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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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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곁에서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19> 로키 마운틴 국립공원 (상)

아침은 눈부셨다. 하늘은 지난 저녁 보았던 Grand Lake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햇살은 눈부셨다.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했다. 창밖으로 지나는 사람들의 말소리들과 자동차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뒤로 Rocky Mountain National Park의 수려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커피를 타 창가에 앉았다. 보안을 위해 설치한 쇠 그물 창 위로 새가 날아와 앉으려는 듯 퍼덕였다. 날개 짓 소리가 요란했다. 지나는 이들마다 창살 사이로 새들에게 먹이를 던져 주었던 것일까. 창가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난 저녁 Rocky Mountain National Park로 들어가는 서쪽 입구인 Grand Lake Village에 도착하였다. 아치스 국립공원을 떠난 지 6시간 만이었다. 그랜드 호수는 멀리서부터 우리를 맞이했고 마을은 이야기 속에나 나올 듯 고즈넉했다. 한 여름 늦은 노을이 깃들고 있는 호수가의 마을은 이야기가 끝나가는 동화 속의 마을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갑판이 어수선한 채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배조차도 아름다웠다. 노을은 하늘을 타고 흘러 내려 호수까지도 붉게 물들였다. 잔물결이 일 때마다 호수는 반짝이며 붉은 빛을 토해냈다. 그 모습이 마치 저녁 강가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아무리 훌륭한 화가가 그린 그림일지라도 어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가슴 저린 아름다움을 뒤로 하고 밤을 보낼 곳을 찾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호수가의 아름다운 Lodge의 데스크에서는 안내인을 만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와 함께 요 앞 맥주 집에 가서 한 잔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 Rocky Mountain 국립공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최창남

우리는 마을에 들어오며 보아 두었던 Bighorn Lodge에 짐을 풀었다. 안내 책자에 이 Lodge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기도 하였지만 빅혼(Bighorn)이라는 이름이 더없이 정겹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늘 길을 찾는 듯 차를 타고 끝없이 오르고 오르기만 하던 Bighorn National Forest의 산 정상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를 품고 있었다.

산의 정상은 산이 아니었다. 산이라고 느낄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광활한 목초지였다. 그 사이 사이로 맑게 흐르는 시내들이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키 작은 나무들이었다. 목초지를 멀리서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바위들뿐이었다. 그 아름다웠던 땅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뿐이던가. 위대한 추장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는 리틀 빅혼(Little Bighorn)에서 카스터 장군의 기병대를 몰살시킴으로서 자신의 부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빅혼(Bighorn)이라는 이름은 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빅혼이라는 이름에 대해 품고 있는 나의 정겨움과 경이로움이 무언 중 전해졌던 것일까. Lodge의 주인장인 노인의 손녀라는 꼬마 숙녀는 매우 다정하고 친절했다.
▲ Rocky Mountain 국립공원에 들어서다..ⓒ최창남

Rocky Mountain Village의 저녁과 아침은 달랐다. 붉은 노을이 깊게 스며들은 저녁은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가 찾아들은 집과 같았지만 투명하도록 맑은 하늘을 지닌 아침은 먼 길 떠나는 나그네의 걸음을 인도하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우리는 그 햇살을 따라 길을 나섰다. Bighorn Lodge를 떠나 Rocky Mountain National Park로 향했다. 로키산맥은 미국의 중부를 떠받치고 있는 산맥이다. 이 산맥을 기점으로 광활하고 거대한 미 대륙의 동부와 서부가 나누어진다. 땅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함께 내리던 빗물도 나뉘고 강물도 나뉘어 흐른다. 함께 내린 빗물이라도 흐르는 물길은 제각기 다르다. 서쪽으로 내린 빗물은 콜로라도 강과 하나 되어 태평양으로 흘러들고 동쪽으로 내린 빗물은 미시시피 강과 하나 되어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위대한 강 콜로라도와 미시시피를 품어 흐르게 한 산이라는 것만으로도 로키산맥은 위대했다.
▲ Lake Ireneⓒ최창남

산으로 들어섰다. 아침 숲의 기운은 서늘했고 작은 냇물들은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렀다. 숲은 깊었다. 우리는 Bear Lake Area에서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서둘렀다. Kawuneeche Visitor Center에서 공원 지도와 트레일 안내를 받은 후 곧 바로 34번 도로를 따라 Coyote Valley Trail로 향했다. Trail 곁으로 이어진 들판에는 눈송이처럼 작고 흰 꽃들이 가득했다. 마치 한 여름 들녘에 하얀 눈이 내린 것 같았다. 그 흰 꽃 만발한 들녘 끝에 작은 내가 흐르고 있었다. 깊게 흐르는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Trail을 떠났다. 차창 밖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큰 가문비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그 나무들 뒤로 눈 덮인 산들이 첩첩하고 구름들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그 구름들이 비 되어 뿌린 탓일까. 산 사이로 난 협곡에도 푸른 풀 가득한 목초지가 있고 시내가 흐르고 있다. 그 시내가 흐르는 길의 저편 끝에 Lake Irene가 보였다. 공원 지도에는 한 점으로 표시된 작은 호수였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맑아지는 아름다운 호수였다.

호수는 호수 밖의 것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가문비나무 뒤에 있던 산과 구름과 하늘 뿐 아니라 가문비나무들까지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호수에 담긴 세상은 호수 밖의 세상과 달랐다. 호수가 품고 있는 세상은 호수 밖의 세상과 달리 마음을 씻어주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별세계였다. 세상사는 슬픔에 쫓겨 온 이들의 마음을 씻겨주었다. 세상사는 절망에 쫓겨 온 이들의 마음을 씻겨주었다. 세상사는 고단함에 마음을 빼앗겨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 제 삶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우리는 Milner Pass에 잠시 멈추어 다시 Lake Irene를 바라보았다. 그리움을 남겨 두고 떠나는 듯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 Alpine Visitor Centerⓒ최창남

해발 3,713m을 지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악도로인 Trail Ridge Road는 지나는 곳곳마다 아름다움을 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 덮인 설산의 곁에 세워진 Alpine Visitor Center도 멋지기 이를 데 없었고 Alpine Ridge Trail의 나무 계단 곁에 자라난 하얀 꽃을 피운 채 잎줄기를 난처럼 늘어뜨린 야생화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12,000피트 Trail의 정상에서 내려다 본 산들의 장엄한 아름다움 또한 어찌 빠질 수 있으랴. 산이 산을 품고 또 산이 산을 품은 채 첩첩히 늘어선 장엄한 아름다움 앞에서 내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산은 저렇게 첩첩히 늘어서 수 만 년, 수 십 만 년, 수 억 년을 지나오면서도 말이 없는데 이제 오십년의 세월을 가까스로 넘기며 살아온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저 말없는 바위처럼 묵묵히 앉아 가물가물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 볼 뿐이다.
산과 산이 전하는 말없는 이야기들을 조용히 들고 있을 뿐이다.
▲ Alpine Ridge Trail 나무계단 아래 자란 야생초(Fendler Sandwort)ⓒ최창남

산과 산 사이로 이어져 있는 길을 따라 나서자 차들은 하늘로 오르려는 듯 구름 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늘을 향해 오르기만 했다. 그 모습의 위태로움과 경이로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뒤차의 운전자가 불빛을 번쩍이며 손짓을 한다. 차를 세우니 벌써 차를 세운 뒤차의 운전자는 다가와 앞바퀴에 바람이 빠졌다고 알려준다. 고마운 일이다. 여행 중 만난 미국 사람들은 친절이 몸에 배 있었다. 그들은 친절을 베푸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행 중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늘 먼저 물어 오곤 하였다. '도와 드릴까요?' '사진 찍어 드릴까요?' 하고 말이다.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아 Cub Lake Trail로 향했다. Cub Lake로 가는 길은 한가했다.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들녘 가득 피어난 노란 들꽃들과 풀 섶 사이 나무 사이를 지나던 토끼들과 프레리 독들만이 우리를 반겼다. 경계심 유달리 많은 것으로 알려진 프레리 독이지만 우리를 경계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리라.
▲ Alpine Ridge Trail에 올라..ⓒ최창남

로키 산은 가는 곳마다 야생화와 소리 없이 흐르는 시내들과 호수들로 아름다웠다. 한 시간 남짓 야생화 가득한 들녘과 소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백송나무들 사이를 지나자 부끄러워 몸을 움츠린 듯 Cub Lake가 작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꽃망울을 품고 있는 수초들이 눕고 선 채 호수를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이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서로 눕고 선 채 엉켜 있는 수초들의 모습으로 인해 호수는 날줄과 씨줄로 촘촘히 짜인 아름다운 천 조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늘과 구름과 산과 나무와 바람과 새들이 새겨진 색색의 넓은 보자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초 위에 머물러 있는 바람 한 점 없는 나른한 오후의 정경도 담겨 있을 듯 했다.
나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산의 모든 것들이 호수에 담겨 있었지만 호수 곁에 선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수 곁에 서있는 내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당연한 일인가.
제 삶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생명들만이 이 아름다운 호수에 머물 수 있는 것인가.

제가 살아가야 할 삶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거짓말에 속아 비틀린 삶을 살아가는 생명들은 이곳에 머물 자격이 없는 것인가.
▲ Cub Lakeⓒ최창남

세상이 가르쳐 준 뜻과 신념에 마음을 빼앗겨 제 사랑을 잃고 살아온 이들의 삶은 이처럼 맑고 아름다운 호수에는 비춰지지 않는 것인가.

자연이란 이토록 무섭게 정직한 것인가.
이처럼 엄격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것인가.
나는 한동안 호수를 바라보았다.
무엇엔가 오래 동안 마음을 빼앗겼던 것일까.

나는 내가 호수 곁에 서 있는지 호수가 내 곁에 서 있는지 잊은 채 한동안 수초만 세고 있었다.
수초 사이로 오리 가족이 한가로이 지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숲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숲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따가운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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