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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시대 VS 자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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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시대 VS 자본의 시대

[기고] 미국 쇠고기 수입, 박경리 선생 타계, 그레이트 북스 100권 출간

2008년 5월 초, 한국사회에는 그 현재와 미래의 지향점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세 가지 의미 있는 사건이 겹쳐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한국문학의 웅대한 역사가 된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의 타계, 다른 하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결정을 내린 신자유주의 권력에 대한 민심의 반발과 저항,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판사 한길사가 지난 12년 동안 이루어낸 동서양 고전 시리즈 <그레이트 북스> 100권 발간입니다.
  
  각기 떼어놓고 보면 서로 인연이 없을 듯 하나 이 세 가지는 잘 들여다보면 오늘날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질, "하나의 몸을 가진 인문주의적 유기체"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자본이 모든 것을 거침없이 집어삼키고 권력이 자본의 하수인 또는 동맹세력이 되어 정작은 자기 탐욕을 추구하면서도 마치 대중의 욕망을 채워줄 것처럼 속이고 있는 현실에서 그걸 본질적으로 이겨낼 근거지를 여기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선전을 무작정 추종하게 하는 <욕망의 정치>는 바로 얼마 전인 지난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신분상승의 벽 앞에서, 사회경제적 궁지에서, 그리고 낙오의 불안감으로 소외되어가는 사람들의 핍박한 삶 속에서 <욕망의 정치>는 그 마법의 힘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유권자들의 표를 포대기로 주워 모은, 이른바 "CEO 경제 대통령"과 "뉴타운 공약"은 그 마법이 외운 주문의 실체였습니다. 사람들은 마법의 주문이 일으킬 환상적인 순간을 권력의 약속대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욕망의 정치가 밀어낸 것들
  
  그랬기에 다른 가치들은 뒷전이었습니다. 이 사회의 미래를 위해 깊이 생각해야할 바들은 거론조차 사치스러운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당장에 생존이 위협받아 힘들어 죽을 판에 생명이니 평화니 또는 성찰적 인간이니 격조 있는 사회니 하는 것들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혹시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가서 비로소 잠시 관심을 가져도 문제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식이었습니다. 진실보다는 당장의 실리를, 윤리보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완을, 그리고 성찰보다는 이기적 계산을 더 높이 떠받드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를 비롯한 대안사회의 현실성이 사라진 지점에 왔다고 여긴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이제 더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대상이 아니었고, 다만 그 운용의 기술만 제대로 체득하고 잘 굴러가게 하면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는 것이 대세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정권에 이어 이번 정권도 잇달아 열심히 내세우는 실용주의는 이러한 현실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이념과 사상은 소모적이고 비현실적이며 결국 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가 지속되어온 나라나 사회에서 인간의 본질을 묻고 미래의 좌표를 긴 역사의 눈으로 전망해보면서 철학적 성찰의 모험을 해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과 그 공동체가 살아온 시간의 의미를 새롭게 발굴하고 이를 세계적 차원의 화두로 삼아나가는 작업을 하는 일은 더더욱 외면당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돈과 지위와 힘이 되지 않는다면 모두 헛된 것이라고 윽박지르듯 주장하는 개인과 세력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인간됨의 의미를 짚어 나가는 일은 초라하고 무력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른바 인문학 또는 인문주의 정신의 위기나 실종은 그런 질문을 포기해버린 사회의 진상이기도 합니다.
  
  권력의 지배, 개인의 원자화
  
  그런 현실에서, 힘과 돈을 가진 자들은 자기의 탐욕을 위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다수의 대중들을 기만하고 희생시킵니다. 자본의 선전에 세뇌 당해가는 대중들은 점점 혼자만의 세포 단위로 "원자화"되어갑니다. "너와 나"의 관계를 진실로 복원시키는 노력보다는, 자기 앞 가림 하는 일에 정신이 혼미해서 자신이 살아가는 역사의 정체를 알아볼 겨를이 없고, 너와 나의 진정한 소통과 굳건한 연대가 나와 우리 모두를 힘차게 변모시켜 나간다는 것에 자신을 가지기 어렵게 됩니다.
  
  오래 전 한나 아렌트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이런 인간의 원자화가 권력의 전체주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입니다. 그런데 단지 역사상 존재했던 극단의 전체주의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욕망의 정치를 추구하는 지배체제 아래에서도 권력은 인간과 인간이 그 내면의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진정한 갈망을 서로 간의 대화로 삼는 일을 어떻게든 차단하려 듭니다. 권력이 설파하고 이끄는 대로 끌려가며 그것이 내세우는 목표가 곧 자신의 목표인 것처럼 사고하는 이들을 늘어나게 하는 일에 주력할 따름입니다. 대다수의 언론과 교육, 그리고 지식인 사회는 자본과 권력의 동맹세력이 되어 여기에 협력하거나 또는 더욱 적극적으로 선두에 나섭니다.
  
  이와 같은 풍토에서 다수 대중의 결정을 정통성 있는 것으로 승인하는 민주주의는 자칫 집단적 오류가 되기 쉽습니다. 여기서 시대의 중심을 잡으려는 이들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세뇌되어가는 대중과 함께 하는 길이 아니라, 이러한 대중과 정면으로 맞서는 각오가 요구되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중을 가르치려 드는 오만함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 기른 대중의 욕망과 환상을 깨는 일을 벌이지 않으면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는 구출되지 못하며 인간이 참되게 살아가는 길은 봉쇄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욕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꿰뚫고 그걸 가려내어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과 사회는 참되게 진보합니다. 그러나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이기적이 되는 인간과 공동체는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기 십상입니다. 또는, 본래 약속했던 것을 지키지 않는 권력에 승리한다고 해도 욕망에 대한 철학이 바로 서있지 않은 인간과 사회는 언제든 다른 기만에 속아 넘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진로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경우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일깨우는 과정을 반복해나가지 않으면 자기를 스스로 배반하고 맙니다.
  
  사상과 이념 그리고 철학과 역사는 이러한 우리를 진실과 하나의 몸이 되게 하는 힘입니다. 그건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다시피 결코 하루 이틀 만에 형성되는 능력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깊게 파고 넓게 주유(周遊)하며, 깎고 다듬고 채우고 그득 그득 출렁이게 해서야 비로소 물건 하나가 될까 말까한 그런 작업의 소산입니다. 당장에 이기적 욕망을 채울 수단으로 써먹는 것에만 눈을 밝히는 실용주의적 안목과 자세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없는 경지입니다. 그걸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고전이 정신적 자산으로 그 개인과 사회를 훈련시키는 시대와 현장은 내공이 단단해져갑니다. 그걸 가볍게 여기고 소홀히 방치하는 시대와 현장에서 인간의 삶이 갈수록 내용적으로 너절해지고, 그 정신은 경박하고 황폐해져갑니다. 그런 정신과 영혼에서 나올 것은 조잡한 이기적 욕망과 위선적인 논리,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시키는 폭력일 뿐입니다.
  
  박경리 문학의 인문주의 정신
  
  박경리 선생의 타계는 한국 문단의 거목이 세상을 뜨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서사적 장편문학의 업적이 겉으로는 칭송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일상이 되지 못한 시대의 아쉬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새삼 <토지>에 대한 여러 가지 발언들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그 <토지>를 떠받치고 있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성찰, 그리고 생명과 평화를 꿈꾸는 사회적 능력은 제한되고 있습니다.
  
  구한말부터 시작해서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백성들이 겪어온 세월의 의미를 다채롭게 관통한 박경리 선생의 문학은 주인공 서희를 통해, 빼앗긴 토지에 대한 욕망의 악착같은 복원이 부질없음을 일깨우면서 땅의 생명과 평화를 일구어낼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난 세월은 이와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치달아왔습니다. 잡는 일에는 치열했지만 놓으면서 사는 법을 배우는 일에는 무력하기조차 한 것입니다.
  
  문학만 놓고 보아도 장편은 기력이 달려 읽지도 쓰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일단 길고 두꺼우면 보지 않는 습성이 배어가고 있습니다. 빨리 결론을 재촉하는 현실에서 가슴에 담아둔 응어리를 하나하나 차분하게 풀 길은 없어지고, 경청의 대상이 없어지는 자리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사연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의 타계는 우리에게 지리산 자락의 역사에서 일구어낸 저 장엄한 <토지>라는 서사문학의 존재를 새롭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25년의 세월 동안 혼신의 힘으로 파고 들어간 문학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조소와 세상에 대한 탄식, 그리고 정신적 무력감을 이겨낼 수 있는 인문주의적 진지가 있음을 자랑스럽게 깨우치는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의 타계는 슬프나, 당대의 고전을 소유한 사회의 기쁨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주어진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당연히, 이걸 우리의 일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일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의 타계는 우리에게 존재하는 희망의 한 막강한 실체를 각성시켜준 역사의 한 대목입니다. 우리의 책무가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한편, 지난 며칠 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외쳐지고 있는 청계천 민주주의의 함성과 활력, 그리고 발랄함은 이 시대의 절망을 이겨낼 미래의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욕망의 정치와 그 늪에 빠져 있는 때에, 특히 여성과 청소년들이 욕망의 정치가 무장한 기만과 허위를 여지없이 폭로했습니다. 누구의 지휘도 없이, 누구의 사주도 없이, 누구의 선동도 없이 이들은 자신의 내면의 진실을 토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청계천 민주주의,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
  
  그 목소리의 일관된 요구는 단 하나였습니다.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 온갖 위선적인 논리와 주장으로 다수의 생명과 미래를 위협하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권력과 자본에 대해 이들은 매우 명쾌하고 활기차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기계로 자신을 몰아대는 제도와, 인간성은 제쳐두고 경쟁의 압박에 시달리게 하는 현실에 대해 이들은 분노했습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짓밟는 권력과 현실에 대해 <유쾌한 반란>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문주의 정신의 새로운 근거지를 보게 됩니다. 물론 이 세대는 영상과 인터넷과 클릭의 짧은 순간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기 넘치는 마음과 만날 수 있는 인문주의의 창출에 우리가 성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 비장한 시대의 인문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은 저 밑바닥에 잠긴 한(恨)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결국 흥(興)에서 힘을 얻게 마련입니다. "어이구, 어이구 내 팔자야"가 출발점일 수 있지만, 함께 어울려 "얼쑤, 좋다"의 추임새가 쏟아져 나오는 열정과 웃음과 희망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힘차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들과 만나게 할 인문정신의 자산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로 대표되는 우리 문학의 힘만이 아니라, 세계적 고전의 저작들이 우리의 글과 말로 읽을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길사 12년 동안 동서 고전 100권 출간
  
  한길사가 올해에 이르기까지 지난 12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성취해낸 동서 고전 총서 <그레이브 북스> 100권 발간은 단지 한 출판사의 출판업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중대한 <문화사적 사건>입니다. 1996년 논리철학자 화이트 헤드의 <관념의 모험>에서 시작해서 2008년 미학자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까지 한길사 그레이트 북스가 번역 출간해낸 책들은 인문주의적 역작들입니다. 그런 당대의 고전들을 탄생시켜낸 사회가 부럽기도 하지만, 그걸 꾸준히 우리사회에 소개하고 내놓은 한길사도 자랑스럽습니다.
  
  사실 이런 작업들은 당장에 돈이 되지 않습니다. 대중들이 쉽게 읽고 즐길 수 있는 저작들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출판여건 아래에서, 일개 출판사로서는 별로 달려들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지난 12년 해온 것은 경이롭기조차 합니다.
  
  단 몇몇의 작가 이름과 제목만 열거만 해도 이 책들이 얼마나 소중한 인류적 자산인가 하는 것은 확연해집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와 <봉건사회>, 좌구명의 <춘주좌전>, 헤겔의 <정신현상학>,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등 한 시대의 사상과 정신을 꿰뚫고 인간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해 들어간 노작들이 즐비합니다.
  
  한길사는 100권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200권, 300권 발간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바라기로는 이 목록에 우리의 작가와 저서도 포함될 날을 고대합니다. 세계적 수준의 사상적 영향력과 철학적 깊이, 그리고 한 시대를 거머쥐는 인문학적 역량이 발휘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면 그만큼 우리의 시대가 보다 치열하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세계적 고전과의 대화가 깊어지며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꾸준히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나의 독서목록
  
  저는 최근, 몇 개의 책을 구하고는 아주 즐겁고 신나게 독서의 기쁨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중국학 대가요 문인이자 사상가인 <다께우치 요시미 선집(竹內好 Selection)>, 그리고 로마사의 대가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의 로마사(The History of Rome)>, 그리고 고대사의 대가인 조지 로릴슨(George Rawlinson)의 <고대사의 일곱 제국(The Severn Monarchies of the Ancient Eastern World)>가 그 책들입니다.
  
  저의 전공은 자본주의의 세계사적 발전과정을 추적하는 세계체제론이고, 신학과 정치경제학을 하는 학자입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동북아시아의 근대정신 변화, 고대역사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문제에 대해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공 이외의 책들을 구하고 읽으면서 저는 이런 책들을 태어나게 하는 사회와 역사를 놀라운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 인문주의적 정신과 저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들이 세계를 자신의 눈과 목소리로 소화하면서 일본의 내면을 구성해나가는 노력은 우리가 배울 바 크다고 여겨집니다. 그 현실적 영향력과는 별도로,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성찰은 지금도 꾸준하고 성실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 이르면 그 고전의 바다는 드넓고 막대합니다. 그 무수한 세월 속에서 갈고 닦고 세워온 인문주의적 자산은 우리가 노력하고 진전해야 할 목표의 수준을 다르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의지도 새롭게 다지게 해줍니다.
  
  이제 길고 두꺼운 책들로 둘러싸인 고전의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도리어 그 고전의 가치가 더욱 힘차게 발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인류적 지혜와 자산의 결정체들을 우리의 현실에서 새롭게 만나 시대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저력을 갖지 못한 사회는 항상적인 위기에 처하기 마련이고 어떻게 해결의 지점을 발견해낼 수 있을지 모르게 됩니다. 한길사의 <그레이트 북스 100권 출간>은 그런 우리에게 던지는 오늘의 질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과 책무
  
  서사문학의 산맥이 된 <토지>가 주는 자랑스러움, 청계천 민주주의의 활기, 그리고 10년의 세월을 묵묵히 쌓아올린 그레이브 북스의 존재, 이 세 가지가 서로 하나 되는 길을 만들 때, 지금의 답답하고 힘겨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거대한 저력이 되어주지 않을까 합니다. 다채로운 지식과 인문주의적 성찰이 풍부하고 역사와 철학이 일상의 문화와 교육환경이 되며 그것이 결국 우리 모두의 유쾌한 축제의 현장이 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새로운 힘을 뿜어내게 될 것입니다.
  
  고전의 시대는 자본의 시대를 이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의 깃발입니다. <위대한 책들>을 읽는 현실에서 절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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