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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나다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18> 아치스 국립공원 (하)

하늘은 맑았다. 얼마나 맑았던지 하늘조차도 눈부셨다. 빛났다. 아침부터 햇살은 뜨거웠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온도계를 보니 벌써 화씨 98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에 만나는 아치스는 어제 저녁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뭉크의 그림을 닮았던 바위들도 여느 바위들처럼 울퉁불퉁해 보였고 신상의 모습으로 내게 몸 기울이며 맞이하고 보내던 거대한 석상들도 빛을 잃고 여느 석상들처럼 그저 담담히 서있을 뿐이었다.

들어서는 길에서부터 마치 다른 세계 다른 행성에라도 다다른 듯 보이던 Park Avenue의 모습도 뜨거운 햇살 탓인지 그저 황량하기만 했다. 황량했지만 장엄하기도 했고 친근했다. 거대한 절벽 곁에 늘어선 돌기둥과 첨탑들의 모습이 웅장했고 수억 년 빚어온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친근했다. 마치 베일에 가려져 있던 속살을 보는 것 같아 때로 민망해 눈을 돌리기도 했다. 바람 한 점 없다. 달리는 길 저편에서 아지랑이처럼 대기가 타오른다. 지열이다.

지난 저녁 어둠 깊어지기 전에 만났던 아치들이 창밖으로 지나간다. 수억 년 전 바닷물이 들어오면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땅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2,000여개의 아치(Arch)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치 사이의 구멍이 약 1m 밖에 안 되는 작은 것으로부터 높이가 100m에 달하고 아치의 두께가 5m나 되는 랜드스케이프 아치(Landscape Arch) 같은 것도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수많은 첨탑 모양의 석상들과 돌기둥들이 웅장한 바위 절벽들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하나하나가 자연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조형물들이다. 그야말로 자연의 손길로 만들어 놓은 자연의 조각 공원 같다. 신의 손길로 빗은 신의 정원 같다. 아무리 신의 손길로 빗었다 하더라도 저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저 붉은 바위들 안에서 나왔다는 것이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다.
▲ Sand Duneⓒ최창남

이 아름다운 아치들과 첨탑들, 돌기둥들은 모두 어디서 온 것일까.

정말 저렇게 많은 붉은 모래 바위들 속에서 나온 것일까. 미켈란젤로의 말대로 저 조형물들은 살아 있는 바위 안에 갇혀 있던 것일까. 그의 말대로 그는 바위 안에 있던 아름다운 생명체들을 꺼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생명체들은 왜 바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인간이 이 아름다운 생명들을 파괴할 것이 두려워 신이 숨겨 놓은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바위 안에 숨겨져 있는 이 아름다운 생명들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을 뜨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건축가 루카스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닐까. 그의 말처럼 하찮아 보이는 돌조차도 모두 무엇인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저 붉은 모래 바위였던 바위가 무엇인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그 염원 그 바람 그 간절한 마음이 비를 불러 오고 바람을 불러와 그들의 모습을 빚은 것은 아닐까. 저 살아 있는 조형물들은 원래 바위 안에 갇혀 있던 것이 아니라 바위들이 수억 년의 시간을 통하여 만들어 놓은 제 삶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길을 가는 내내 따라 왔다. 우리는 어제 저녁에 만났던 Delicate Arch Viewpoint를 지나쳐 첫 번째 목적지인 Fiery Furnace로 향했다. Fiery Furnace(뜻:불타는 용광로)는 노을 불타는 저녁이면 촘촘히 들어선 돌탑에 새겨진 아치에 노을이 그대로 옮겨 붙어 마치 불기둥이 타오르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 Devils Garden으로 들어가는 길ⓒ최창남

우리는 Sand Dune Arch와 Skyline Arch를 지나 최종 목적지인 Devils Garden으로 향했다. 길은 Devils Garden을 향해 있었다. 길의 끝에 Devils Garden이 있었다. 차량들은 Trailhead에서 멈추어 서거나 돌아나갔다. 거기서부터는 오직 걸어야만 했다. 차에서 내리자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간이 화장실은 뜨거운 열기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고 나무들은 모두 껍질이 벗겨진 채 비틀리고 비틀려 있었다.

언제나 여름이면 자외선 알레르기로 인해 고생하는 나는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히 발랐다. 물도 충분히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Devils Garden으로 들어가는 길은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듯 은밀해 보였다. 붉은 색의 거대한 바위들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었다. 길 너머로 마치 다른 세계가 있는 듯하였다. 하늘은 눈부시도록 푸르렀다. 마치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에서 만난 호수처럼 푸르고 맑았다. 푸른 하늘에 구름만이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잡풀들과 거의 땅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키 작은 관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키 작은 관목들처럼 땅에 붙은 듯 말없이 걷기만 하였다. 입을 열면 너무나 뜨거운 열기로 인해 이내 지쳐 버릴 것만 같았다.

Tunnel Arch를 지나 Pine Tree Arch로 지나는 길 옆 바위에 갈까마귀인 레이븐(Raven)이 내려앉았다. 윤기 나는 검은 깃털이 햇볕을 받아 더욱 빛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어둠만큼이나 검게 빛났다. 윤기 나는 검은 털과 빛나는 눈동자가 붉디붉은 땅과 잘 어울렸다. 이 황량한 땅과 참 잘 어울리는 새였다. 이 땅에는 사슴이나 여우, 북미산 대형 토끼, 검독수리나 매 등도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볼 수 있는 행운은 얻지 못했다.
▲ Pine Tree Archⓒ최창남

아쉬움을 달랠까 하여 고개를 들어 보니 잘 생긴 소나무 몇 그루를 품고 있는 아치가 보였다. 그 모습이 그대로 이름이 된 Pine Tree Arch가 눈앞에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소나무들도 힘들었던지 서로 기대 살아가고 있었다. 바로 서있는 소나무 곁에 넘어질 듯 기대 서있는 소나무도 있고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소나무도 있었다. 마치 거짓말같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림 같았다.

이처럼 황량한 땅에서 어떻게 저런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자라날 수 있었을까.

아치가 품고 있는 것은 나무들만이 아니었다. 흰 구름도 푸른 하늘도 그곳에 있었다. 아치를 통해 보이는 하늘은 마치 내가 머물러 있지 않은 다른 땅의 하늘인 것처럼 아름다웠다.

하늘도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구나.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 Landscape Archⓒ최창남

나는 아치 안으로 거의 들어갈 듯 몸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었다. 아치 안에 담겨 있던 나무들과 하늘을 카메라에 담았다. 거기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처럼.

Pine Tree Arch를 떠났다. 길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얼마나 한참 걸었을까. 온 몸은 이미 땀에 절어 있었고 물은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왼 무릎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길의 저편에 자그마한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쉬고 싶은 마음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Landscape Arch는 그 숲에 있었다. 부끄럽기나 한 듯 그 큰 몸을 숨기고 있었다. 참으로 거대한 아치였다. 높이가 100m에 달하니 다른 아치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아치는

산 너머로 둘러있었다. 산 너머 하늘까지 둘러 있었다.
저 큰 모습을 어떻게 바위 안에 숨기고 있었을까.

저토록 크고 장대한 모습을 빚어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와야 했을까. Landscape Arch를 바라보며 무심히 흐르는 시간을 다시 느낀다.
내 삶에는 얼마나 시간이 주어져 있을까.

나도 저처럼 빚어낼 만한 것을 마음 안에 삶 속에 지니고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러 종류의 침엽수들이 보였다. 소나무도 있고 전나무도 있다. 가문비나무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키 작은 관목들 또한 드문드문 눈에 띈다.
▲ Landscape Arch 앞에 서있는 두 그루 나무ⓒ최창남

이곳에는 그래도 제법 많은 나무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고 있구나.

돌아서는데 길 양 편에 마주 서 있는 나무 두 그루가 보인다. 마치 마주나기를 나뭇잎처럼 좁은 길을 마주보고 서있다. 한 그루는 푸른 잎 무성하고 다른 한 그루는 껍질이 모두 벗겨진 채 죽어 있었다. 뜨거운 햇살과 지열로 인해 껍질이 모두 타버린 것일까. 가지들은 비틀리고 비틀려 꼬여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살려 달라고 절규하는 이의 손짓 같기도 하고 내 손을 잡으라고 내미는 구원의 손길 같기도 하였다.
어떻게 한 땅에서 자라면서도 이처럼 다른 삶이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지나온 삶은 어떤 나무의 모습을 닮아 있을까.
내 살아갈 삶은 어떤 나무의 모습을 닮아 갈까.

그 나무들을 만지며 눈물이 났다. 내 삶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지나온 삶의 모습이 거기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정오를 훌쩍 넘긴 아치스의 태양은 더욱 뜨거웠다. 떠나기에 앞서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Landscape Arch를 바라보았다. 아치가 품은 하늘이 눈부시도록 푸르렀다. 햇살에 눈물이 나도록 눈부셨다. 나는 눈물 흘렸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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