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대운하 반대 서명에 참여하고, 대운하 반대 순례단에 하루 참여해서 아직까지는 그래도 그 넓고 아름다운 강줄기를 드러내놓고 있는 낙동강을 걸으면서도 나는 늘 불편한 마음의 납덩이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 대운하는 이미 내 안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이른바 근대 산업화의 풍요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공범자였기 때문이다. 순례단의 한 시인이 시골 집 한 채 값에 상당하는 오토바이를 애마처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서도 강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만 것은 나 또한 오십보 백보라는 자괴감이 먼저 앞섰기 때문이다. 양철을 못으로 긁는 것만 같은 한반도 대운하 추진 목소리는 이미 우리들의 생활 방식 자체에 내재화되어 있었고 나 또한 그런 못긁기의 대열에 일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월소득 150만원 정도의 가구라면 대부분 비정규 노동자 가족일 것이며 차상위 빈곤계층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한 달 소득은 북한과 동남아 노동자들의 2~3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그리고 실제 우리나라 차상위 빈곤계층의 의, 식, 주 소비생활 수준은 역대 어느 제왕보다도 호화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네로 황제도 겨울에 값싼 칠레산 포도를 맛보지는 못했을 것이며, 세종대왕도 여름에 에어컨 나오는 가마 타고 출퇴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보다 더 많은 풍요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아닌 한반도 대운하와 뉴타운 개발이다.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나라, 모든 한국인들이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나라에서 안정된 삶은 오직 더많은 소득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허황된 꿈만이 난무한다. 극히 일부의 자본가들만 빼놓고 온 나라 사람들이 불안정계급이 되어버리고 만 세상에서, 실제로는 모든 대중들이 다 경쟁의 탈락자들이면서도 사다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데도 하여튼 사다리에 먼저 오르려고 아우성치는 이 세상에서, 꿈의 비행기인 보잉 747은 머리 위를 날아 다니고, 대중들은 그 까마득한 747 비행기에서 굵고 확실한 금 동아줄이 내려오기만을 목놓아 기다린다.
결국 내려온 동아줄에는 더많은 해고 통보서와 더 많은 몽둥이와 더많은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와 유전자조작 옥수수와 기타 등등등 헤아릴 수조차 없는 놀부네 박터지기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제 이런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풍요는 절대 지속불가능하다. 우리들의 이같은 풍요는 석유를 비롯한 자연자원(!?)을 단기간에 무자비하게 퍼다 쓴, 미래의 저금통장을 마구잡이로 꺼내다 쓴, 역사상 단 몇 백 년간만 지속된 극히 짧은 석유문명 시대만의 일일 뿐이다. 석유를 비롯한 모든 천연자원은 곧 고갈되고 말 것이고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종말을 목도하고 있는 최초의 목격자가 될 것이다.
한반도 대운하 반대는 그러므로 우리 안의 서구화, 우리 안의 근대화와 대면하는 진실 규명의 작업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 몸과 마음 안에 깊숙이 뿌리내려 괴물처럼 자라고 있는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암세포부터 끄집어 내 밝은 빛 아래 드러내놓는 성찰의 통과제의여야 한다. 대운하 반대가 다른 형태의 경제성장을 말하는 것이라면, 한미에프티에이 반대가 다른 형태의 에프티에이를 찬성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다른 폭력과 자연파괴, 또다른 착취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다른 세계, 다른 질서, 토마스 쿤이 말한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도처에 오늘은 이런 주장을 하다가 내일은 전혀 반대의 주장을 태연하게 말하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폴리페서들, 돈 되는 프로젝트라면 어떤 주문이라도 다 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른바 전문가들이 넘치고 넘친다. 대학이고 언론이고 이른바 비판지성, 비판 지식인들은 지금 멸종위기 종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사자후는 대학이라는 취직학원, 지식동물원에 갇혀 목소리조차 거세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15세기 조선 선비들의 상황과 문제의식은 그런 면에서 오늘날 지식인의 자세에 대해 근본의 문제 제기를 던진다. 15세기 조선의 선비는 현실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질타하고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김종직과 김시습, 남효온과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을 재조명하고 최부, 박상, 김인후, 유희춘, 기대승, 박순, 이발, 정개청 등 호남 사림의 삶을 다시 들추어내는 것은 그러므로 한가한 복고취미도 자잘한 지식욕의 추구도 전혀 아니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실종, 새로운 패러다임의 실종이라는 위기의식의 처절한 기록일 수 있다. 『사림열전』은 우리들을 15세기로 끌고가서 그러한 치열한 현실인식을 배우라고 강요하는 불편한 현장 체험학습과도 같다. 사실 모든 기억투쟁은 냉정하고도 그리고 뜨거운 현실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저 묵은 상처 덧내기나 한풀이로 전락할 뿐이다.
오늘 한반도 대운하의 문제는 보수 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 대 독재의 문제도 아니다. 한반도 대운하로 표상되는 바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극점에서 어떤 삶의 태도, 어떤 사회를 준비해야 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지금의 지속불가능한 풍요를 벗어나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 새로운 대안 질서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이다.
15세기 그 많던 선비들의 숲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1970년대 80년대 목숨 걸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지식인들의 숲은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우리의 강산 전부가 포크레인과 자동차에 다 파헤쳐지고 망가져 가고 있는 오늘날 이종범의 『사림열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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