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지 않은 항공모함 일본
필자는 그날 2시 반 '군대 없는 세상을 향해'라는 세션에서 발표할 예정이라 오전에는 미군 재편 문제에 대한 심포지엄에만 참석했다. 이 심포지엄은 중국과 대만, 필리핀, 일본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독일과 미국의 활동가들까지 모여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미군기지 재편 문제에서 세계 시민사회의 역할을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미국 친우봉사회의 조셉 거슨 씨는 일본이 진정으로 헌법 9조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는 재일미군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의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 역할 수행해왔던 일본은 이미 한국전쟁부터 미국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기지로서 사용되었으며 베트남 전쟁과 최근 이라크 전쟁까지 모두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헌법 9조 하에서 일본이 파병할 수 있는 군대를 포기하긴 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세계 각지의 전쟁에 부역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최근 미국과 중국의 대립 속에서 재일미군이 이 지역의 긴장을 촉발시키는 주요한 행위자임을 언급하며 재일미군이 존재하는 이상 헌법 9조의 가치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다.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군대로 보내죠?"
'군대 없는 세상을 향해' 섹션에는 스위스에서 군대 폐지 운동을 하고 있는 변호사 크리스포터 보베(Christophe Barbey)와 군대 없는 국가인 코스타리카의 대학 교수 카를로스 피사로(Carlos Vargas Pizarro), 그리고 한국의 병역거부자로서 필자가 발표를 했다. 서로가 지역과 국가, 개인이라는 층위에서 군대를 거부하고 없애는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사례를 통해 군대를 극복하는 경험을 공유해보자는 것이 섹션의 취지였다. (☞관련 기사 : 군대폐지 국민투표가 가능합니까?)
필자는 군대 폐지나 전쟁 포기와 같은 거대한 이야기가 선언처럼 울리는 이 행사에서 한 명 한 명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운가를 말하고 싶었다. 단순히 한국 현황을 요약해 발표하는 것만으로는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708호, 이등병의 편지'라는 다큐멘터리 중 병역거부를 했던 강철민의 어머님이 그가 복귀할 것은 애원하시며 우는 장면 5분을 보여줬다. 강철민은 2003년 겨울 당시 현역 이등병의 신분으로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한국군은 침략전쟁을 인정한 것이며, 그러한 군대의 일원이 될 수 없다며 휴가를 나온 뒤 복귀를 거부했었다.
발표가 끝나고 많은 분들이 못 다한 질문을 했는데, 한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영상 잘 봤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어떻게 어머니가 자식에게 다시 군대로 돌아가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리 감옥에 간다 해 어머니가 자식에게 총을 잡으라고 한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장황하게 답을 했다. 오랜 징병제로 군대라는 게 신성시되고 있으며, 병역거부로 전과가 생기면 이후 사회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등등.
그러나 세션이 끝난 뒤에도 그 할머니의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병역거부에 관한 강연을 했을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부모님은?'이다. 한국 병역거부의 역사는 부모님들의 통곡 속에서 이루어진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내가 들었던 질문은 어찌 부모가 자식에게 총을 잡으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군대 폐지 국민투표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이들 역시 우리의 징병제와 병역거부의 고통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마치 우리가 군대 없는 코스타리카가 낮선 것처럼 이들은 한 젊은이가 총을 들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 그의 가족이 통곡할 일이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세션중에 일본의 한 신문기자가 필자를 포함한 패널들에게 질문을 했다. 그 기자는 군대를 없애고자 하는 각 지역의 사례는 인상적이었지만, 지금 세계는 여전히 애국주의와 내셔널리즘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필자는 답했다.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은 베트남에서, 광주에서, 그리고 지금 이라크에서 가해자로서의 한국 군대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을 통해 군대는 우리나라를 지켜준다는 논리를 넘어 군대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 가해자로서의 기억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우리 민족과 나라에 대한 눈먼 사랑과 열정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에서 필요한 것은 애국자가 아니라 국가를 틀을 뛰어 넘어 스스로의 신념을 따르는 '비(非)국민'이다.
'세계는 9조를 선택하기 시작했다'가 두려운 이유
이후 세계대회를 평가하고 향후 계획을 들어보고자 행사 조직위원회의 가와사키 아키라 씨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는 4일과 5일 이틀 동안 연인원 2만 2000명 정도 이 행사에 참여했다며 조직위윈회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이라고 말했다. 문화행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던 4일뿐만 아니라 수많은 토론으로 이어진 5일 역시 6500여 명이 입장했다고 한다.
가와사키씨는 지난 3년간 진행해왔던 '글로벌 9조 캠페인'이 이번 대회의 토대가 되었고, 이 대회를 통해서 그런 활동을 더욱 더 확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세계 공통으로 표준으로 만드는 활동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그런 맥락에서 '세계는 9조를 선택하기 시작했다'라는 행사 슬로건이 이처럼 많은 이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이었다고 말했다. 9조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접근하는 방식은 현재 일본의 열악한 호헌운동의 상황에서 힘을 싣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헌법 9조를 일본과 아시아라는 시공간의 맥락을 지운 채 세계적인 틀로 전쟁을 반대하는, 군대를 포기하는 가치로서만 강조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평화헌법을 지켜낸다 하더라고 그것은 본질을 잃은 채 웃는 모습의 박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리포트를 마치며
필자가 이번 대회에 참가하며 일관되게 유지했던 관점은 하나였다. 그것은 탈맥락적인 평화운동·평화주의에 대한 경계였다.
일본의 평화운동을 맥락이 없는 평화주의라고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그 의견을 가진 이들은 일본의 반핵운동을 그 사례로 든다. 아시아라는 시공간적 맥락을 지우고 전쟁을 저질렀던 일본의 역사를 축소한 채 거대한 재앙만이 강조되는 히로시마. 그 히로시마가 아시아와 일본이라는 맥락을 지우기 위해서는 당시 히로시마에 강제노역자로 끌려갔던 2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은 추모의 대상에서 빠져야 했다. 1970년 히로시마 평화공원 밖에 건립된 원폭에 희생된 한국인들을 위한 위령비가 1999년에야 겨우 공원 내로 이전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헌법 9조 역시 맥락을 잊은 채 부유할 위험성 있다는 생각을 이번 대회를 통해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헌법 9조 1항과 2항의 명문들만 추앙되며 그것이 일본의 자랑으로 수출되는 모습은 이 대회를 통해서 예견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는 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진정한 연대를 이룰 수 없다. 그것이 만들어낸 어두운 면과 그것이 딛고 있는 외부의 희생에 대한 성찰 없이는 아시아와 세계의 민중들이 평화헌법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