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버진 강을 만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버진 강을 만나다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15> 자이언 국립공원 (상)

자이온(Zion)으로 가는 길 또한 가까운 듯 멀리 있었다. 끊임없이 달려도 결코 멈추어 서지 않는 사막의 황폐한 들녘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곁으로 산들이 들녘을 에워싸듯 첩첩이 서있었다. 어쩌면 들녘이 제 외로움 달래려고 산들을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 들녘의 일부이기나 한 것처럼 소리 없이 달렸다. 맑은 하늘이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맑기만 했던 하늘이 우리가 자이온의 입구에 해당하는 페이지(Page)에 이르렀을 때 흐려지더니 비가 내렸다. 검은 구름이 하늘 저 편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점점 빗방울도 굵어지고 있었다. 서둘러 길을 떠난 우리가 Glen Canyon Dam과 Powell Lake를 지날 즈음에는 하늘은 온통 검어졌다. 주위는 어두워졌고 퍼붓듯 비가 쏟아졌다.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갑작스레 많은 비가 쏟아졌다.

땅을 처음 발견한 모르몬교도들이 그 깊은 아름다움과 신비로움과 장엄함에 놀라 '신의 정원'(Garden of God)이라 부르던 땅, '신의 보물'(Treasure of God)이라고 부르던 땅을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낯선 이방인에게 보이기 싫다는 듯 갑작스레 쏟아졌다. 그러나 검은 먹구름 사이로 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번개 빛이 가야할 길을 열어주었다.

화씨 105도에 달하던 기온이 75도로 떨어질 무렵 우리는 자이언 국립공원(Zion National Park)에 도착하였다. 퍼붓듯 내리던 비는 멈추었다. 비는 오후 다섯 시였다. 장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붉고 흰 바위들이 더 이상 나가서는 안 된다는 듯 앞을 가로막았다. 붉은 바위들은 아직 남아 있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분위기에 이끌렸던 것일까. 자연의 경이로움에 마음이 경건해진 탓일까. 차를 세웠다. 그 신성한 땅에 들어가기 전 땅을 딛고 몸으로 느껴야만 할 것 같았다. 아파트 수십 층 수백 층의 높이는 될 것 같은 붉은 암벽들과 갈색의 암벽들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것만 같았다. 지나 온 길에서 묻혀온 세상의 묵은 때들을 씻어내고 들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암벽들을 바라보았다. 암벽의 산 곁에 섰다. 신의 정원이라는 이름 그대로 신의 손길이 닿아 있는 듯했다. 약 6,000만 년 전부터 퇴적해 있던 수성암반이 서서히 융기해 솟아나 만들어진 땅이었다. 약 1,300만 년 전 다시 융기한 후 오랜 세월 눈과 비와 바람이 쓸고 닦고 씻어내며 만들어 놓은 암벽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의 손길로 빗어진 암벽 산이었다.
▲ Zion 국립공원 입구 - 우리나라의 빗살무늬 토기를 닮은 붉은 산이 방문객들을 반긴다.ⓒ최창남

자이언은 그랜드 캐년과는 사뭇 그 느낌이 달랐다. 그랜드 캐년은 들여다 볼 수 없는 깊은 협곡의 중심을 협곡의 가장자리(rim)에서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지만 자이언은 바닥에서 올려 보아야 했다. 그랜드 캐년은 볼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었지만 자이언은 그 깊이를 넘어선 높이에도 불구하고 그 끝을 볼 수 있었다.

그랜드 캐년은 비밀을 많이 숨기고 있는 협곡을 지나는 두려움을 품게 하였다면 자이언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자연의 순결함과 담백함으로 말미암아 경건함을 품게 하였다. 그랜드 캐년은 화려하지만 자이언은 소박했다. 그랜드 캐년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에는 많은 할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이언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할 말은 절로 사라지고 말았다. 오직 들어야 할 말들만이 가득한 것 같았다.

아직 노을이 깃들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붉은 바위들 탓인지 하늘이 붉은 듯하였다.
▲ 자이언 마운틴 카멜 터널(Zion Mt, Carmel Tunnel)
- 사람들에게는 'Good View Long Out Ternnel'이라는 애칭으로 알려져 있다.ⓒ최창남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느리게 나갔다. 도로가 점점 좁아지더니 이내 터널이 나왔다. 차가 한 대 씩 밖에 지나지 못하는 터널이었다. 1,920미터에 달하는 이 긴 터널은 은 '자이언-마운틴 카멜 터널'(Zion-Mt, Carmel Tunnel)이라는 정식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굿 뷰 롱 아웃 터널'(Good View Long Out Tunnel)이라는 애칭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것은 터널에 뚫려 있는 '천사의 창문'(Angel's window)이라고 불리는 다섯 개의 창문 때문이다. 이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의 빛만이 이 어두운 터널을 밝혀주는 유일한 빛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나갈수록 더욱 커지는 창을 통해 보이는 자이언의 모습이 너무나 매혹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1847년 모르몬교도들이 Salt Lake City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이후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 공원은 1919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천사의 창문이 있는 터널은 1930년 후버(Hoover)대통령 재직 시에 뚫렸다.

우리는 천사의 빛을 받으며 터널을 지났다. 터널을 지나자 붉은 거대한 암벽들이 눈에 가득했다. 암벽들 사이로 작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드문드문하였다.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차려 입은 어린 소년 하나가 옆으로 거대한 암벽 위에 그림처럼 앉아 있다. 꼭 작은 전나무 같다. 무엇을 바라보는지 움직이지도 않는다.
▲ 바람과 비와 강물의 흔적이 바위에 수많은 결들을 많들어 놓았다.ⓒ최창남

저 어린 소년도 자이언의 경이로움에 취한 것일까.
자이언의 붉은 암벽 깊은 곳에서 울려 나는 소리들을 듣고 있는 것일까.
자이언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일까.

차를 세우고 아이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아이를 지나치며 마치 소중한 것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처럼 허전했다. 아쉬웠다. 그러나 우리는 아쉬움을 묻어둔 채 서둘러 공원 내의 유일한 숙소인 Zion Lodge로 향했다.

'사슴이다...!'

사슴 두 마리가 도로를 가로 질러 건너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슴 두 마리 지나온 길에 몇 마리가 아직 남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족들인가 보다. 참으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우리는 사슴들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 Visitor Centerⓒ최창남

저녁 해가 아직은 붉은 암벽 산 너머로 몸을 숨기지 않았을 때 우리는 Zion Lodge에 도착할 수 있었다. Lodge 앞 광장 한가운데에 큰 참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올려다보니 산 전체를 가릴 만큼 큰 참나무였다. 산의 붉은 빛깔 때문이었을까. 참나무의 푸른 잎이 더욱 푸르렀다.

어두워지기 전 서둘러서 짐을 내려놓고 길을 나서자 수 만 년 수십 만 년 고요히 흐르고 있는 Virgin River가 우리를 맞았다. 버진 강은 탁해 보일 정도로 짙은 옥빛을 띄고 있었다. 강을 가로 질러 놓여 있는 다리 가운데 서자 강은 더욱 아름다웠다. 강가와 한가운데 붉고 흰 크고 작은 사암들이 갖은 모양으로 놓여있었다. 강은 그 모래 바위들을 어루만지고 감싸고 휘감으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강이 갈 곳 없는 그 모래 바위들을 품어 안은 것 같기도 하고 붉고 흰 모래 바위들이 오랜 세월 말없이 흐르고 있는 강물을 위로하는 듯도 했다. 강가에는 오랜 세월 벗이었던 버드나무와 참나무, 전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단풍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 Virgin Riverⓒ최창남

우리는 촘촘히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나무들과 암벽으로 이루어진 숲으로 들어갔다. 2,000피트, 3,000피트 높이로 솟아있는 암벽들이 길을 막아설 때마다 또 다른 암벽들 사이로 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길을 품고 있는 암벽들 위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폭포라고 하기에는 쑥스러운 작은 물줄기들이었다. 비가 오면 제법 많은 양의 물을 쏟아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두 개의 작은 폭포를 지나며 숲길을 오르자 보이지 않던 저 길의 끝에서 부끄러운 듯 에메랄드 풀(Emerald Pool)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세월 살다가 쓰러진 나무 등걸들과 거센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이 에메랄드 풀의 바닥에 이러 저리 누워있었다. 물은 에메랄드 빛 그대로 투명하였다. 바닥 구석구석 작은 흙 알갱이 하나까지 다 보였다. 물빛 때문일까. 수면 위에 떠있는 나뭇잎들조차 투명하였다. 가쁘게 숨 몰아쉬고 있는 동행의 얼굴도 투명하였다. 창백하리만큼 투명했다.

이 호수는 이렇게 수 천 년 수 만 년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 채 살아오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무엇을 하겠다고 그렇게 아우성치며 살아왔을까.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 정말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참으로 바보 같은 일이다. 누군가를 위한 삶이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저 호수처럼 자신을 아름답게 할 때에만 산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말이다. 저를 찾는 이들의 마음 또한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것을 말이다. 저 작은 호수가 내 마음을 위로하고 아름답게 하듯이 말이다. 마음 깊은 곳까지 끼어 있는 묵은 때들을 깨끗이 씻어주고 있듯이 말이다.
▲ 공원내의 유일한 숙소인 Zion Lodgeⓒ최창남

에메랄드 풀 위로 하늘이 붉어지고 있다. 해가 붉은 산 너머로 지고 있다. 노을이 진다. 붉은 노을이 더욱 붉다. 나뭇잎도 붉고 얼굴도 붉었다.

돌아서자 에메랄드 풀로 우리를 이끌어준 길이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놓여 있었다. 길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온통 붉어지고 있는 깊은 숲에서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