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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를 통해서 본 역사에서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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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를 통해서 본 역사에서의 '발전'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7>

불교는 기원전 6세기 경 북부 인도에서 브라만의 최고 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브라만교의 제사 의례주의에 반발하면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당시 인도 종교의 여러 분파 가운데 한 모퉁이 정도였으나 차츰 시간이 가면서 인도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전역에서도 화려하고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는 막강한 종교이자 정치·경제·사회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았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불교는 인도에서 '발전'을 이루는 순간 스스로 '퇴보'를 하게 되었다. 신자가 많아질수록, 왕권으로부터 더 많은 후원을 받을수록, 사회로부터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수록 불교는 인도 땅에서 퇴보하다가 결국 소멸되었다. 어떻게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있을까? 발전이 퇴보고, 퇴보가 발전이라는 이 고민스러운 역사적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부처의 아들 이름은 라훌라(Rahula)다. 장애물. 한국어의 느낌을 살려 번역하면 '눈에 밟히는 놈' 정도가 되지 않을까? 부처는 왜 아들이 눈에 밟혔을까? 부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야 즉 환상이다. 환상, 존재하지 않는 것. 왜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고 하였을까? 부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초기 불교의 성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초기 불교는 애초에 관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대단히 급진적인 종교였다. 부처는 세상을 고통이라고 보았고, 세상을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부처는 세상을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세상 밖에서 철저히 혼자 걸식하고 유랑하며 살았다. 주로 깊은 숲 속이나 동굴 혹은 시체 유기장이나 화장터 혹은 큰 나무 밑에서 사회와는 완전히 격리된 채 살았다. 그러면서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야만 하고, 신의 손에 의존하지 않으며, 일체의 숭배나 의례로부터 독립된 그 무언가를 찾아 가야만 했다. 부처에게 그 무언가를 찾는 일은 궁극 즉 해탈이고, 그 해탈은 인과응보의 윤회 메커니즘을 깨는 것이었다. 인과응보의 윤회를 깨려면 인(因)을 제거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인은 사회적 행위와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궁극 즉 해탈을 이루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완전한 포기를 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할 때만 가능하였다.

그래서 부처를 비롯한 초기 불교의 걸승에게는 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이나 경제 행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생산 행위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행위이기 때문에 사회를 버리고 나가야 하는 이치와 맞지 않아서였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바리때와 최소량의 옷을 제외한 어떤 형태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갖지 않는 그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들은 하루하루 남이 주는 보시에 의존하여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그들 앞에 난관이 닥쳤다. 북부 인도는 1년에 한 번 큰 비가 내리는 우기가 3개월 정도 계속된다. 따라서 그 우기가 되면 세상을 돌아다닐 수가 없어 걸식을 못하게 돼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우기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걸식 유랑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들이 버리고 간 사회 안에는 힌두교 신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런 출가 수행자의 종교적 행위가 힌두교의 다양한 종교 행위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힌두교는 불교도와 같이 세상을 버리고 떠난 부분을 용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출가 수행자들에게 보시를 베푸는 것은 자기들의 세계관에 합당한 즉 좋은 곳으로 윤회하기 위해 선업을 쌓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시의 부유한 힌두 신자들은 초기 불교의 그 출가승들을 위해 자신의 사유지를 기부하여 우기 동안 그들이 편안히 기거하도록 베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해서 우기 동안의 안거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원래 우기 동안만 하기로 했던 일시적 안거 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정착 생활로 바뀌어 갔다. 그러면서 교단이 만들어지고 사원이 세워졌다. 사원이 만들어지면서 불교는 그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내부의 법규를 만들어야 했고, 정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기부를 받아야 했다. 결국 사회를 버리고 나간 불교가 사회 바깥에 또 다른 사회를 만든 셈이었다. 그것은 결국 사회 안으로 다시 들어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원이 사회의 물질적 기부 위에서 운영되면서 교단은 어쩔 수 없이 사회의 기부자와 타협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는 사회를 부정하고 나가는 전제 조건을 충족하는 자만 궁극의 목표인 열반을 추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사회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결코 불교도가 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경제적 토대를 부인할 수 없게 되어서 사회 안에 있는 사람도 불교도로 받아주게 되었다. 이른바 재가 신자다. 이제 교단은 재가 신자로부터 물질을 받고, 재가 신자는 교단으로부터 영적 가르침을 받는다. 시간이 가면서 재가 신자가 바치는 기부물의 종류도 점차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음식, 옷, 거주지와 같은 차원이었으나 점차 탑이나 묘와 같은 건조물은 물론이고 탑을 건조할 때 사리와 함께 부장될 보석 같은 것도 포함되었다. 이어 교단이나 승려가 사유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교단이 사유 재산을 축적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재가 사회에 경제적으로 매우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계에서의 재가 사회의 위치 상승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원래의 철저한 출가승만을 위주로 한 불교의 교리도 그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미 교단이 경제적으로 매어 있는 재가 사회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른바 출가자는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고, 재가 신자는 선업을 쌓아 윤회를 추구하는 이중의 목표가 설정되었다. 재가 신자가 추구하는 윤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서쪽에 있는 극락 즉 서방정토로 가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공덕을 쌓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이미 이 사회를 떠난 출가승의 사원에 물질을 기부하는 것이었다.

당시 힌두교의 제사 의례 기계주의에 식상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추구하면서 그러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자신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왕생극락을 허용해주는 불교에 크게 매료되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많은 재가 신자를 거느릴 수 있게 되었고, 사원은 날로 번성하고 풍성해졌다. 그러면서 불교 교단은 세상을 떠나지 않은, 그렇지만 자신들을 물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태어나서, 결혼하고, 죽고 하는 등의 통과 의례를 맡아주었고, 아픈 사람, 병약한 사람, 축복을 필요로 하는 사람, 불안한 사람 등을 위해 의례를 행사해줌으로써 그들과 더욱 밀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불교는 세상 안의 종교가 되고 있었다.

진리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경우도 많지만, 세상 속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지쳐 살고 있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에겐 그 세상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푸념 속이나 동경의 대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들은 병들어 쓰러져 있는 노모를 두고 세상을 등질 수가 없다.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자식 새끼를 팽개치고 떠날 수가 없다. 그들이 한 푼 두 푼 물질을 바치고 있고 그 위에서 구조화되어 버린 불교는 이미 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세상 안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불교의 원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병 없이 오래 살고 하는 것은 이제 버려야 할 세상일도 아니고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이제 그들이 바라는 바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신에게 간구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신, 저런 신이 수도 없이 많아지고, 이런 의례, 저런 의례도 수도 없이 많아진다.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기도회를 열거나, 전쟁 중에 죽은 장병의 혼을 위로하고 왕생극락 하도록 의례를 열어 주는 예는 인도에도 있고, 태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다.

불교 교리의 변화는 우선적으로 부처 관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제 부처는 애초의 인간 스승에서 신이 되었다. 부처에게 초능력이 부여되고 그에 대한 믿음과 숭배 의식이 널리 대중화되었다. 원래에는 세상일을 위하여 초능력 혹은 주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저급 행위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제 그들에게는 부처가 비를 내리고, 불을 끄고, 뱀에 물린 독을 치유하는 일을 하는 존재로 변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 부처의 유골은 숭배 대상 중의 으뜸으로 자리 잡았고, 부처를 우상으로 만든 불상 또한 널리 숭배되었다. 바야흐로 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 탑은 성자의 유골을 숭배하는 힌두교의 전통이다. 부처는 애초에 이것을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대중의 신앙은 결국 그 부처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다. 탑은 가장 비(非)부처적이면서 가장 불교적인 것이 되었다.

이제 승려든 재가 신자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인의 노력에 의한 진리의 깨달음을 통한 부처 되기는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공덕을 쌓는다거나, 도덕적인 삶을 산다거나 하는 것을 통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처의 사리를 숭배하거나. 탑을 세우거나 불상을 만드는 등의 행위를 통해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이 모래로 탑을 세우거나, 탑에 꽃을 바친다거나, 부처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더라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 곳에서나 '성불하세요'라는 말을 아무런 부담 없이, 누구나 하고 듣게 된 것이다. 각고의 깨달음을 통해서 도달하는 부처는 이제 옛말이 되어 있었다.

종교의 본질이 '세상을 떠나는 것'에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바뀐'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바뀜'을 두고 어떤 사람은 변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인도의 현상을 인도 바깥의 근대 유럽이나 기독교적 세계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결국 그러한 평가는 불교를 잘못 이해하거나 매도하는 것이 된다. 불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그리고 부처 스스로 이야기 하였듯이 (석가모니) 부처의 종교가 아니다. 이는 기독교가 기독 즉 예수의 종교라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불교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종교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길을 택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 안에서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앞의 길도 지극히 불교적이요, 뒤의 길도 지극히 불교적이다.

그래서 제대로 표현하자면 '변화'가 맞다. '변질'이나 '왜곡'은 기독교와 같은 근본이 있는 종교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곳에는 근본이 있지만 불교의 세계에는 근본이란 있을 수 없다. 정 있다면 근본이 없다는 것이 근본이라 할 수 있을까? 근본이 없다 함은 그 안에서 '유신'이나 '개혁' 혹은 '청산'이 성립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불교에 미신적 요소가 있다거나 일제의 잔재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청산해야 한다고 하는 말은 지독하게 비불교적이다. 유신이나 개혁을 하려면 기준을 삼아야 하는데 무엇을 근본으로 삼겠다는 말인가?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겠다고 한다면 - 그것이 철저히 비불교적이라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 불상, 탑, 명부전, 산신각부터 쓸어 없애야 하고, 극락이니 보살이니 하는 개념부터 모두 폐기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대중화에 성공한 불교는 이름만 다르지 그 바깥에 있는 힌두교와 똑같아졌다. 이제 세상을 부정하지 않고, 세상을 진리의 바다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출가하지 않는 승려는 브라만과 다를 바 없고, 불교의 여신은 생산을 추구하는 힌두교의 여신과 다를 바 없다. 힌두 사회에서는 부처가 이미 힌두교 최고의 신인 비슈누의 화신이 되어 있었고, 관음보살은 힌두교의 쉬바와 동일한 신이 되어 있었다. 불교도라고 해서 카스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숭배나 의례 행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로부터 지원을 안 받는 것도 아니라면 그 불교는 애초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다. 신도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나 애초에 가지고 있던 성격은 이제 대부분 사라지고 없어졌다. 불교는 초기 몇 사람에서 출발하여 대승 불교 시기에 들어오면서 국가의 비호를 받고 일부에서는 국교와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 물적 규모도 커지고, 그와 관련된 예술이나 문학 작품도 수없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신은 힌두교와 똑같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결국에 힌두교 안으로 흡수되었다. 결국 불교는 대중의 뜻을 따라 발전한 것이었는가, 퇴보한 것이었는가?

우리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발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국민 다수의 뜻이 경제 성장을 바란다고 해서 그러한 정책을 펴고 그 성과를 이뤄냈다고 해서 그것이 발전하는 것인가? 일인당 국민소득이 이만불이라고 해도, 그 땅에 방학이 싫은 그 배고픈 아이들이 부지기수라면, 88만원을 월급으로 들고 들어오는 이 땅의 아버지가 부지기수라면, 그것을 발전이라 할 수 있는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이 땅에서 아직도 베스트셀러로 읽히고 있는 사회, 그 사회는 그 난쟁이들이 살던 시대로부터 발전한 것인가?

보수적인 입장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의 고민을 찾을 수 있자. 다수의 뜻이 그렇고 역사가 진행하는 방향이 그렇다고 할 때, 쉽게 이혼하고, 성을 파는 것도 노동의 일환이 되고, 가족을 해체하는 따위도 과연 사회의 발전인가? 잘 먹고 잘 살게 되면서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식 세대수가 가장 적은 오이시디 국가가 되었다는 것도 발전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럼 발전인가?
▲ 한국에서 경제 발전은 양극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이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양극화를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대중이 원하고,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규모도 커지고 성과도 화려하게 나온다고 해서 과연 '발전'이라 할 수 있는가?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성장하는 것도 발전이라 해야 하는가? 역사에서 '발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인문 정신은 간 데 없고, 이윤만 활개 치는 지금의 세상에서 곱씹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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