 또한 그렇다. 전문 사진작가 뺨치는 샐러리맨의 사진, 전문 평론가를 능가하는 샐러리맨의 비평은 가히 문화 반란 수준이다. 물론 해외 여행이나 디지털 카메라 문화에 드는 비중이 만만치 않아 모든 국민이 그 대열에 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이 정도의 대중화도 그 동안 그 문화를 독점적으로 즐기는 일부의 권력을 많은 사람이 나눠 가지게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고 그로써 사회 권력의 평등화도 한층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일고 있는 나이 어린 중고등학생들의 열렬한 광우병 파문 쇠고기 협상 반대 촛불 집회 참여에 대해서도 또 다른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그 중고등학생들은 과거 대학생이나 노동자들이 독점적으로 전유했던 이데올로기 정치의 독점 권력을 순식간에 같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 과거 광장에서는 그곳에서만 통용되는 구호만 난무했는데, 이제는 생활 속에서 배어나오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그것도 일률적이지도 않고, 일사분란하지 않은 채, 소위 지방 방송의 목소리가 중앙 방송보다 더 크게 나올 정도의 그야말로 난장이 한 바탕 펼쳐진다. 한 쪽에서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면, 다른 쪽에서는 교육 자율화에 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건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징표다.
▲ 인문학을 살리는 것을 어찌 돈과 의례로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다양하고, 이질적이고 지역적인 통합과 대중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아직까지 요원한 것이 하나 있다. 인문학이다. 사실, 인문학을 하는 지식인 게릴라들이 사회 속으로 뛰어 들어간 지는 벌써 꽤 되었다. 주말이면 삼삼오오 모여 생각을 나누고, 인터넷을 통해 곳곳에서 토론의 광장을 만들고, 그러면서 시민이 함께 하는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 간 지도 십 수 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은 아직도 많은 학자들의 폐쇄적인 머리와 거미줄로 가득 찬 창고에서 나오지 못하고 완고한 틀 속에서만 갇혀 있는 실정이다. 그 폐쇄된 지식인들은 인문학 살리기를 하자면서 연구비 증액에만 혈안이 되고 있다. 오로지 그들이 유지해 온 것은 가져다주는 권력에 취해 있는 것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섞이는 것이 아름답고 강하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 방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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