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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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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21ㆍ끝>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불과 수삼일 전 돌아온 여행길이 아득한 옛 일처럼 아스라했다. 지난 이십 여일 11,840km를 달리며 만난 수많은 것들과 그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가슴에 그득한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아득하기만 했다. 로키 산(Rocky Mountain National Park)에서 만났던 맑은 호수들이 지금도 마음 가에 드리워져 있는데 가본 적 없는 먼 세상을 지나온 듯 꿈결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깊고 고요한 외로움으로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던 Bear Lake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숲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것 같던 Nymph Lake와 내 영혼 깊은 곳까지 비추어주던 Dream Lake의 잔물결이 내 마음 속에 아직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데 말이다. 그저 오래 전부터 이 자리에 서 있었던 듯 모든 것이 아련하기만 하였다.

로키 산과 헤어지는 아쉬움을 어쩌지 못해 산을 떠나지 못하고 하루 밤을 더 머물렀다. 산은 맞아줄 때처럼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안아주었다. 이제 짧지 않았던 긴 여정을 마쳤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짧은 여름밤 꽤 길었다. 뒤척인 밤이었지만 아침 햇살은 맑고 밝았다. 기운찼다.

길을 떠났다. 집으로 향했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떠남이었다. 열린 창 너머로 만년설을 이고 있는 로키 산이 지났다. 산도 나도 모두들 제 길로 떠나고 있었다. 끝없이 초원이 이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 사이로 난 길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길은 길을 불러들였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갔다.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대평원은 언제나 그 끝에 도시를 품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 캔자스(Kansas) 대평원을 지날 무렵 휘황한 불빛을 밝히고 있는 낯선 도시가 나타났다. 캔자스시티(Kansas City)였다. 밤하늘이 그대로 땅에 드리운 것 같았다. 가까워지고 있는 낯선 도시들의 불빛들이 별빛 같았다. 낯선 도시의 낯선 풍경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낯선 곳에서 만난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괜스레 눈물이 고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도시의 불빛을 멀리서 바라볼 때마다 때때로 슬펐다. 눈물이 났다. 언제부터였을까. 왜 그런 느낌을 지니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낯섦 때문이었을까. 살아가는 일의 낯섦 때문이었을까.

삶이란 낯선 길을 떠나는 여행과 같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일들을 만나는 것과 같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언제나 낯선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매 순간 순간들이 낯선 것들과 마주했던 낯선 시간들이었다. 잃을 수 없는 사랑을 잃고 소리 내어 울 수 없는 가슴을 부여안은 채 짐승처럼 꺼이꺼이 목 놓아 울며 아파하던 시간들처럼 낯설었던 순간들이 있었을까. 모든 것을 다 바쳐 이루고자 했던 믿음과 신념을 잃었던 날들처럼 낯설고 낯설었던 순간들이 있었을까. 영원히 함께 할 것만 같았던 동료들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때처럼 낯설고 두려웠던 순간들이 내 생애에 또 있었을까. 어느 날 문득 지나 온 내 삶을 바라보며 낯설게 느껴지던 순간들만큼 낯설음에 눈물 흘리던 순간들이 또 있었을까 말이다.

그 낯섦 때문일까. 나는 늘 낯설었던 그 순간들을 그리워했다. 그 순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련해졌다. 눈물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어둠 내린 낯선 도시의 불빛을 보며 눈물이 고인 것이 말이다. 그 낯선 도시가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이 말이다. 낯설고 아팠던 내 삶의 순간 순간들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본다.
'우르릉~ 우르릉~!'

멀리서부터 천둥 치듯 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밀려오던 강물은 내 앞에 이르러 완만해졌다. 언제 그렇게 요란하게 흘렀냐는 듯 유유했다.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지나 온 굽이마다 이고 있던 삶의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았다는 듯 사뭇 여유로워 보였다. 지는 해를 따라 붉게 물들고 있는 강물은 일렁일 때마다 은빛 비늘을 퍼덕이는 물고기처럼 싱싱했다.

잘도 예까지 흘러 왔구나.

굽이굽이 굽이치며 돌고 돌아온 강줄기의 끝은 보이지도 않는데 끊이지도 않고 잘도 흘러 왔구나. 갈래 길을 만날 때마다 수백 수천의 지류로 나뉘어 흐르면서도 서로를 잃어버리지도 않고 잘도 예까지 흘러왔구나. 그 헤어짐마다 다하지 못한 수많은 마음의 말들을 지닌 채 잘도 예까지 흘러 왔구나. 켜켜이 쌓이고 쌓인 그리움과 아픔들을 품은 채 잘도 예까지 흘러 왔구나. 흘러왔구나.

나는 강가에 서 있는 나무처럼 오랜 동안 어둠이 깃들고 있는 강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나는 '높은 산의 강'이라는 뜻을 지닌 쉐난도우(Shenandoah National Park)가 그리웠다. 지난 봄 잠시 만났던 쉐난도우가 그리웠다. 강은 어둠에 잠겼다.
▲ 흐르고 있는 포토맥강(Potomac River)ⓒ최창남

다시 맞은 아침은 흐렸다. 나는 흐린 날의 쉐난도우가 보고 싶었다. 간단한 짐을 꾸리고 길을 떠났다.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로 향했다. 흐린 날씨 탓인지 쉐난도우의 산들은 구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스카이라인 드라이브(Skyline Drive)를 타고 올랐다. 길은 산허리로 나 있었다. 산허리를 굽이치며 올라온 길은 하늘을 향해 열린 채 산을 넘고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산을 넘었다. 구름도 길을 따라 왔다. 내가 쉴 때마다 구름도 곁에 머물렀다. 산을 넘을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나는 그저 망연했다. 그것은 다른 세상이었다. 골마다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골마다 피어오른 구름으로 산은 외로워 보였다. 홀로 떠 있는 섬 같았다. 나는 출렁이는 물결을 헤치며 그 섬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망망대해였다. 산과 뫼는 물결처럼 굽이치며 끊임없이 넘실거리고 구름은 해무처럼 피어올랐다. 모든 것이 산인 듯 바다인 듯 했다. 길은 있어도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길로 들어서며 나는 때로 위태하고 때로 평온했다.
▲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Nymph Lakeⓒ최창남

길 아닌 길이 어디 있으랴.
지나면 길인 것을.
흐르면 길인 것을.

잠시 길을 세웠다. 전망대가 보였다. 전망대 앞으로 구름이 지나고 있었다. 구름 지나는 사이로 내려다 본 산 아래 저편에 쉐난도우 강(Shenandoah River)이 흐르고 있었다. 뱀처럼 꾸불거리며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241km라는 먼 길을 따라 흐르다 포토맥 강(Potomac River)을 만나 하나 되어 흐르는 강이다.

하늘이 흐려진다.
비기 오려나.

하늘이 검어지더니 이내 비가 오기 시작했다. 길을 떠났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굵어진 빗방울들은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지열로 인해 그대로 기화되기 시작했다. 새벽 바다가 해무를 뿜어내듯 숲은 안개를 토해냈다. 해무로 덮인 바다처럼 숲은 안개로 덮여갔다. 시야가 흐려졌다. 차를 세웠다. 창밖은 그대로 구름이었다. 가까이 있는 듯 멀리 있는 듯 첩첩한 뫼다마 구름 지나고 첩첩한 골마다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구름들 하늘을 지나며 산을 에워싸 산 중은 그대로 바다였다. 흐르는 강물이었다. 쉐난도우라는 이름 그대로 높은 산 위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 산 위로 흐르는 강, 쉐난도ⓒ최창남

골짜기 마다 피어오르고 있는 구름은 구름이 아니었다. 강이었다. 하늘을 흐르던 강이었다.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빗줄기 되어 내렸던 하늘의 강이 다시 제 줄기를 찾아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구름 곁에 머물러 하늘의 강으로 돌아가고 있는 구름들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흐르던 강줄기 땅으로 내려와 쉐난도우 강으로 흐르고 포토맥 강으로 흐르다 다시 제 흐르던 하늘 강 길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제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모두들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난 이십 여일 11,840km를 달려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온 우리처럼 그들도 모두 돌아가고 있었다. 떠남으로 잃어버렸던 제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협곡 곁 길 가에 선 나무들이 비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단풍나무도 상수리나무도 신갈나무도 있었다. 자작나무도 회색자작나무도 거기 있었다. 비바람에 잎이 흔들려 부딪힐 때마다 쏟아져 내리는 강물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고요하기도 했다. 구름만 강이 되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들도 저마다 제 몸 흔들어대며 때론 거칠게 때론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무들만 흐르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풀들도 모두 제 몸 흔들어 대며 흐르고 있었다.
▲ 산 위로 흐르는 강, 쉐난도ⓒ최창남

구름도 나무들도 풀들도 흐르고 있었고 길도 흐르고 있었다. 모두 흐르고 있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흐르며 오래도록 흐르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다 그리워졌다.
결코 그리워질 것 같지 않던 내 삶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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