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이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혁명 100주년이 되는 1889년부터이다. 이 해에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 프랑스혁명사 강좌가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875년에 수립되었으나 보수세력의 저항으로 힘든 시절을 겪어온 프랑스 제3공화정이 이때 와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프랑스 혁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혁명시기의 공화주의적 전통을 제3공화국과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이 강좌의 책임을 맡은 인물이 알퐁스 올라르(1849-1928)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역사가로서 그가 맡은 일은 혁명 해석을 통해 민주적 공화주의를 고취함으로써 제3공화정을 지지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 이전 구체제의 전제를 비난하고 1789년의 폭력혁명을 정당화했다. 또 1791년의 입헌군주제 헌법은 과소평가한 대신, 1792년에 국민공회가 공화정을 수립한 것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는 그것을 혁명의 절정으로 보았으며 그 독재적 성격은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그가 물러난 후에도 프랑스 혁명사 연구와 관련해 가장 큰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알베르 마티에즈(1874-1932)가 올라르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아예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맑스주의에 헌신했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모두 이를 본받았다. 그는 특히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 고무되어 공포정치를 주도한 로베스삐에르를 권력에 굶주린 독재자가 아니라 독재를 통해 프랑스를 구하려 한 애국적인 인물로 전력을 다해 옹호했다. 그가 파리 노동자들이 대중적으로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려 한 민주적인 정치가라는 것이다.
마티에즈를 이은 사람이 조르주 르페브르(1874-1959)로 그는 폭 넓은 연구로 맑스주의적 해석을 완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시대의 탁월한 연구자로서만이 아니라 혁명사를 연구한 모든 세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한 연구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가들이 추구하려 한 것을 자신의 생각과 동일시했고 따라서 혁명에 반대하거나 그에 비판적인 해석들은 싫어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상당히 실증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르페브르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 알베르 소불(1914-1982)과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미셀 보벨(1933-)이다. 이렇게 70년대까지 약 80년 동안 혁명사 해석을 주도한 사람들은 다 맑스주의자들이다. 프랑스 혁명이 주로 귀족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계급투쟁으로 해석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맑스주의적 해석은 1970년대까지도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표준적인, 그래서 '고전적' 해석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것을 자코뱅-맑스주의적 해석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이 해석이 과격파인 자코뱅파의 입장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가 이렇게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자 그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그에 대한 도전이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맑스주의 해석은 과연 무엇일까?
맑스주의적 해석이란
맑스주의적 해석은 프랑스 혁명을 앞에서 말한 대로 새로 흥기한 부르주아 계급과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귀족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본다.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의 흥기가 혁명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물론 르페브르는 혁명에서 농민의 역할을 중시했고, 나중에 소불은 도시 소시민들의 민중혁명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수 세기 동안 성장하여 18세기에 오면 경제력이나 개인적 능력,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귀족계급보다 우월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이들은 토지가 아니라 동산적(動産的)이며 상업적인 새로운 형태의 재산에 기초해 있었고 또 계몽사상가들이나 경제학자들이 만든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의해 지지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은 시민적 평등이다.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의 특권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같은 법의 지배를 받고, 같은 기준에 따른 세금을 내고, 같은 공직 취임의 기회를 갖고, 같은 조건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1788년 군주제의 약화는 부르주아계급에게 그들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농민과, 도시의 소시민 대중들이 그것이다. 1788-9년의 경제위기로 고통을 받은 농민들은 혁명 초기에 광범한 농촌지역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봉건적인 영주권에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진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상큘로트라고 불린 도시의 소시민들은 혁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들고 일어나 혁명을 급진화시켰고 마침내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때로는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봉건제의 파괴라는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1789년의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계급이 과거의 특권을 대표하는 귀족계급을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것은 봉건제의 폐지(1789년 8월 4일)를 통해 과거의 특권적인 질서를 전복하고, 프랑스인권선언(1789년 8월 26일)을 통해 시민의 자유와 평등, 인민주권,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 법 앞에서의 시민의 평등, 언론과 출판의 자유, 사유재산의 신성성 등을 선언했다. 또 헌법(1791년 9월)을 만들었고, 입헌군주제를 넘어 민주적인 공화제(1792년 9월)까지 달성했다. 국민공회가 집권했던 공화국 시기가 혁명의 절정기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인류의 이름으로 혁명을 주장하고 선전했으나 실제로 그들의 목표는 좁게 제한되어 있었다. 재산 있는 자의 지배라는 자유주의적 태도가 그것이다. 따라서 구질서와 항상 타협하려 했고 대중의 진정하게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열망을 좌절시키려 했다(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주 간단히 구분하면 자유주의는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성인남자에게만 참정권을 주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남자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이다).
그들의 계급이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로베스삐에르를 실각시킨 1794년 7월의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저지른 군사쿠데타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프랑스혁명은 세계사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또 근대세계로 넘어가게 만든 결정적인 단계이다. 그리고 혁명이 만들어낸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이념이 되어 전 세계를 일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으로 만든 것은 맑스에 의하면 그 속도와 폭력성, 완전성이다. 가장 성공한 혁명이라는 말이다.
맑스주의 역사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점은 혁명을 자신과 일체화하는 경향이다. 특히 소불이 그런데 그의 논조는 마치 자신이 혁명을 대변하는 듯한 웅변조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역사적 객관성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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