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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아름다움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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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아름다움 속에서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17> 아치스 국립공원 (상)

나는 트레일(Trail)을 구분하기 위해 세워 놓은 난간에 기대어 델리케이트 아치(Delicate Arch)를 바라보았다. 점점 심해가는 왼 무릎의 통증으로 인해 나는 아치스 국립공원 뿐 아니라 유타(Utah)주의 상징이 된 델리케이트 아치를 곁에서 바라볼 수 없었다. 노을 드리워가는 고즈넉한 저녁 viewpoint에서 멀리 바라보고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은 마치 붉은 바위언덕 위에 세워진 신전의 문 같았다. 저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그 문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그 모습이 장엄하기도 하고 사뭇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아름답기도 하고 외롭게 보이기도 했다.

너무나 장엄한 탓이리라.
너무나 아름다운 탓이리라.

저토록 외롭게 보이는 것이 말이다. 붉은 언덕과 모래 바위들과 그것들이 닿아있는 길들을 달구던 해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사위는 조금씩 어두워간다. 하늘 저편이 붉다. 붉은 것 또한 아름답다.

장엄하게 자란 나무 한 그루 없는 땅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온통 붉은 바위와 잡풀만 무성한 땅이 이처럼 눈물짓도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흙 한 알갱이 흙 한 줌 쥘 때마다 이처럼 시리도록 가슴 설레게 할 수 있을까.

가슴 저린 아름다움 속에 앉아 여러 날 동안 괴롭히던 통증들을 잊어 가고 있었다. 이미 몸은 그랜드 캐년에서부터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묵직한 통증만 느낄 수 있었던 왼 무릎은 심하게 쑤셔왔다. 어깨 근육도 찢어지는 듯 아팠다. 한 여름 날 몸살이 오려는지 온 몸이 맞은 듯 쑤시고 아팠다. 자이온(Zion)에서 아치스(Arches)로 오는 5시간 40분 동안 몸은 끝없이 가라앉고 마음은 쉬고 싶기만 하였다.
▲ 멀리 보이는 델리케이트 아치(Delicate Arch)ⓒ최창남

그러나 처음 만난 아치스는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나를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방문자 센터(Visitor Center) 앞마당을 유유히 거닐던 단아하기 그지없던 사슴 두 마리가 아니라 센터 곁에 웅크린 채 말없던 크고 작은 붉은 바위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뭉크의 대표적 작품 '절규'에 나오는 여성처럼 저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절규하고 있었다. 그 절규조차도 그림을 닮아 있었다. 소리 없는 절규였다.

그러나 닮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바위들은 절규하고 있었지만 그림처럼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았다. 절망적이게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나를 그들의 내부로 이끌었다. 나는 그 길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갔다. 달리기도 하고 내려 걷기도 하였다. La Sal Mountain, Three Gossips, Courthouse Towers, Tower of Babel, Petrified Dunes, Rock Pinnacles를 혹은 곁에서 혹은 멀리서 느끼며 만났다.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채 오랜 세월 동안 서있는 Balanced Rock도 만났다.

조금씩 저물어가는 저녁에 비쳐진 모습이 앞 다리를 든 용가리를 닮았다며 우리는 웃었다. 아치스의 황량함이 주는 장엄한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웃음은 허허롭게 느껴졌다. 붉은 모래 바위뿐인 이 황량한 땅에 깃드는 저녁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젖어드는 어둠의 아름다움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그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의 웃음은 허허로웠다. 말이 필요 없는 저녁이었다. 그저 마음 깊이 스며드는 절절한 아름다움에 젖으며 느끼기만 하면 되는 저녁이었다.
▲ Visit Center 옆에 있는 바위 - 뭉크의 작품 '절규'를 닮았다.ⓒ최창남

Delicate Arch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조금씩 어둠이 깃들고 있는 길을 따라 제법 걸어 들어가자 길의 끝이 있었다. Delicate Arch Viewpoint는 그곳에 있었다. 아치가 보였다. 아치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지친 몸을 난간에 기대었다.

약 3억 5천 만 년 전 바닷물이 들어와 쌓아 놓은 수백 미터 두께의 사암들로부터 만들어진 붉은 사암의 조형물들이 있는 땅이다. 그 자연의 조형물들은 붉어가는 하늘 아래서 때로 눈부시게 때로 단아하게 서있다. 그 모습 하나하나에 수 억 년 바람과 비와 눈과 햇살의 손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흙 알갱이 하나 돌의 한 숨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자연의 손길만 닿았으니 흙 알갱이 하나 붉은 바위 하나가 저토록 가슴 저리게 황홀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었으리라.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면 보잘 것 없는 제 뜻 하나 드러내기 위해 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으리라. 시대의 정신을 운운하고 이데올로기를 떠들어대며 이 아름다움들을 파괴했으리라. 발전을 외치며 이 땅을 파헤쳤으리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으리라.
▲ Park Avenueⓒ최창남

붉은 사암들과 흙뿐인 산, 약간의 잡풀과 소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등의 침엽수들만이 살아가고 있는 척박한 땅이지만 이 땅은 나무 울창하고 숲 우거진 어느 국립공원보다 아름다웠다. 아치스 국립공원(Arches National Park)은 자연의 모든 기운을 그대로 담은 채 무위(無爲)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람과 햇살과 비와 눈과 이슬과 공기와 습도와 시간 등 모든 우주의 숨결들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풀도 나무도 꽃도 깊은 계곡도 흐르는 물도 장엄한 협곡과 폭포도 지니고 있지 않은 땅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름다움, 자연 그대로의 땅 - 이것이 바로 아치스의 아름다움이다. 무위의 아름다움이다. 이 땅에 들어오는 이들은 누구나 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이 아름다움에 가슴 절이며 이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애쓰게 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애비(1927~1989)처럼 말이다. 에드워드는 1956년부터 1957년까지 2년 동안 이곳에 홀로 머물며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라는 책을 썼다. 그는 사람들로 인해 파괴되어가고 있는 아치스를 아파했다. 자연 그대로 야생의 상태로 보존해야함을 역설했다. 그는 실제로 공원 레인저로 15년 동안 일하며 이를 위해 노력했다. 애드워드는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치스의 아름다움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사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깃드는 어두움으로 인해 붉은 바위들은 시시각각 다른 빛깔을 띠며 변하고 있었다.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에 구름은 한가하고 지는 노을은 붉다. 붉은 바위들이 더욱 붉어졌다. 지는 노을을 따라 모든 것이 변해갔다. 빛깔도 변하고 모습도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졌다. 마치 지금 이 순간 아치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땅은 지금도 형성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땅 속 깊이 바위 속 깊이 단단히 품고 있었던 수많은 아름다움들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고작해야 칠팔십 년을 사는 인간들의 눈에만 그것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 Ballanced Rockⓒ최창남

나는 다리를 절룩이며 기대서 있던 난간을 떠났다.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자 내가 가보지 못한 땅이 길을 품은 채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위는 고요하여 나무들의 숨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아쉬움 그대로 남겨 둔 채 어둠 깊어지고 있는 길을 따라 내려오자 내내 먼지를 뒤집어 쓴 차가 보였다. 차 뒤로 구름 사이로 들어간 더 붉어진 노을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번개가 내려치는 듯하였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마을인 모압(Moab)으로 향했다. 저녁 8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차창 밖으로 아치스의 붉은 모래 바위들이 보였다. 깊어지는 어둠 속에서 바위들의 모습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너무나 신비로웠다. 도열해 있던 병사들처럼 보이던 녀석들은 모두 신상의 위엄을 입은 채 근엄하였고 바위 사이로 나 있던 길은 마치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또 다른 길처럼 보였다. 소리 없이 절규하고 있던 녀석들도 모두 내 아픔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붉은 바위들 위로 구름이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신비롭고 장엄한 광경이었다.

모압은 가까웠다. 모압에는 숙박시설이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는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방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Comfort Suit이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처음 들어간 곳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편안한 곳이었다. 방도 매우 넓었다. 소파가 있는 거실도 있었다. 냉장고도 전자레인지도 물론 있었다. 냉장고와 전자레인지가 있는 방을 얻는 것은 장기간 여행을 다니는 여행객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음식을 보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간단한 음식은 만들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가격도 적당하면서 냉장과 전자레인지를 구비한 숙소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행운과 노력이 함께 따라야 하는 일이다.
▲ Arches의 붉은 낙조ⓒ최창남

우리들은 여행 중 전자레인지를 이용하여 늘 점심으로 주먹밥을 만들곤 하였다. 햇반과 주먹밥 양념과 김만 있으면 아주 훌륭한 주먹밥을 만들 수 있었다. 주먹밥 안에 물기를 짜낸 김치를 조금 넣어 더욱 환상적인 점심을 즐기곤 하였다.

우리는 오랜만에 밥을 지었고 꽁치김치찌개도 끓였다. 그리고 배낭 깊숙한 곳에 아끼고 아껴 두었던 소주도 꺼내 놓았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행복한 저녁이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밤이었다.

모압의 하늘 아래서 내 얼굴은 붉어지고 있었다. 마음도 붉어지고 있었다.
아치스의 붉은 바위들을 닮으려는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렇게 모압의 밤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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