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필자는 앞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이 제정된 배경과 유지되어 온 과정이 생략된 채 박수만 받는 헌법 9조는 위험하다고 느꼈다. 특히 헌법 9조의 어두운 면이 반드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필자의 인식을 일본 활동가들은 어떻게 판단할 지 궁금했다.
마에다 아키라(前田 郞) 일본 동경 조형 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현재 일본 민주법률가협회의 이사로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민중전범재판 등 진보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실천적 법률가이자 평화운동가이다. 이번 세계대회에서는 필자가 참여한 '군대 없는 세상을 향해'라는 세션을 총괄했다. 그런 그에게 평화헌법의 밝은 가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일본은 군대가 있는 국가이다
마에다 교수는 최근 '군대 없는 국가'라는 책을 썼다.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27개국을 직접 방문해서 살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책에서 헌법 9조를 가진 일본은 군대 없는 국가에 속해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은 군대가 있는 국가인가? 인터뷰는 거기에서 시작했다.
"일본은 현재 군대가 있는 나라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책에서도 군대가 없는 국가에 일본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자위대라는 것이 지금의 헌법상으로는 군대가 아니지만 국제법상으로는 군대라고 볼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이것은 군대 보유를 금지한 헌법을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한 이야기지만 달리 본다면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위대의 행동에 법적인 근거라든지 자위대의 규모나 무기, 임무 등과 같은 것을 보면 통상적인 군대와 똑같습니다. 아직까지 일본 정부는 자위대의 역할이 헌법에 기초해서 전수방위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군대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침략전략을 포기하고, 전수방위의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군대를 갖는 예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수방위의 개념과 군대는 병존할 수 있습니다."
전수방위는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았을 때에만 일본의 국토 안에서 방위적인 전쟁을 할 수 있다는 방위원칙이다. 이는 1970년대 등장한 논리로 자위대가 군대가 아니라고 말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 원칙 아래에서는 일본 영토 안에서만 대응이 가능하다. 따라서 자위대는 상대의 본토나 기지 등은 공격할 수 없기에 통상의 군대와는 다르며 철저하게 자위만을 위한 방위력이라고 이야기되어왔다.
그러나 계속되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서 자위대를 영토 밖으로 파병함으로서 전수방어 원칙은 부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4월 18일 일본 나고야 고등재판소가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이 위헌이라고 결정한 것 역시 그러한 자위대의 위상을 두고 일어난 갈등이다.
그러나 마에다 교수는 최근 전수방어의 원칙이 깨어져서가 아니라 그 원칙과 군대는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답을 해 주었다. 사실상 세상의 모든 전쟁은 방어전쟁으로서 수행되지 않던가. 미국의 이라크침략 역시 자국의 방어를 위해서라고 이야기되는 마당에 방어만을 위해 존재하는 군대가 어색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군대 보유를 금지하는 헌법 9조와 함께 존재하는 군대로서의 자위대. 바로 이것이 평화헌법의 어두운 면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의 희생 위에 유지되어 온 일본의 평화헌법
필자는 평화헌법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이 한국의 강력한 군사화였다고 생각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평화헌법을 유지하면서 군대와 전쟁을 부인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다른 나라는 더욱 전쟁에 가까워져야 했던 것은 아닐까? 2차 세계 대전 후 동아시아의 반공라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한국이 남북대치 상황에서 중무장을 했기에 일본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평화헌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마에다 교수는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일본 역시 평화롭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논리에는 납득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분명 미국은 지속적으로 일본의 재무장화를 요구했고 이는 일본 지배층의 이익과도 일치했습니다. 그랬기에 한국이 반공라인의 전초국으로서 그처럼 많은 군대와 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 반공라인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계획은 일본과 남한 모두에게 적용되었지만 일본 내의 거센 평화운동의 저항이나 한국의 군사독재 등 많은 조건들을 통해서 분명 남한으로 반공라인의 역할이 집중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화헌법9조 있었던 그 기간 동안 일본은 평화로웠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듯 합니다. 물론 지난 60년 동안 일본 군대는 군대로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972년까지 오키나와는 헌법9조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미군기지로 가득 찬 오키나와는 헌법9조가 미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항상 전쟁에 협력을 해왔습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까지 늘 협력해 왔으며, 직접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일미군의 주둔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긴장상태를 계속 고조시켜왔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하더라도 일본의 자본주의는 전쟁으로서 경제부흥을 이루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을 검토해 봤을 때 헌법9조가 있었던 60년 동안 일본은 평화로웠다는 말은 일견 타당하지만 의문표가 생기기도 합니다."
일본 역시 지난 60년은 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싸움의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일본 역시 평화롭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는 이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할 위험이 있다고 느껴졌다.
평화헌법이 일본과 같은 거대한 국가에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분명 냉전체제 속에서 다른 지역의 중(重)무장에 기대고 있었던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자신은 경(輕)무장만으로 세계체제 속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고 미국의 후견 속에서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에다 교수가 언급한 오키나와의 미군기기 집결 역시 헌법 9조가 만든 또 다른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다. 1972년까지 헌법9조가 미치지 않았던 미군정 하의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를 집결함으로서 일본은 훨씬 적은 미군 기지만을 '본토'에 들여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국민으로서의 병역거부자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해 보았다. 한국이 강력하게 군사화 되는 과정에서 병역거부자들의 고통은 침묵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이 문제가 사회운동으로서 만들어지고 제도적 변화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여전히도 병역거부자를 보는 사회적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과 평화헌법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다. 한국이 강력하게 군사화된 국가로서 존재해왔던 것을 딛고 유지된 평화헌법이라면, 침묵 속에서의 감옥행을 이어갔던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의 고통이 평화헌법의 또 다른 그늘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에다 교수는 이러한 관점에 동의를 표시하면서 병역거부자가 '비국민'이기에 그러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면이 있음을 말했다. 그는 얼마 전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로도 방송된 가네코 후미코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을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어떤 소식지에서 한국의 병역거부자가 일본에 왔을 때 비국민이 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본 적이 있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요즘 한 매체에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는데, 그녀 역시 또 다른 비국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고생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녀는 아나키스트의 사상을 흡수하면서 당시 일본이 벌이고 있는 전쟁과 식민지 정책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만났던 사람이 박열이라는 한국인입니다. 그 둘은 평생 동지로서 살아갈 것은 약속하고 같은 그룹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천황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암살을 실행하지 못하고 준비단계에서 검거되었고, 사형밖에 없는 대역죄로 기소가 됐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네코 후미코는 실제적인 암살 준비를 함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판에서 그녀는 자신은 천황제를 반대하며 그것을 타도하기 위한 사상을 가지고 있고, 박열과는 일심동체이기에 그가 한 일은 모두 내가 한 일과 같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이후 천황의 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지만 천황이 내려주는 감형을 거부했던 가네코 후미코는 결국 형무소 안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을 일본에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비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안에서 그녀는 계속 비난을 받았고, 친척과 부모 모두 그녀에게 등을 돌렸으며 결국 무덤조차 만들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녀의 무덤은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은 말하자면 일본에서 전형적인 비국민입니다. 그렇기에 일본에서는 모두에게 손가락질 당했지만 한반도에서는 따뜻하게 맞아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감옥에서 전향을 했고, 전쟁이 끝나자 살아서 출소했던 박열이 재일 조선인 안에서 영웅이 되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합니다. 박열은 이후 조선으로 돌아가 70세가 넘게 살았습니다.
우리 시대의 전쟁과 폭력은 국가라는 경계를 중심으로 추동되고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런 전쟁을 위해서는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국민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병역거부자들이 비난을 당하고, 여전히 가네코 후미코를 일본에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국민으로서 국가에 충성을 다하길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전쟁하는 국가에서 그들이 비난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재일조선인을 위한 인권연합의 사무국장을 맡는 등 재일조선인의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마에다 교수 역시 비국민의 한 명이 아닐까. 비국민은 국가의 틀을 벗어나서 자신의 신념을 쫓아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꺼낼 수 있다. 천황제의 허구성을,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한국 군대를, 그리고 재일조선인이 당했던 인권유린을. 그렇기에 그들은 소수이지만 진정 경계를 넘어 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재일 조선인 민족교육에 대한 제노사이드
마에다 교수의 프로필을 통해서 그가 제노사이드(집단학살) 분야를 연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노사이드는 대량학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학문영역이다. 이전까지는 독일인의 유대인 학살이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으로 제노사이드의 영역에서 주되게 논의되었지만 점점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로 그 영역이 넓혀져 가고 있다. 일본 학자로서 그가 어떤 문제를 제노사이드의 연구 대상으로 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이 질문에 최근에 일본에서 진행되는 활동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난 4월에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의 사무국장이었던 홍상진 씨가 전후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교육정책이 문화적 제노사이드로 볼 수 있는지 검토해 줄 것을 일본변호사연합회에 신청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이러한 차원의 문제제기가 없었기에 저희도 이 문제에 대해서 공부 중에 있습니다.
실제 유엔에서 협약으로 채택된 제노사이드 범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집단을 파괴하는 특별한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 의도가 있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인데 그 특성한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문화정책을 통한 제노사이드는 조약으로서 규정해놓은 제노사이드의 유형으로는 일치하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 생각으로는 1945년 이후에 일본 정부의 정책은 문화적 제노사이드 범죄로서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은 1933년 유대인 법률가였던 라파엘 렘킨이 전쟁범죄와는 다른 민족이나 인종, 종교나 사회적 집단에 대한 의도적 파괴를 규정하기 위한 연구에서 출발했다. 이것이 1948년 학문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1948년 '제노사이드 범죄의 예방과 처벌을 위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 of the Crime of Genocide'으로 공인된 국제법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UN 안에서 이 협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해자가 집단을 파괴하려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입증되어야 하며, 집단에 대한 파괴가 물리적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는 등 원래의 의도보다 많은 부분 축소되는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마에다 교수 역시 그러한 한계로 인해서 당시 일본의 문화정책을 제노사이드 조약 안에서 범죄라고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진행상황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물어보았다.
"1948년에 한신 교육투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미군정을 통해 재일조선인들의 민족교육에 대해서 폐쇄명령이 내려졌는데 이에 대항해서 재일 조선인들이 싸우다가 총을 맞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이때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변호사연합회의 권고가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권고가 운동의 동력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지금까지 민족학교를 졸업하면 일본국립학교의 입학시험에서 응시자격이 없었습니다. 민족학교는 정식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수험자격이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권고가 중요한 힘이 되어서 이런 것들을 시정하도록 한 사례도 있습니다."
마에다 교수의 의견을 따르자면 일본은 평화헌법이 시행된 1948년 이후에 일본 안에서는 재일조선인들에게 제노사이드 범죄가 일어난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생명의 위해가 아니었다고 하더라고 한 집단의 언어와 교육을 말살하는 것은 그것의 사회적 실체를 없애고자 하는 대표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평화헌법과 제노사이드. 이렇게 대비되는 두 개의 존재가 같은 공간과 시간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 평화헌법이 가지는 또 다른 그늘을 보여준다. 헌법 9조가 전쟁과 군대를 부인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공동체 내부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을 막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후 재일 조선인 민족교육 탄압에 대한 일본변호사협회의 조사과정을 계속 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인터뷰는 끝났다. 인터뷰 내내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가는 마에다 교수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후 다른 일본 활동가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일본 학계에서 소수 중의 소수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책임에 대해서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그의 소신이 일본의 보수적인 주류사회에서는 받아드려지기 어렵게 보였다.
인터뷰 내내 보여주었던 그의 차분함은 어쩌면 가네코 후미코가 법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보여주었다던 그 차분함과 같은 것은 아닐까.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 그 무엇에게도 억압받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차분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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