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함께 필자를 찾아와 하나씩 물어보았다.
먼저 질문.
제 삶과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나요?
네.
다른 사람의 질문.
제 운명은 제가 선택할 수 있을까요?
네.
두 사람은 함께 이상한 눈으로 필자를 쳐다보며 말한다.
그게 말이 되는 얘기인가요?
네,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선택해가는 것입니다.
필자가 운명에 대해 연구한 지 30 년이 넘었지만,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음과 동시에 선택할 수 있다는 이 이상한 답변은 필자로서는 최선이다.
필자의 음양오행 클라스에서 반드시 듣게 되는 질문이고 또 하는 답변이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다.
양자물리학에서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고 가르친다. 이전의 고전역학에서 이런 얘기는 상호 모순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양자물리는 당연시한다. 나아가서 빛만이 아니라 물질 전체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과학의 최첨단에 선 물리학, 그 중에서도 현대 물리학에서도 이런 이상한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지극히 미세한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 물체의 운동은 확률론적으로만 설명이 가능하지만 더 큰 세계, 인간이 감지하는 물질세계는 엄밀한 확정론적 설명, 이른바 물리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운명이란 것도 이런 묘한 점을 끊임없이 실감나게 해준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선택을 한다. 이리 갈 수도 있고 저리 갈 수도 있다. 내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긴 시간 속에서 운명을 보면 대단히 확정론적으로 설명이 되니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나라와 세상의 일들과 같이 스케일이 커지면 더 엄밀하게 정해져있음을 느끼게 한다.
필자는 운명에 대해 연구해오면서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검증하게 되면서 무척이나 당황했고 고민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생각.
그 과정에서 선택이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사색도 있었고, 정해져있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도 부단히 다시 묻기를 반복해왔다.
심지어 이미 정해져있다면 내가 어느 순간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정해져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해져있다면 그것마저 이미 정해져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
그리고 화장실을 지금 가느냐 아니면 잠시 다른 일을 마치고 가느냐는 분명히 그 순간의 확률론적 문제이건만, 인생의 일들이 더 큰 시간 단위 안에서 보면 분명히 정해져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 실로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10 년 전쯤에는 통찰을 얻기 위해 대학교 때 열심히 읽었던 양자물리학에 대해 다시 공부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방에 가서 최신의 이론을 담은 책을 사서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필자가 운명상담을 업으로 시작한 것도 실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본격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사주를 통해 확인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주된 동기 중의 하나였다.
선택하기에 정해져있다는 이 모순된 얘기를 무엇으로 풀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많은 가설을 세워보고 또 검증을 했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삶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으면서도 매 순간 우리는 선택한다는 것이 옳은 결론이라는 것에 도달하게 되었다.
양자역학이 물질은 입자면서 파동이라고 여전히 설명하고 있듯이 팔자 역시 정해져있지만 선택하고 있다는 이 말이 최선이라는 판단에 이른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다음과 같은 문답을 만들게 된다.
이미 내 삶의 길이 정해져있는 것이라면 운명에 대해 미리 알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답변은 '물론이지요, 구태여 미리 알 필요는 없지요'다.
그런데 알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궁금하니 물어보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은가요? 답변은 '물론이지요, 미리 아시는 것도 궁금증을 푸는 데 도움이 되지요. 사물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자질이니 말입니다'이다.
또 운명의 길이 정해져있다는데 혹시 나쁜 운을 피해갈 수는 없는지요? 그것은 愚問(우문)입니다. 답변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가을을 피해 어떻게 다시 봄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이다.
더하여 어차피 정해져있다면 어차피 내가 노력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그러면 웃게 된다. 만일 노력하지 않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해보시지요. 노력하는 것은 물론 힘이 들지만 노력하지 않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소중한 삶을 걸고 실험을 해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쯤에서 정해져있지만 선택해가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좀 더 나은 생각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틈만 있으면 노력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런 노력의 바탕에 있는 것을 우리는 意志(의지)라고 한다.
즉 의지가 있어 노력하기에 선택을 하고 거기에 집중을 하는데, 그런 연고로 우리의 삶과 운명은 정해지는 것이며 정해져있는 것이라는 얘기이다.
의지를 바탕으로 선택을 하는 삶이기에 정해져있다는 말이 여전히 논리적으로 모순이라 여겨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운명이라는 것이 그간 운명에 대해 연구해온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고 생각이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비유를 하나 들고자 한다.
당신이 레스토랑에 갔다고 하자.
종업원이 메뉴를 들고 와 보여준다. 당신은 뭘 먹을까를 열심히 진지하게 고려한다.
모처럼의 기회이니 잘 구워낸 스테이크를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며, 달리 입맛에 맞는 파스타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테이크라면 또 어떤 스테이크를 주문할 것인지 거기에 자신의 기호를 어떻게 얹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려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뉴욕 스테이크를 미디엄으로 조리해줄 것을 주문한다고 하자. 분명히 당신은 선택을 했다. 그 속에는 당신의 입맛과 취향, 심지어는 음식에 대한 철학까지 들어간 주문이다.
여기서 그 레스토랑의 종업원이 예리한 관찰력과 고객의 기호를 잘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속으로 당신이 어떤 주문을 할 것인지 미리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뉴욕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순간 그 종업원은 내심 이 분은 이런 주문을 해올 것 같다는 생각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늘 쉽게 먹을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없는 식사라면 당신은 그 순간에 아무렇게나 즉흥적인 주문을 할 확률이 높겠지만, 여간한 기회가 아닌 만큼 당신은 주문에 신중을 기해 최대의 효용을 기대하면서 주문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의 주문은 선택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미리 정해져있을 가능성이 그만큼 더 큰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의지를 지니고 선택을 내리기에 이미 정해졌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되었기를 희망한다.
삶의 길이 선택하기에 정해졌다는 것은 결국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을 마구 함부로 사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없어도 되는 물건처럼 자신의 삶을 방치하는 자는 없지 않겠는가.
매 순간 내 의지로 최선을 선택하려고 노력하기에 이미 당신의 삶이 정해져있다는 말은 그래서 모순된 말이 아닌 것이다. 선뜻 믿겨지지는 않겠지만 이 말이 모순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약간은 납득이 가실 것이다.
삶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직장을 평생 다니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고 책임감도 있기에 변화에 대한 충동을 억눌러가며 다니고 있다고 하자.
그러나 삶에는 변화의 계기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 속에서 어찌 그런 기회가 없으리.
사실 변화의 계기는 수차에 걸쳐 찾아온다. 이 때 충동이 큰 사람이라면 수차에 걸친 변화를 모두 행복의 기회로 활용하려 들 것이고, 중간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그 중에서 한 두 번 정도 다른 직장으로 옮길 것이다.
물론 변화를 좋아하지만 겁이 많고 보수적인 자는 모두 다 참아내면서 한 직장에서 잘리지 않는 한 끝까지 봉직할 것이다.
결과에 대해 전혀 염려 없는 일이라면 몰라도 자신과 가족의 안위가 달려있는 일에 신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운명은 정해져있는 것이다. 변화의 기회를 마다하는 것도 선택이고 기회를 따르는 것도 선택이지만, 당신이 지닌 변화에 대한 충동의 정도와 염려의 정도에 따라 무수한 조합이 있겠지만 이미 당신은 그 중 어느 조합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에 먼 훗날 긴 시간 속에서 따져보면 이미 당신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나온 세월, 후회도 있겠지만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 역시 이미 정해져있는 운명이지만 역시 최선을 다해 선택해가자.
결국 운명이란 당신이 최선이라고 믿고 내리는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조합인 것이다. 비유컨대 당신은 이 순간에도 선택이라는 실을 가지고 운명이라는 천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결과 많은 갈림이 있는 인생길에서 최선을 다해 선택하면서 걸어갔더니 그 길의 끝에서 운명의 여신을 만나게 된다. 그 여신은 다정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건넨다. '내 자네가 여기로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네.'
우리의 삶과 운명이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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