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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로 불붙은 반핵평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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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로 불붙은 반핵평화운동

[권혁태의 일본 읽기] <10>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

매년 8월이면 히로시마 나가사키 등에서 대규모 반핵평화집회가 열린다. 지금은 공산당계와 구 사회당계가 각기 따로 집회를 열고 있지만, 사실 주장하는 내용에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반핵에 공감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단체들이 참석해서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희생자를 기리고 핵무기 폐지를 선언한다. 최근에는 연례행사화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규모로 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반핵평화대회 중의 하나라는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대회가 처음 개최된 것은 1955년 8월이다. 이를 일본에서는 '제1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라 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해 8월 6일부터 8일까지 히로시마에서 개최된 1회 대회에는 세계 각국 대표단을 포함해 약 5천명이 참가했으며,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정당, 종파, 사회체제의 차이를 뛰어넘어 원수폭 금지 운동의 강화를 진행시킬 것을 세계에 호소"하며, "원수폭이 금지되고", "군비가 축소되어", "인류에 진정한 평화가 올 때까지"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실제로 이 대회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정파와 단체들이 참가했다. 좌파 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조합, 기독교/불교 등의 종교단체, 심지어는 우파 단체나 정당까지 참가하는 일종의 반핵 통일전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대회는 지금까지 분열, 대립 등의 '어두운 과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 경험을 한편에서는 일본의 '전 국민적 기억'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반핵평화를 위한 보편적 표상어로 자리 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것은 이 대회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나서 10년이나 지나서 개최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일본이 미군 점령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 기간 동안에 원폭에 대한 강력한 검열제도가 시행되고 있어서 원폭에 대해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불가능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1952년에 미군 점령 상태에서 벗어나자 드디어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자유로운 의견 개진의 기반위에서 세계대회가 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을 국민적 체험으로 확산시켜 이를 1955년 대회의 성공적 개최로 이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바로 1954년 3월 1일에 발생한 비키니 섬 피폭 사건이다. 비키니 피폭 사건은 피폭체험을 '국민적 비극'으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비키니 섬 피폭과 '원폭 참치'

1954년 3월 1일, 비키니 섬 동북동 쪽 80해리 부근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의 시즈오카(静岡)현 야이즈(焼津)의 참치 잡이 배 다이고후쿠류마루(第5福竜丸, 99톤)가 당시 부근에서 실험 중이던 미국의 원수폭탄에 피폭당해 약 3시간에 걸쳐 '죽음의 재'(폭발 후 지상으로 떨어지는 방사능 물질)를 뒤집어쓰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폭 당시 선원 중의 한 사람은 폭발직전의 섬광을 보고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미국 측은 당초 폭탄의 위력을 4∼8MT으로 예상하고 위험구역을 설정했지만, 실제로는 15MT에 달해 위험 구역 밖에 있던 856척의 선박과 도서 지역의 주민들이 피폭 당했고, 피폭자 중에 다이고후쿠류마루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승무원 23명은 두통, 구역질, 피부병, 반점 등의 증상에 시달리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증세로 고통을 받는다. 구보야마 아이키치(久保山愛吉)는 "피폭 희생자는 나를 마지막으로 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반 년 후 숨을 거두었고, 나머지는 이후 병원에서 공식으로 '원폭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 중 2003년까지 사망한 사람은 모두 12명인데, 이 중 10명은 간암이나 간기능장애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물론 비키니 섬 주변 지역의 주민 200여명과 미군 병사 28명은 방사능 피해에 노출되었다.

사건이 드러난 이후, 일본 사회는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였다. '죽음의 재'를 뒤집어 쓴 피폭자는 물론, 불안과 공포감으로 이 지역에서 잡힌 생선과 '죽음의 비'를 뒤집어쓴 농산물 등에 대한 소비가 대폭 줄어들었고, 특히 비키니 섬 주변 지역이 일본 참치 잡이 배의 어업구역임이 알려지면서, 참치 소비가 거의 정지되었다. 5월에는 다량의 방사능 물질을 가진 비가 일본 열도에 내리기 시작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소련 핵실험에 따른 방사능비가 북쪽에서 내려왔다.
▲ "확산되는 참치의 공포"라는 제목 하에 수산 시장의 혼란을 전하는 당시 신문 ⓒ권혁태

약 490톤에 달하는 참치는 '원폭 참치' 혹은 '방사능 참치'라 불려 전량 폐기처분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일본 최대의 참치 시장인 도쿄의 츠키지(築地) 시장은 3월 15일 이후에 모든 참치 경매를 중지하였고, 결국 '원폭 참치'를 비롯한 모든 방사능 수산물을 모두 땅 밑에 묻는 행정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 매설지점에는 '원폭 참치의 총(塚)'이 세워져 있다(현재는 시장정비계획의 일환으로 유메노시마(夢の島) 전시관으로 일시 이전). 다음 두 개의 문장은 이 당시의 피폭을 일본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단백질을 생선에서 섭취하고 있는 일본인 가정에서는 (방사능 오염에 대한)공포 때문에 생선을 먹을 수 없으며, 방사능에 오염된 생선은 모두 땅속에 묻었습니다. 생선가게는 생존권을 빼앗겼습니다. 가난한 일본의 피해는 13억 엔에 달합니다. 농산물에서도 방사능이 발견되었습니다. 생선도 농작물도 안심하고 먹을 수 없고 공기 중에 섞인 살인 방사능이 언제 우리들 몸속에 스며들지 모르는 공포가 일본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1954년 4월 6일, 주부연합회의 성명)

멀리 원양어업까지 가서 잡아온 참치는 방사능 때문에 이후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폐기처분했는지 모르겠다. 그 때문에 참치뿐 아니라 다른 생선까지도 팔리지 않게 되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어민들의 불행이 속출하였고 원수폭 실험이 계속되는 한 그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시민들은 몸으로 체험하였다(1954년 12월 『新女苑』)


다시 말하면, 일본 시민들은 원수폭의 공포를, 비키니 섬 피폭으로 발생한 방사능 생선 오염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그리고 사후에 '국민적 체험'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공포와 불안을 가지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을 보게 된다. 이 사건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갇혀 있었던 '피폭 체험'은 드디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나와 일본 사회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하게 된다. 그저 '먼 나라 이웃 나라의 과거'에 갇혀 있었던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이 고립에서 벗어나 국민의 공통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주로 생선의 방사능 오염에 대한 우려라는 생활자적 관점에서의 위기감이 반핵 평화운동의 기반으로 작용한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평화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던 시미즈 이쿠타로(清水幾太郎)는 "우리는 모르모트가 아니다"라는 제명의 논평을 통해 비키니 핵실험에 의한 피폭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세 번째 피폭으로 규정하면서, 미국의 핵실험에 일본이 세 번씩이나 실험용 재료로 사용된 것에 대해 분노를 나타낸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아이러니하게도 핵무장론자로 전향한다.

생활자적인 평화관과 정치적 평화관

일본을 대표하는 저명한 역사학자인 도야마 시게키(遠山茂樹)는 195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전후 평화운동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흐름이 존재했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2차 세계대전 시에 결성되었던 반파쇼 전선이 미국의 마샬 플랜에 의해 붕괴됨에 따라 세계의 인민을 '평화'라는 가치를 통해 반파쇼 전선에 재 결집시킨다는 발상에서 태동된 평화운동의 흐름이다. 일본에서 열린 1949년의 평화옹호대회의 강령 중에 '전쟁과 파시즘 반대'라는 내용은 들어있지만,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피폭 체험에 관한 언급이나 '원폭 금지' 같은 문구가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은 이때문이다. 왜냐하면 '원폭'이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켰다는 사고에 입각할 경우, 원폭은 역사에 진보를 가져다준 '평화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참상을 운운하는 것은 반파쇼 전쟁의 의의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발상이 당시 진보진영에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또 하나의 흐름은 1954년 비키니 실험 후에 생성된 것으로 원수폭 금지 운동의 줄기이며 이는 첫 번째 발상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라 평하고 있다.

후자가 당시 사회주의 평화 관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주로 생활자적인 관점에서 평범한 시민들을 결집시켜 평화를 재구축하려 했다 한다면 전자는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평화관 속에서 평화운동을 자리매김하고 했다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미 핵무장한 소련에 대한 입장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가지 흐름은 1955년에 세계대회를 통해 일시적으로 합류하지만 결국 1960년대에 소련과 중국의 핵실험을 둘러싼 입장 차이를 통해 다시 대립이 격화되고 결국은 전혀 다른 형태로 분열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후자의 입장(생활자적인 반핵관)이 전자의 입장(사회주의적 반핵관)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이 사건의 가해자였던 미국이었다. 일본 내의 반미여론이 반(反) 기지운동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반핵여론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조기에 이런 여론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다이고후쿠류마루의 스파이 설을 유포하기 시작했다. 미 상하원 합동 원자력 위원회의 존 패스토어 위원은 "비키니 핵실험으로 일본인 어부가 입은 피해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사고보고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고 발언한다. 그리고 1954년 3월 23일 문제가 된 당시 콜 미 상하원 합동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튀어나온다.

"의회의 승인 없이는 미 정부의 손해보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보상을 결정하는 것은 의회의 권한이다. 일본인 어선 및 어부가 받은 피해 보도는 과장되어 있다. 이들이 일본인이 어업 이외의 목적을 가지고 실험 지역에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위험구역에 단순하게 물고기를 잡으러 들어갔다고는 볼 수 없으며, 분명히 다른 정치적인 목적, 예를 들면 소련의 의뢰를 받아 미국의 핵실험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위험구역에 들어갔다는, 이른바 스파이 설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미국은 스파이 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하기 시작하거나 이를 사회주의 진영이 세계적인 반미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도 그다지 분명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미국 측의 입장에 서 있는 듯한 인상조차 받는다. 당시 요시다(吉田) 친미 내각의 외무부장관이었던 오카자키 가츠오(岡崎勝男)는 1954년 4월 10일 미일협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폭실험 때문에 어업이 특정의 공해에서 배제되는 것은 일본에게 매우 큰 손실이다. 우리나라 경제는 어업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에 대해 원폭 실험을 중지하도록 요구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이 실험이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일원인 자유진영의 안전보장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발언으로 그는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게 되고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 발언에는 일본 사회의 '평화'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정확하게 지적한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1947년 평화헌법을 통해 무장을 포기했지만, 1950년 이미 자위대 전신인 경찰예비대 창설을 통해 재군비의 움직임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에 이어 3번째 비극을 말하고 있지만,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해 안전보장이 유지되고 있었다. 더구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은 미국 진영에 속해있음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미국의 핵우산 속에 있는 일본이 미국의 핵실험에 반대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 유메노시마 전시관내의 다이고후쿠류마루 ⓒhttp://219.109.2.236/atomica/pict/09/09030216/05.gif

미국의 스파이 설 유포와 일본 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생활자적인 관점에서 반핵운동을 진행하던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관점과의 결합 없이는 반핵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각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도쿄의 스기나미(杉並)구의 비정치적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핵서명운동은 전국적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서명자수는 순식간에 2,200만 명에 달하였다. 이 여론에 눌린 미국과 일본 정부는 결국 '향후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200만 달러(당시 약 7억 5천만 엔)의 위로금(배상금이 아니다)을 일본 측에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한다.

하지만 위로금 지급이 일본 사회의 분노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그 분노는 결국 1955년 세계대회 개최로 결집되었다. 결국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었던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은 참치로 대표되는 '국민적인 먹을거리'를 통해 생활자적인 관점을 획득함으로써 많은 비정치적인 시민들을 포섭하면서 정치적 자리 잡기에 성공한 셈이다. 물론 이 정치적 성공이 반드시 피폭자의 소리에 응답하는 형태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피폭 경험의 국민화 과정은 피폭자의 소리를 주변화시키는 과정 그 자체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선 다음 기회로 미룬다.

비키니 섬 피폭 유물과 피폭 선박은 지금도 도쿄 유메노시마에 자리잡은 다이고후쿠류마루 전시관에서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또 일본 독립 영화의 선구자이면서 대사 없는 영화 '벌거벗은 섬(裸の島)'(1960년)으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던 신도 가네토(新藤兼人)가 만든 '다이고후쿠류마루'(1959년)는 이 사건의 경위를 충실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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