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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금가문비나무를 베고 붕괴되려는 이명박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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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금가문비나무를 베고 붕괴되려는 이명박 정부

[서평] 존 베일런트의『황금가문비나무』

상상이 아니다. 엄연히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그리고 명백히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고 알려진 수메르 문명은 주변의 나무를 모조리 다 베어 쓴 다음 멸망했다. 나무는 건축자재였고 연장이었고 땔감이었고 그릇을 만드는 연료였고 수레와 전차, 배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숲을 기반으로 성장한 우르크, 라가시, 우르, 기르수 등등의 도시국가들은 숲이 사라지자 도시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불모지인 지금의 이라크는 수메르 이전 시대에는 울창한 삼나무 숲이었다.

이스터섬이라고 알려진 라파누이 섬 역시 야자나무와 하우하우나무, 꾸지나무, 자단목, 토로미로 등 수많은 수종의 나무들로 울창한 숲의 섬이었다. 라파누이 사람들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땔감으로 태우고, 그리고 거대한 석상 모아이를 만들고 운반하는 데 썼다. 마지막 남은 한 그루의 나무까지 다 베고 난 다음 황무지가 된 섬에서 일어난 일은 끔찍하다. 모아이 석상 문명의 붕괴――기아와 전쟁과 결국은 카니발리즘(식인풍습)으로 귀착되고 말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야 문명도 숲에서 태어났고 숲이 사라지자 문명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사례는 이외에도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수메르 사람들도, 라파누이 사람들도, 마야 사람들도 마지막 남은 나무를 베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 몰랐을까.

존 베일런트의 『황금가문비나무』는 아메리카 대륙, 특히 캐나다에서 벌어진 끔직한 벌목, 싹슬이 벌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설이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추리소설처럼 말이다. 베일런트는 단순히 벌목의 역사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 인간의 폭력과 근시안의 착취수탈 경제에 대해--자본주의 산업문명도 석유와 천연자원을 짧은 시기에 극단으로 착취 수탈하는 경제이다!--근원의 성찰을 강요한다.
▲ <황금가문비나무> (존 베일런트 지음, 박현주 옮김, 검둥소 펴냄)ⓒ프레시안

아메리카 대륙 북서부 연안에 퀸샬럿, 원주민들이 '하이다 그와이'(사람들의 땅이라는 뜻)라고 부르는 제도가 있다. 보통 높이가 90미터에 이르는 수백 살 먹은 시트카 가문비나무, 삼나무, 헴록 전나무, 연필향나무 등으로 울창한 온대 우림 지역이었다. 원시림과 함께 살아가는 새와 수달, 사슴, 담비, 늑대 등의 동물들, 바닷속 물고기들로 그야말로 에덴동산이나 다름없던 섬들이었다.

퀸샬럿 제도의 원주민인 하이다 부족들은 먹을 것 풍부하고 기후도 온화한 그 땅에서 다른 열대우림 지역의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은 자유시간을 즐기면서 일생을 살았다. 그들은 포틀래치라는 잔치를 벌이고, 설화를 만들어내고, 불후의 예술작품들을 창작하고, 부족들끼리 전투를 벌이고 그리고 거대한 카누들을 깎아 냈다.

토마스 그랜트 해드윈이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최고의 벌목꾼이었으며 아무 것도 없이 숲에 혼자 들어가서도 죽을 때까지 숲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생존 기술을 갖춘, 타고난 숲의 인간이었다. 그는 그러나 어느 때 자신이 하는 싹슬이 벌채의 끔찍함에 대해 근본의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야만의 벌목을 반대하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건다. 그리고 1997년 어느 겨울 밤, 퀸샬럿 제도의 유명한 황금가문비나무, 자연의 돌연변이이자 하이다족이 나무로 변신한 사람, 자신들의 조상으로 숭배하는 나무를 베어 버렸다.

그랜트는 황금가문비나무를 베어냄으로써 황금가문비나무 이외의 지역에서 잔인하고 초고속으로 벌어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숲 파괴, 싹슬이 벌채의 야만성을 고발하고자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랜트는 맥밀런 블뢰델 회사에 폭탄을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랜트는 알래스카 밑의 한 무인도에 난파된 카약과 비옷, 배낭, 도끼 등의 소지품들을 남겨두고 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벌목은 유럽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수색대 선두병사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열대우림과 온대우림은 철저하게 싹슬이로 벌목되어, 영국해군의 배를 만들었고 철강석을 녹여 철을 만들었고 유럽과 백인 이주민들의 집을 만들었고 그리고 밥을 지어주고 난방연료를 대주었다.

숲을 파괴하는 것은 단순히 나무를 베어낸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나무 우듬지나 숲 속에서 들끓고 있는 생명체들이 사라지는 것뿐만이 아니다. 온대우림 1제곱미터 안에는 1천 종의 생명체 2백만 마리가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숲에서 한 발자국 내딛는다면 그는 무척추동물 1만 6천 마리의 등을 짓밟아 버리고 말게 된다.

더구나 나무의 광합성은 진정한 자연의 연금술이다. 공기와 물과 빛에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그 창조행위는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그렇게 8백년을 넘게 살아온 나무를 인간들은 단 몇 분만에 숲 바닥에 쓰러뜨려 버린다. 물론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연에 대해 무지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벌목처럼 끔찍한 학살은 없다.

퀸샬럿의 나무들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흑해 동부 연안, 칠레, 태즈메니아, 뉴질랜드 등의 온대우림과 마찬가지로 싹슬이 벌채의 희생자가 되어 버렸다. 하이다 그와이는 그야말로 달 표면처럼 변했고, 숲이 있던 땅은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1908년 사냥꾼들의 총에 마지막 4마리가 죽음으로써 도슨 툰드라 순록이 멸종된 것과 마찬가지로 헤이릴 수조차 없는 생명체들도 사라져 버렸다.

맨처음 퀸샬럿 제도에 등장한 현대문명의 학살과 폭력 희생자는 수달이었다. 그리고 하이다 부족 자체였다. 북태평양 수달은 사람의 머리카락 수가 10만개 정도인데 견주어 2.5제곱센티미터 당 60만개에 달하는 그 털이 문제였다. 최상의 털가죽으로서 수달은 황금 그 자체였다. 수달 한 마리가 지금 우리 돈으로 수백만 원이 넘었다. 수달 한 마리를 유럽이나 중국에 팔면 한 마리당 1800퍼센트가 넘는 이윤이 나왔다.

당연히 수많은 수달 상인들이 퀸샬럿 제도를 드나들었다. 아메리카 동부 연안이 대구, 목재, 모피 무역으로 한 세기 이상 자본주의의 부를 창출해냈다면 서부 연안의 첫 번째 광기어린 자본주의 상품은 수달이었다.

하이다족은 재빨리 자본주의의 상품 판매술을 터득했고 이윤에 미처 마구잡이로 수달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수달을 판 그 돈으로 하이다족은 순식간에 총을 사들이고 유럽의 문명세계의 상품경제에 깊숙이 편입해 들어갔다.
수달은 번식이 느린 짐승이다. 1830년이 되자 수달은 버팔로나 사슴, 비버, 또다른 동물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850년대 수달 무역은 갑작스럽게 붕괴되었다.

그리고 돈벌이 욕심에 모피 충동을 뒤쫓아 무모하고도 맹렬하게 편승했던 하이다 족은 파멸을 맞이하고 말았다. 수달은 하이다족 사람들에게 영혼의 벗 이상이자 의복 재료 이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강철 무기들이 녹슬고 유럽산 의복들이 넝마로 변해가는 동안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 그리고 성병이 하이다족을 덮쳤다. 당연히 굶주림도 닥쳤다. 수 만 명의 토착민들이 죽었고 결국 하이다족은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나무가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가문비나무가 최상의 비행기 재료임을 확인해 주었다. 전쟁을 치루기 위해 퀸샬럿의 가문비나무가 벌목되기 시작했다. 하이다족은 다시 벌목꾼으로 변신했다.

아메리카 토착 원주민들을 환경보호주의자들의 원형으로, 유럽인들이 침략해서 땅을 파괴하기 전까지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숭배하면서 그 땅을 가꾸어 온 아메리카 대륙 에덴동산의 청지기로 묘사되는 것에 대해서도 베일런트는 비판한다. 하이다 부족의 경우 수달이 토착민들의 생활에 그렇게 중요했고, 스스로가 생태계의 리듬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을 지녔으면서도 이 생명체를 멸종 직전까지 몰아갔다.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벌목은 유럽,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등 세계 전 지역의 삼림을 부숴버리는 벌목재벌 맥밀런 블괴델과 같은 벌목회사에게는 수확이자 돈벌이였다. 벌목꾼들에게도 위험한 돈벌이 일이었다. 하지만 싹슬이 벌채가 지나간 뒤의 산은 소름끼치는 끔찍한 참화였다.

그렇게 북아메리카 서부 연안의 삼림이 90% 이상 사라졌고,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숲 60%가 사라졌다. 인도네시아에서 브라질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에 걸쳐 열대우림과 온대우림은 사라지고 있다.

라파누이의 비극과 무지, 폭력과 착취의 자살 문명 역사는 지금 지구 규모로 커져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예수나 마호메트나 부처가 자본주의 산업 사회에 나타난다면 아마도 그들은 틀림없이 대량으로 약물을 투여하는 정신병원 감옥 안에서 번민에 시달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종교 체험을 망상, 착각, 정신병 증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랜트는 강한 종교 체험을 체험한 숲의 청지기였다.

그랜트가 황금가문비나무를 쓰러트린 행위는 싹슬이 벌목을 고발하는 강한 종교행위였다. 그는 온대우림 파괴의 실상을 그런 충격의 방식을 통해 온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그랜트는 지난 2천년 동안 남성 우위의 문명이 저지른 생명파괴, 숲 파괴의 범죄행위를 생각할 때 남성을 권력의 자리에서 숙청해야 한다고 제안한 사람이었다. 통화와 종교를 폐지하고 여성이 중심이 되는 산업화 이전의 작은 농업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한 때 최고의 벌목꾼이었던 그랜트가 어떻게 숲의 전사로 전환해 가는지 베일런트의 추적을 따라가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베일런트가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나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광우병 소를 수입하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명박 정부는 잘 모르는 것같다.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유전자 조작(GM) 작물을 수입허가 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명박 정부는 잘 모르는 것같다. 식량위기와 에너지 고갈의 거대한 쓰나미가 바로 코 앞에 몰려오고 있는데도 이명박 정부는 잘 모르는 것같다.

사실 광우병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성장과 개발에 미친 우리들 자신의 삶의 방식이다. 이명박 정부는 그 극점일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끈질기게 추진하고자 하는 한반도 대운하는 그 극점의 현실일 뿐이다. 마지막 남은 한반도의 황금가문비나무까지 베고자 하는 성장과 개발주의의 미친 축제일 뿐이다. 그랜트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점은 베일런트는 유나버머처럼 자본주의 산업문명을 고발하기 위해 생명체를 살해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말 그대로 황금을 채취하기 위해 황금가문비나무를 베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계천 인공 하천의 발원지에서 시작된 촛불의 저항이 촛불과 저항에서 머물러서는 안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 자신의 가슴 속에 암세포처럼 자라고 있는 성장과 개발 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를 제거하지 않는 한, 수메르 지역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린, 라파누이 섬 최후의 나무를 자르는,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붕괴는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존 베일런트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용한, 영국 해군의 석유시대를 연 윈스턴 처칠 말을 들어보자.

"저 아름다운 나무들을 엄청나게 베어 넘기고는... 저 엉뚱한 소리만 해 대는 신문들을 찍어 낼 펄프를 만들고, 그리고는 그것을 문명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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