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태규 명리학 <336>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336>

행복을 받치는 세 개의 기둥 (하)

'넘어서고픈 나'란 말에서 넘어섬의 대상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을 넘어서면 그것이 영원이고 불멸이다.
  
  '불멸 이순신'이란 드라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제목이 기가 막혔다. 바로 '不滅(불멸)'이란 수식어 때문이다.
  
  실로 이순신 장군은 우리 민족이 존립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니 불멸 이순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순신 장군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는가? 그 요소를 알면 바로 불멸로 가는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큰 욕심이라고 미리 단정하지 말라. 지금부터 누구나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니.
  
  불멸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얼마 전 글에서 아주 오래 전에 법현이라는 중국 스님이 불법을 구하고자 그 험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갔다는 얘기를 드렸다. 목숨을 걸고 사막을 넘어선 순간 법현 스님은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누구도 올라보지 못한 산 정상을 올라간 이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산이 좋아서 산에 오른다고 하지만 산을 오르다보면 불멸의 산과 조우하게 되고 그 산을 오름으로써 그 산악인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돈을 벌고자 사업을 시작했던 사업가도 때로는 어딘가에서 불멸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모래사장 밖에 없는 해변을 세계 최고의 조선소로 만들어낸 고 정주영 회장 역시 불멸의 기업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오늘날 번영하는 대한민국으로 이끈 박정희 대통령은 불멸의 정치가.
  
  노동자의 권익과 인간적인 삶을 몸을 불사름으로써 항변한 전태일 역시 불멸의 노동자.
  
  이제 불멸이 무엇인지 아셨을 것이다.
  
  불멸이란 시간을 지나서도 존재하는 것이니 나아가서 죽음마저도 넘어섬을 뜻한다. 그것은 명예와는 약간 성질을 달리한다. 또 반드시 위대한 인물들의 얘기만은 아니다. 그러니 나하곤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넘어서고픈 나 그리고 불멸의 나는 우리가 살면서 흔히 넘어서기 어려운 경계를 넘어서기만 하면 누구나 가능하다.
  
  이 한 몸 바쳐 온 나라가 평안할 수 있다면 하고 그 몸을 크게 바쳤을 때 그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불멸의 존재가 되지만, 가족을 위해 한 몸을 바쳤을 때도 역시 그는 그 가족에게 있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몸을 바쳤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크고 작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명예와는 약간 다른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부귀를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누리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더 가치 있는 무엇을 위해 우리가 몸을 던지는 것은 부귀를 바라는 마음을 넘어서는 것이니 대단한 것이고 그로부터 불멸성을 얻는 것이다.
  
  우리들은 당연한 욕구를 버리고 다른 무엇을 택하는 것에 감동을 받는다. 감동을 느꼈다는 것은 우리가 불멸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자는 감동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시샘을 받는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과정에서 무언가 대단한 얘기가 있었다면 감동을 준다. 그리고 그 감동 스토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면 바로 불멸의 이야기가 된다.
  
  '포레스트 검프'란 영화가 생각난다. 좀 모자라는 검프는 행운이 따라서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지만, 우리가 그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 부분은 결국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고 방황을 해도 검프의 마음은 일편단심이라는 것이다. 검프의 사랑은 불멸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얘기이면서도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대단한 얘기는 감동을 준다. 대박 영화의 공식은 바로 이 감동을 지닌 영화라 하겠다.
  
  감동의 얘기는 불멸의 얘기이며 시간이 더 지나면 전설이 되고 이윽고 신화가 된다.
  
  우리가 먼저 가신 부모님 산소에 가서 왜 눈물을 흘리곤 하는가?
  
  부모님이 우리를 부양하고 키우면서 지불하신 희생의 크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자식인 나에게는 하늘, 땅, 바다와 같이 크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 속에 영원한 것이다. 바로 당신에게 있어 당신의 부모님은 불멸의 존재인 것이다.
  
  이제 아셨을 것이다. 넘어서고픈 나가 무엇이며 불멸이 무엇인가를.
  
  이제 전체를 정리하자. 행복을 떠받드는 세 개의 기둥에 대해.
  
  먼저 욕망하는 나가 있어 우리는 열심히 그 욕망을 추구한다. 좋은 일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좋은 일이니 말이다.
  
  또 존재하고픈 나가 있어 열심히 울타리를 치고 권력과 명예를 추구한다. 좋은 일이다. 누리며 빛나는 존재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니.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죽음마저도 넘어서고픈 나를 지녔다. 그것은 때로 앞의 두 가지 나와 우리 내부에서 충돌하기도 한다.
  
  지극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때로는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역설이며 모순이다.
  
  하지만 역설도 모순도 아니다. '넘어서고픈 나'라는 것이 우리 속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자연스런 것이다. 삶의 현실과 죽음이라는 절대적 제약마저도 훌쩍 뛰어넘고자 하는 인간의 초월적 의지이고 능력인 것이다.
  
  이제 행복을 떠받치고 있는 세 개의 기둥, 세 개의 나에 대해 얘기했다.
  
  세 개의 기둥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기둥이 허물어지면 우리 행복은 전체가 무너진다.
  
  富貴(부귀)를 애써 무시하기도 하지만 자연스럽지가 않다. 오히려 남의 그것을 시샘하는 자가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인 양 사는 사람 역시 바보 같다.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부귀가 전부인 양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 또한 자연스럽지가 않다.
  
  당신이 절에 가서 정성을 모아 빌고 교회에 가서 하느님을 찾는 것 역시 크게 보면 숨어있는 또 하나의 나를 찾아가는 발걸음인 것이다. 그 또 하나의 나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주면 그 이름은 神性(신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니 행복하게 살려면 세 개의 나를 찾아서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 개의 나는 때로 갈등하고 충돌하기도 하지만, 잘 산다는 것은 바라고 얻고자 투쟁도 하지만 때로는 내 욕구와 희망을 희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가진 것도 없고 명예와 권세를 얻지 못했다 해도 누군가를 위해 당신을 버렸다면 당신은 이미 가슴에 빛나는 불멸의 훈장을 달고 있는 셈이다.
  
  작게는 자식을 위해 나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기꺼이 그 길을 갔다면 당신의 삶은 그저 말하는 보람이 아니라 영원성을 얻은 것이며 불멸성을 얻은 것이다.
  
  나아가서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대단한 무엇을 남겼다면 한 때 시기심이 많은 자들로부터 부정 당한다 해도 그 자체로서 불멸이며 시간이 지나면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될 것이니 죽어서도 행복한 삶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일면 투쟁의 역사이다. 도처에 싸움과 미움으로 가득하다. 또 그런 싸움과 미움을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또 싸운다. 싸움은 끝이 없다. 앞으로도 싸움은 끝이 없을 것이기에 평화가 소중한 것이다.
  
  역사는 한편 더러움과 부패의 역사이다. 도처에 그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가득하기에 세상은 썩었다고 절규하는 이도 많다.
  
  그렇건만, 그토록 야만적 투쟁과 부패, 더러움으로 가득한 인류의 역사이건만 왜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운가.
  
  이 질문, 이것은 필자가 평생 그 답을 얻고자했던 일대 話頭(화두)였다. 많은 가르침과 지혜의 책들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음양오행과 운명학도 그런 탐구의 일부였다.
  
  쉽게 답을 찾지는 못했으나 마음 한편으로 그 피와 미움으로 가득한 투쟁과 더러움, 부패를 부단히 씻어내고 정화하는 그 무엇이 있기에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고 여겨왔다.
  
  결과로 해서 삶은 번뇌와 고통이지만 그것이 바로 행복의 다른 이름이며, 투쟁과 부패, 더러움이지만 그것 또한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그 속에는 욕망하는 나와 존재하고픈 나에 더하여 '넘어서고픈 나'가 있기에 그리하여 우리 주변은 무수한 불멸의 존재들로 넘쳐나기에 세상은 아름답다는 것이 필자의 평생에 걸친 해답이다.
  
  먹고 살면서 나를 확인받으며 또 다른 이에게 불멸의 존재가 된다. 당신은 행복할 것이다. 남을 못 먹게 하고 남을 부정하며 부귀만이 전부인 양 산다면, 그리하여 불멸의 존재일 수 있음을 스스로 버린다면 그대는 불행할 것이다.
  
  또 현실의 세상은 이 두 가지 모습의 어느 중간에 존재하니 우리는 불행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크게는 세상에 대해 적게는 누군가에게 그리고 가장 적게는 풀 한포기의 여린 생명에 대해서라도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 넘어설 수 있다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삶은 정말 멋지지 않은가.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부디 不滅(불멸)의 사람이 되기를!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