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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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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요리

[오수연의 팔레스타인 명장면] <7>

한국에서 친구들*이 왔다. 우리가 '곰'이라 별명 지은 튼튼한 청년 '아메르'가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통 요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와 나는 시장에서 만났는데, 그는 이미 장을 보아 양손에 잔뜩 들고 있었다.

"거기 커다란 냄비가 있을까?"

한국 친구들이 가구와 함께 빌린 집으로 걸어가면서 아메르가 물었다. 그 집 찬장을 열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그럴 거라고 답했다. 만약 큰 냄비가 없다면 작은 냄비에 하라고 할 속셈이었다. 안 그러면 어쩔 것인가? 갑자기 냄비를 빌릴 데도 없으니.

"잘 드는 칼은?"

무거운 짐을 들었음에도 팔꿈치 굽혀 칼질하는 시늉을 하며 아메르가 또 물었다. 역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 안 들어도 썰리기는 하겠지, 뭐.

"기름은?"
"있어, 있다구. 그 친구들도 밥해 먹는데."

손님이 자기가 다 해줄 테니 아무 것도 하지 말랬다고 정말 아무 것도 안 해놓고 기다릴 리가 없는 한국인 친구들은, 저녁 다 차려놓았다. 밥과 찌개, 아끼지 않고 뜯어놓은 한국제 통조림, 현지 재료를 기발하도록 잘 활용한 한국식 반찬들. 명목상 식탁 한가운데를 살짝 비워놓기는 했으니, 아메르는 맛보기로 한 접시쯤만 만들어 그 빈 공간을 채우면 될 터였다. 솔직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장봐서 와준 성의만으로도 한국인들은 감동했으므로 팔레스타인 음식이야 했다 치면 그만이었다. 벌써 저녁 7시, 다들 시장했다.
▲ 키파 판니의 칵테일 '취한 토마토' 역시 일품이었다.ⓒ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천만에. 아메르는 팔을 걷어붙였다. 우선 그는 찬장을 칸칸이 열어 필요한 도구를 꺼내 조리대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칼이 여러 개이나 날을 만져보더니 하나만 마음에 드는 듯했다. 가장 큰 냄비를 열어보고는 그 안에 갓 해놓은 흰쌀밥을 다른 그릇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는데, 그 냄비라 봤자 충분히 크지 못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닭고기 토막에서 껍질과 기름을 제거하는 과정은 외과 수술에 가까웠다. 아메르는 그 큰 몸을 한껏 숙이고 닭의 근육을 한 결씩 들추며 실낱같은 지방마저 정교하게 파냈다. 그리고 말갛게 다듬어진 살덩이를 양 손에 소중히 받쳐 세 번쯤 물에 씻은 후, 레몬즙을 뿌리다 못해 아예 퍼부었다. 레몬 한 봉지를 거의 다 짜 넣었으니. 보통은 레몬을 반으로 잘라 원뿔형 기구에 돌려 즙을 내지만 그는 간단히 해결했다. 그 곰 발바닥 같은 손으로 레몬 반쪽을 꾹 움켜쥐면 손가락 틈으로 모든 즙이 찌익, 가느다란 비명을 지르며 탈출해 나왔다. 탁, 잘라 꾹 찌익, 꾹 찌익, 탁 꾹 찍 꾹 찍...... 혹시 그 주먹으로 사람 쳐본 적 있느냐고 나는 물었다. 딱 한 번 있다고 아메르는 답했다. 혹시, 혹시 그 사람 죽었느냐고 나는 물었다.

"아니, 아주 어릴 때 동네 아이들이랑 싸운 건데. 이후로 나는 싸움 안 했어."

아메르는 씨익 웃었다. 닭고기를 레몬즙에 북북 주물러 재워놓고, 이제 야채를 지질 차례라고 했다. 그런데 기름이 거의 바닥나 있었다. 밥해 먹는 (음식 만들어 먹는) 데 실제로 밥이 위주인 한국인 친구들은 그런 줄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기름 없이 요리하는 걸 상상할 수 없을 팔레스타인인 아메르에게 그건 분명히 문제였다. 한 명이 급히 뛰어나가 올리브기름을 커다란 걸로 한 병 사왔다. 가게에 작은 병이 없더라고 했다. 아메르는 흐뭇한 미소로 치하하고 야채를 마저 썰었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외투를 챙겨 입으며 기름 사러 갔다 오겠다고 했다. 기름 여기 있잖아! 우리는 합창했다.
▲ 별명이 '곰'인 아메르. 평소에는 장난스럽지만 요리할 때는 외과의사처럼 진지하고 철두철미하다.ⓒ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야채를 올리브기름으로 지지면 맛이 무거워. 옥수수기름이나 해바라기 기름이 있어야 해."

아메르는 설명했다. 그럼 올리브기름을 옥수수기름으로 바꿔올 게! 우리는 또 합창했다.

"닭고기는 올리브기름에 지져야만 해."

아메르는 진지했다. 또 한 명이 뛰어나가 옥수수기름을 또 큰 걸로 한 병 사왔다. 이로써 기름 두 병이 새로 생겼다. 조만간 한국 친구들이 돌아가고 나면, 그 두 병은 이미 있는 커다란 기름 한 병 먹어치우는 데도 일 년은 걸릴 복태와 내게 남겨질 터였다.

마침내 아메르는 커다란 냄비에 올리브기름으로 지진 닭고기, 옥수수기름으로 지진 갖가지 야채, 불린 쌀을 차례로 안치고 육수 부어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식탁에 샐러드가 있는데도 팔레스타인 샐러드를 만들어 주겠다며 오이와 토마토를 다졌다. 그때가 8시 반, 배고픈 한국인들은 그가 조리대로 돌아선 틈에 재빨리 손가락으로 식탁 위 반찬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아메르가 뚜껑을 여니 냄비 안이 그득했다. 우와!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아메르는 바람결에 사냥감의 위치를 추적하는 인디언처럼 예민하게 코를 씰룩대더니, 뚜껑을 도로 닫았다. 낮은 불에 30분은 더 끓여야 한다고 했다. 아이구, 우리는 한숨이 다 나왔다. 30분 후에도 아메르는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고는 15분만 더 참으라고 했다. 뜸 너무 들이면 쌀이 떡 될 텐데, 저러다 저거 탄다 타, 한국인들끼리 말하는 한국어의 어조가 점차 투박해져갔다. 아메르는 맥주를 따라달라고 애교 있게 한국식으로 잔을 두 손에 받쳐 내밀었다.

한 한국인이 말했다.
"지금 우리 주의를 돌리려고 이러는 거야."

무슨 말을 했느냐고 고개를 갸웃하는 아메르에게, 모두들 웃어보였다. 15분 후 조금만 더 기다리라면서, 아메르는 또 외투를 걸쳐 입고 레반*을 사러 가게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샐러드에 올리브기름과 레몬즙으로 만든 레몬 소스를 넣을 수도 있겠으나, 자기는 굳이 레반*으로 만든 소스를 넣어야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올리브기름 있겠다, 레몬 있겠다, 우리는 상큼한 레몬 소스를 사랑한다고 한국인들은 가슴을 치며 고백했다. 그러나 아메르는 나갔다. 자기 요리에는 레반 소스가 보다 어울리며, 한국인들은 가게에 가봤자 질 좋은 레반을 알아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가 나간 후 또 한 한국인이 말했다.

"지금 시간 더 끌려고 저러는 거지?"

뚜껑 대신 냄비에 쟁반을 얹고 아메르는 숨을 골랐다. 한국인들도 숨을 멈추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음식보다 아메르였다. 온갖 불평을 잠재우며 5분, 3분, 2분, 1분, 그리고 1분 더, 음식의 맛이 최대치에 이르는 바로 그 순간까지 끝끝내 끓이던 그의 마음속에서 끓고 있는 무엇. 뜻밖에 공들인 공연을 보게 된 관객으로서의 흥분마저 우리는 느꼈다.

크고 단호하며 또한 고요한 동작으로 그는 냄비를 뒤집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으로서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의 자세로 냄비를 살살 들어올렸다. 쟁반 위에 동그란 시루떡 모양으로 쌀밥, 야채지짐, 닭고기지짐이 층층이 쌓였다. 아메르의 '마크루베(거꾸로 뒤집기. 이 요리는 마지막에 냄비를 뒤집어야 하기 때문에 이름이 이렇다.)'가 완성되었다. 그는 작은 접시에 음식을 보기 좋게 덜어 우리에게 돌리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맛이 어때?"
▲ 아흘람 쉬블리의 닭구이.ⓒ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설사 접시에 담긴 것이 모래라 한들, 우리가 어찌 맛없다 할 수가 있겠니, 아메르. 팔레스타인 요리의 진수를 맛보여주겠다고 3시간이나 최선을 다한 네게. 3시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대충 하는 건 하나도 없이 철두철미 도 닦듯, 기도하듯 성심을 쏟은 네게. 그때가 10시였다.

"맛있어!"

우리는 합창했다. 요리는 정말로 맛있었다.

"그래?"

아메르는 아기곰처럼 웃었다. 맛있다는 그 한마디에 그는 아기처럼 행복해했다.

"이건 세계 최고의 마크루베야!"
"그래?"
"왈라! (신께 맹세코!)"

그리고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사진작가 아흘람 쉬블리의 닭구이와 꽃봉오리 피클, 시인 키파 판니의 생선찜. 자카리아 무함마드 시인과 살마 칼리드 선생님 댁에서 대접받은 요리는 다 훌륭했다. 실은 우리는 그 댁에서 손님이 아니라 식구(食口)였다. 그 많은 끼니를 같이 먹었으니.

*한국 친구들: 어린이 문화학교 '사과'의 선생님들.
*레반: 걸죽한 요구르트.


사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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