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깊은 숲 맑은 호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깊은 숲 맑은 호수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20> 로키 마운틴 국립공원 (하)

우리는 Trail Ridge Road를 벗어나 Bear Lake Road로 접어들었다. 열린 차창으로 만년설을 이고 있는 로키 산의 서늘한 기운이 들어왔다. 깊은 숲과 호수들을 지나오며 서늘해진 바람들이었다. 바위와 흙과 작열하는 태양과 타버린 나무들만이 머물던 땅 아치스(Arches) 국립공원에서 머물었던 시간들이 아주 오랜 옛날처럼 느껴졌다. 기억나지도 않는 오래 전 시간들처럼 멀리 느껴졌다.

어제 일이었다. 대지를 달군 태양의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갈증에 허덕였던 순간들도,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왼다리를 절룩이며 걷고 걸었던 순간들도,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해 그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도 모두 어제 아침 일이었다. 불과 하루 전 일이었는데도 그런 시간을 가져 본 적도 없는 것처럼, 그런 곳에 가본 적도 없는 것처럼 가물가물하고 아스라했다. 아득하기만 했다. 갑자기 변한 자연 환경 때문일까.

어제와 오늘은 지나 온 땅 유타(Utah)와 머물고 있는 땅 콜로라도(Colorado)의 차이만큼 달랐다. 아치스 국립공원이 있는 땅 유타 주는 정말 메마른 땅이었다.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달려도 보이는 것은 붉은 바위와 흙과 모래와 언덕에 자라난 잡초들과 키 작은 관목 몇 그루뿐이었다. 모르몬교도들을 이끌어 주었다는 죠수아 나무들만이 드문드문 서서 갈 길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 Trail 표지판ⓒ최창남

그러나 유타 주와 붙어 있는 콜로라도는 비옥한 땅이었다. 유타 주에서 콜로라도 주로 들어오면 급격히 변하는 색깔로 인해 누구나 '야아~!'하고 탄성을 지르게 된다. 누렇거나 불그스레하거나 회백색 정도인 유타의 산에 비해 콜로라도의 산은 푸른색이다. 숲은 울창하고 깊고 곧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콜로라도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가는 곳마다 푸른 산과 넓은 목초지와 호수들을 만날 수 있는 땅이다. 화씨 108도를 넘어가던 아치스의 열기는 콜로라도로 넘어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화씨 52도로 떨어졌다. 이런 차이들 때문이었을까. 하루 전 시간들이 지나 온 적도 없는 시간들처럼 아스라하게만 느껴졌던 것이 말이다.

Bear Lake Trailhead가 눈앞에 있었다. 우리는 Bear Lake를 둘러 본 후 Nymph Lake를 거쳐 Dream Lake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20억 년 전에는 바다 밑에 있었다는 로키 산은 여러 차례의 빙하기를 거친 탓인지 호수를 많이 품고 있었다.
▲ Bear Lakeⓒ최창남

많은 사람들이 호수 가에 머물고 있었으나 Bear Lake는 고요했다. 수면은 그저 머물러 있는 듯 잔잔하기만 했다. 잔물결도 일지 않았다. 오직 수면에 남았다 사라지는 바람 지난 흔적만이 그곳이 호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호수 주위로 빼곡히 들러선 소나무, 전나무와 가문비나무도 말없이 먼 길 찾아 온 길손을 맞이했다. 호수를 품었던 산도 호수에 드리워진 채 말이 없었다. 사위는 고요하고 깊은 산은 더욱 고요했다. 호수는 맑고 깊었다. 오래 전 쓰러진 나무들이 맑고 깊은 호수 바닥에 누워 수많은 생명들을 품어 살리고 있었다. 호수 주위로 빙 둘러 나 있는 Trail을 걸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가 반가웠다. 호수의 건너편 쯤 이르렀을 때 백송나무가 보였다.

이곳에 백송나무가 있다니.
▲ Bear Lake 곁의 벤치에서..ⓒ최창남

반가운 마음이었다. 나는 백송나무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를 둘러선 침엽수들 위로 눈 덮인 로키 산이 보였다. 호숫가에는 아직 피지 않은 작은 흰 꽃송이들을 품은 수초들이 가득했다. 수초들은 물속으로 뿌리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수초들 사이에서 어린 오리가 먹이를 찾으려 머리를 물속으로 박으며 자맥질에 한참이었다. 호수로 내려갔다. 손을 담갔다. 물은 차가웠다. 수면에 일던 파문이 가라앉고 잔잔해지자 얼굴이 비쳤다. 낯선 얼굴이었다. 수염 덥수룩한 낯선 이가 거기 있었다. 온 얼굴 뿐 아니라 목젖 부위까지 수염이 덮고 있었다.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낯선 내가 낯선 땅에 낯선 모습으로 거기 있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왜 저렇게 낯선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것일까.
▲ Nymph Lakeⓒ최창남

열심히 자맥질하던 어린 오리 한 마리가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맑은 아주 예쁘게 생긴 오리였다. '안녕!'하고 인사를 하자 내 말을 알아듣는다는 듯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고개를 까닥였다.

작별 인사를 하였다. Nymph Lake와 Dream Lake로 가기 위해 Emerald Lake Trail로 향했다. 숲이 깊은 탓인지 뜨거운 여름날인데도 길마다 야생화 함초롬히 피어 지친 길손의 마음을 위로한다. 조금 경사진 숲길을 부지런히 걸으니 샛노란 꽃을 가득 품은 수련으로 덮인 작은 호수가 나타났다. Nymph Lake는 너무나 황홀한 아름다움을 품은 채 부끄러운 듯 숲 깊은 곳에 머물고 있었다.
▲ Nymph Lake의 수련들..ⓒ최창남

호수를 찾은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을 잊은 듯 망연히 바라보다 다른 이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사진을 찍었다. 어둠이 일찍 깃드는 깊은 숲에 조금씩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탓인지 호수는 얕은 어둠에 잠겨 신비스러웠다. 물은 푸르고 짙었다. 호수의 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신비스러웠을까. 정말 이 호수에 숲의 요정인 님프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오래 전에는 살았을 것만 같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님프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살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일까.
▲ Dream Lake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최창남

나는 호수를 바라보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호숫가 얕은 물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조차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저녁이 오고 있음을 말해 주려는지 숲 깊은 곳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수련 위에 핀 샛노란 꽃들이 가녀린 모습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길을 나섰다.

길은 참 아름다웠다. Nymph Lake로 오는 길도 아름다웠지만 Dream Lake로 올라가는 숲길은 더욱 아름다웠다. 갈라진 바위틈에서 피어난 야생화들은 그 건강한 아름다움으로 눈부셨다. 갈라진 바위틈 좁은 터에 바람을 타고 날아 온 흙먼지들이 쌓이고 꽃이 폈다.
▲ Dream Lakeⓒ최창남

저 작은 풀 잎 하나 꽃 한 송이도 저렇게 살아가는 것을...

숲길은 생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바위와 바위, 나무와 나무, 숲과 숲 사이로 흐르던 물들도 그 투명한 맑음으로 내 마음으로 흘러들었다. 아름답고 놀라운 순간이었다. Dream Lake에서 흘러내리는 물이었다. 나는 흐르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작은 다리를 지나 작은 굽이를 지나자 산과 호수로부터 흘러 내려오던 작은 물길들이 만나 하나로 흐르는 곳에 다시 자그마한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다리 너머로 호수가 보였다.

Dream Lake는 신비로웠다. 호수 주위의 숲은 수 백 년 수 천 년을 살아오며 하늘에 닿을 듯 꼿꼿이 솟은 장대한 나무들과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진 나무들로 빼곡하였다. 소나무와 전나무, 가문비나무도 보이고 굴참나무와 신갈나무도 보였다. 마치 원시림에 들어선 듯 했다. 호수 안에도 쓰러진 나무들은 엇갈리고 포개진 채 겹겹이 누워 있었다. 어느 것이 숲인지 호수인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물은 티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눈물도 비칠 것만 같았다. 작은 흙 알갱이 한 알, 먼지 하나도 모두 또렷하게 보였다. 내 모습도 보였다. 수염 텁수룩한 내 얼굴도 거기 있었다. 호수 바닥의 흙 알갱이 옆에, 부서져 내린 나무 조각 곁에, 구멍 난 나무 기둥 속에, 시리도록 차가운 맑은 물속에 있었다. 편안한 듯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라보다 들려오는 새소리에 고개를 들으니 숲 나무 사이에서도 내 모습이 보였다. 산책을 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거기서 그렇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 Dream Lake 가에 서있는 비틀린 나무ⓒ최창남

나는 내가 올라온 곳으로 내려가기 위해 일어섰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숲에는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숲도 나무도 호수도 모두 웃는 것처럼 보였다. 소나무의 삐죽하니 솟은 잎은 웃고 있는 입 모양을 닮은 것 같았고 전나무와 가문비나무의 늘어진 가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여 들썩이는 어깨를 닮은 것 같았다. 신갈 나무와 굴참나무도 그 너른 잎 펄럭이며 박수를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둠 깃드는 숲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앞서 들려오던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길 옆 숲에서 오색딱따구리의 '딱딱딱딱 딱딱따다닥'하는 나무 쪼는 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노을 탓이었을까. 아니면 내리고 있는 어둠 탓이었을까. 숲길에 핀 야생화들은 더욱 빛을 발하며 눈부셨다. 아름다웠다. 숲도 호수도 나무도 꽃들도 바위도 바람도 오색딱따구리도 모두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숲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